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독도 모습
1953년 10월15일 독도의 동도에 상륙해 일본인들이 박아놓은 말뚝을 뽑아내는 한국산악회 회원들.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시마네현의 고지(告知)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 (1905년) 2월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정한다는 조례를 3월19일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한 데
이어, 2월23일에는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주한 일본대사가 외신과의 회견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해 우리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어, 2월23일에는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주한 일본대사가 외신과의 회견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해 우리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런 가운데 6·25전쟁(1950) 직후 한국 사회가 독도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진귀한 사진이 다량 발견되었다.
이 사진은 1953년 10월15일과 16일에 김한용(金漢鏞·81)씨가 한국산악회의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과 함께 해군 905정을 타고 독도에 들어가 찍은 것. 김씨는 오랫동안 광고사진 작가로 활동해왔고 최근까지 중앙일보 문화센터에서 사진 기술을 강의해온 원로다. 독도 탐사 직후 발간된 당시의 한국산악회 회보에는 김씨가 찍은 사진이 몇 장 실렸고, 이를 복사한 사진이 지금까지 유통돼 왔다.
그러나 김씨가 갖고 있던 원판 사진은 단 한 번도 공개된 바 없다. 김씨는 지난해 3월26일부터 4월4일까지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80세 기념 작품전을 열며 이 원판 사진을 공개했으나, 어떤 언론도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주간동아와 접촉해 이를 최초로 공개했다. 김씨 사貶【�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한자로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쓰인 2m가 넘어 보이는 나무 말뚝을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뽑아내는 장면(사진 맨 위). 기록에 따르면 이 나무 말뚝은 6·25전쟁 발발 2년째인 1952년 6월25일 미국 성조기를 단 일본의 수산시험선을 타고 독도에 상륙한 9명이 박았다고 한다(김씨는 “이 말뚝이 나무로 제작돼 있었다”고 증언했다. 오치군은 69년 지금의 오키군 隱岐郡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전면에 ‘독도’ ‘獨島’‘LIANCOURT(리앙쿠르)’를 새긴 표석을 설치하는 홍종인 한국산악회 회장. 홍 회장은 ‘이 표석은 넓이가 두 자가량, 높이는 자가웃, 부피는 한 자 조금 못 된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한 자는 약 30.3cm이다) 한국산악회는 이 말뚝을 뽑아낸 다음 위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도와 獨島’를, 아래에는 국제 해도에서 독도를 지칭하는 LIANCOURT(리앙쿠르)란 프랑스어를 파넣은 화강석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 표석은 1년 전인 52년에 설치하려다 못한 것이라 뒷면에는 1952년 8월15일을 뜻하는 영문이 새겨져 있었다. 대신 한국산악회는 표석 옆면에 표석을 실제 세운 날인 53년 10월15일을 추가로 새겨넣었다.
이 표석은 1년 전인 52년 8월15일 설치하려고 준비했던 것이라 뒷면에는 ‘15th AUG 1952’(1952년 8월15일)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김씨는 ‘국제보도’란 이름의 월간지 사진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제보도사 사장인 송정훈씨가 한국산악회 회장이었던 홍종인(1903~98)씨와 막역한 사이였다. 때문에 송 사장은 한국산악회가 행사를 열 때마다 김씨를 보내 사진을 찍게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김씨는 한국산악회의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에 참여한 유일한 사진기자가 되었다.
표석을 설치한 뒤 독도에 상륙한 16명의 대원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맨 앞줄의 모자를 쓰고 사진기를 멘 이가 김한용씨. 한국산악회는 조선산악회란 이름을 쓸 때부터 독도 영유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미군정 시절인 47년 8월, 홍 회장을 중심으로 한 조선산악회 대원들은 미군정 한국과도정부 소속의 울릉도·독도 조사대의 신석호, 이봉수씨와 함께 해군의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의 ‘대전환(大田丸·당시는 일본식이 짙게 남아 있어 함정을 환이라 했다.
지금 표현으로는 대전정이나 대전함이 된다)’을 타고 독도에 들어가 조사를 하고, 조선산악회와 과도정부 조사대 명의로 푯말을 세웠다(1차 조사).
산악회 조사대는 측지반, 기록반, 보도반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측지반이 동도 정상으로 올라가며 측량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이 6·25전쟁 중이던 52년 5월28일, 일본 시마네현 어업시험장 소속의 시험선 ‘시마네마루(島根丸)’가 독도 주변의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일이 있었고, 한 달 뒤인 6월25일에는 미국 성조기를 단 일본 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정박해 9명을 상륙시켜 문제의 나무 말뚝을 박았다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광복 이후 일본인이 독도에 상륙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다).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광복 이후 일본인이 독도에 상륙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다).
기록에 따르면, 독도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51년 6월, 경상북도 지사가 48년 6월8일 일어난 미군기의 독도 폭격으로 희생된 어민 14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설치한 ‘독도어민조난자위령비’를 때려 부쉈다고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일을 이용해 하강하는 산악회원. 한국산악회는 이 위령비 가까운 곳에 독도와 LIANCOURT란 문자를 새긴 화강석을 세웠다고 분명히 밝혔고, 김씨가 찍은 사진에서도 이 위령비가 서 있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47년 조선산악회가 세웠다는 푯말이 이때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철거한 것은 47년 조선산악회와 과도정부 조사대가 세운 푯말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인들이 독도에 상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쟁 중임에도 한국 사회는 크게 들끓었다.
그리하여 한국산악회가 광복절인 8월15일 독도에 들어가 다시 조사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화강석으로 된 표석을 준비해 울릉도까지 갔다. 그런데 마침 독도 인근에서 미군기들이 폭격 연습을 하고 있어 독도 상륙을 포기하고 울릉경찰서에 표석을 맡겨놓고 돌아왔다(실패한 2차 조사).
한국산악회는 독도의 동도로 상륙해 해변에 텐트를 치고 하루 야영을 했다. 그리고 1년 2개월 뒤인 53년 10월11일, 부산에서 해군의 905정(정장 서덕균 대위)을 타고 출항해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 상륙하였다(3차 조사). 10월13일 이 조사대는 독도에 접안하는 데 성공했으나 악천후 때문에 바로 철수했다(그리고 15일 다시 도전해 상륙에 성공한 것이다).
산악회원들은 서덕균 대위가 지휘하는 해군의 905정을 타고 독도에 들어갔다. 조사대가 접안만 하고 돌아선 13일, 905정 근처로 레이더 장비까지 갖춘 ‘나가라(250t)’라는 이름의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나타났다.
나가라는 ‘겁도 없이’ 52년 1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평화선을 침범한 것이다. 이에 905정장 서 대위가 ‘총원 전투 배치’ 명령을 내리고 “평화선 밖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나가라는 뱃머리를 돌려 동남쪽으로 빠져나갔다.
다음날 조사대는 일본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가라에는 독도 조사에 나선 한국 측과 해상회담을 하기 위해 일본 중의원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군함이 평화선 밖으로 나가라고 위협하고 날씨마저 매우 나빠 나가라는 뱃머리를 돌렸다”고 보도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세 시간 후 이 방송이 “한국 군함이 평화선 밖으로 나가라고 하기에 우리는 평화선을 인정치 않는다며 한국 측 요구를 거부했다”고 전혀 다른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독도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야영을 하는 산악회원. 15일 독도에 상륙한 조사대는 텐트를 친 후 야영에 들어갔는데 이물오리 한 마리가 제 발로 야영지로 들어와 생경한 풍경 속에 젖어 있던 조사대를 기쁘게 했다.
이날 조사대는 무전기를 통해 905정과 교신을 했다. 조사대 인원 중 유일의 언론인이었던 홍 회장은 “15일 우리 라디오 방송은 부산에서 10여만명의 어민이 모여 해양주권선(평화선)을 지키자는 대회를 연 것을 생중계했는데, 이 방송을 잡은 905정은 무전기를 통해 독도에 있는 우리에게 다시 생중계 해주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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