- 창작과 비평.
‘창작과 비평’(창비)은 ‘문학과 지성’(문지)와 더불어 1970년대 국내 지성계에 끊임없이 자양분을 공급해 준 ‘지성의 산실’이었다. ‘창비’가 실천적 이론에 비중을 두고 문학의 현실 참여를 주장했다면 ‘문지’는 이론적 지성으로 현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시도하고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다.
‘창비’는 1960~1970년대의 지성인들에게는 ‘저항의식의 저수지’이자 ‘문학 비평의 호수’였으며 다양한 진보 담론의 발상지였다.
이 ‘창비’를 창간한 주역은 백낙청(1938~)이다. 백낙청은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9년 브라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0년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돌아와 군에 입대했다. 1963년 서울대 영문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조교수가 된 백낙청은 순수문학이든 관변문학이든 기성문단에 도전하겠다며 1966년 1월 15일 132쪽 분량의 ‘창작과 비평’을 창간했다.
창간호(1966년 겨울호)에는 편집인 백낙청의 권두 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비롯 장 폴 사르트르와 찰스 라이트 밀즈의 번역글, 김승옥과 이호철의 단편소설 등이 실렸다.
한자 표기를 줄이고 가로쓰기를 도입한 창간호 2,000부는 지식인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어 그런대로 팔려나갔으나 2호부터는 실적이 좋지 않았다.
창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백낙청이 박사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창작과 비평사’라는 이름의 잡지사를 설립한 1969년이었다. 이문구, 황석영, 신경림, 김남주, 현기영, 강만길, 리영희 등 스타 글쟁이들이 창비와 인연을 맺었다.
1974년 1월 창비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도서출판 ‘창비’를 설립해 단행본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1975년 1월 신경림의 ‘농무’, 조태일의 ‘국토’로 시작한 ‘창비 시선’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잇달아 내면서 토속적이고 저항성 강한 시인들의 활동공간 구실을 했다.
창비는 유신 정권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호철, 송기원, 윤흥길, 조태일, 이문구, 황석영 등 창비 문인들이 ‘개헌청원지지 문인 61인 선언’(1974.1)에 대거 참여하고 1974년 11월 결성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설립을 주도하며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