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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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4월 21일 사북사태 발발
격동의 80년대가 막 시작된 1980년 4월 21일.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인 강원도 사북읍 동원탄좌에서 사북 노동자 총파업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사북탄광촌 어용노조 지부장이 회사측과 짜고 그해 노조원의 임금인상률을 노조측이 요구하던 42.75% 가 아닌 20% 로 몰래 서명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회사와 어용노조의 담합사실이 전해지자 분노한 노조원들이 지부장에게 몰려가 임금인상 경위 등을 추궁하며 4월 17일부터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던 중, 4월 21일 오후 5시쯤 광부를 가장해 농성장에 잠입했다가 신분이 탄로 나 지프차를 타고 도망치던 경찰이 수십 명의 노동자가 앞에 있는데도 그대로 질주, 4명의 광부들을 다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동료가 죽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탄광촌에 퍼지자 흥분한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경찰과 충돌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농성이 유혈폭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노동자들은 임금 30% 인상과 상여금 400% 지급, 어용노조 지부장 사퇴 등을 요구하면서 거의 전원이 들고 일어나 노조 사무실과 광업소 사무실, 정선경찰서 사북지서 등을 점거했다. 정선경찰서와 이웃 장성·영월 경찰서 병력이 총동원되고 서울에서 500여 명의 기동경찰이 급파되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투입됐지만 저항하는 5,000명의 시위대를 당해내진 못했다. 하지만 경찰관 1명이 숨지고 경찰과 광부 160여 명이 부상하는 등 양측 모두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마침내 4월 24일, 광부 측과 정부 측 대표는 밤샘 협상 끝에 노조 집행부 사퇴, 상여금인상 등 11개항의 협상안을 타결지었다. 그러나 며칠간의 짧은 평화 후 그해 5월 17일, 사북파업이 끝난 지 3주일 만에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사북에서도 부녀자, 노동자들이 연행되어 이루 말 못할 고통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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