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뉴욕의 대표적인 동성애자 밀집지역 중 하나인 그리니치 빌리지의 게이바 ‘스톤월인(The Stonewall Inn)’. |
서구 민주국가라고 해서 동성애자들이 법률적 차별과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 초반의 미국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탄압은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미국에 빨갱이 사냥 선풍을 불러일으킨 매카시즘이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물론 동성애자들까지 그들의 적출 대상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동성애자로 의심된다’는 이유로 줄잡아 4,300여 명의 현역 군인이 강제 전역을 당했고, 420여 명의 연방정부 공무원이 파면되었다. 전미정신과의사협회(APA)는 1952년 의료진의 임상 처방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제작한 ‘진단통계 매뉴얼’에서 동성애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규정했다.
미국의 동성애자들이 본격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한 것은 1950년대였다. 1950년 LA에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위한 ‘매타친 협회’가 조직되고 1955년에는 최초의 레즈비언 인권단체 ‘빌리티스의 딸들’이 결성되었다. 1965년에는 백악관 앞에서 동성애자 차별 종식을 위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미국의 동성애자들이 마침내 폭발한 것은 1969년 6월 27일 밤이었다. 6월 27일은 미국의 게이들에게는 각별한 날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의 여주인공이자 오랫동안 게이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던 주디 갈랜드의 장례식 날이었기 때문이다. 게이들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한 행렬에 참가했고 몇몇 게이바에서는 검은 깃발을 내걸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6월 27일 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게이바 ‘스톤월’에는 장례식을 마치고 몰려온 200여 명의 젊은이로 북적거렸다. 경찰이 스톤월에 들이닥친 것은 6월 28일 토요일 새벽 1시 20분께였다. 당시 뉴욕에서는 게이바를 운영하는 것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게이바들이 경찰에 정기적으로 상납을 하지 않으면 경찰이 게이바를 단속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따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신분증 제시를 거부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다른 때라면 순순히 신분증을 보여준 뒤 조금이라도 빨리 현장을 뜨는 게 상례였는데 이날은 평소와 달리 스톤월 주변을 금방 떠나지 않고 주위에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의례적인 단속을 마친 경찰이 동성애자들을 경찰차로 끌고 가려 하자 여기저기서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도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100~200명으로 불어난 군중 속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500~600명으로 불어난 구경꾼은 시위대로 돌변했다. 새벽 4시쯤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스톤월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현장에서 시위대 13명이 연행되고, 경찰 4명을 포함해 여러 명의 시위대가 다쳤다.
사상 첫 ‘게이 폭력시위’에 대한 흥분은 쉽게 가라않지 않았다. 날이 밝자 시위 소식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스톤월로 모여들었다. 수백 명의 동성애자와 경찰이 대치하여 싸움을 벌였다. 이후 나흘 동안 스톤월 일대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거리는 동성연애자들의 해방구로 바뀌었다. 사회의 지탄과 경멸을 받으며 숨어 생활하던 동성연애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떳떳이 밝히고 사회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던 ‘공개된 동성애자’ 1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