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부평부 지도
부펑의 삼국시대 이름은 "주부토군'이었다. 이는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일대까지 영토를 넓히며 이 곳을 점령한 뒤 군을 설치하고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옛 기록에 따르면 부평 평야는 원래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곳으로 황무지였는데 사람들이 방죽을 쌓아 농경지로 가꾸었다고 한다.
농토를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둑을 쌓다보니 그 둑들이 줄줄이 이어져 줄보뚝(둑)이 되었고 이 이름을 한자로 나타낸 것이 주부토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 곳이 신라 경덕왕때부터 고려 태조때까지 '긴제방'이라는 뜻의 '장제군'으로 불린 사실을 더해 장제도 줄보뚝 또는 주부토와 마찬가지로 둑이 늘어서 있다는 뜻을 한자로 바꾼 것이라 해석한다.
하지만 주부토는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대부분의 이름들이 그러하듯이 당시의 우리말 이름을 한자를 이용해 표시한 한자 차용일뿐이다.
주부토군은 그 뒤 장제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당시 지금의 김포까지 포함되었던 주부토군과 장제군은 고려 건국이후 고나할 구역이 조금씩 바뀌면서 수주, 안남도호부. 예양도호부, 길주등으로 이름이 거듭 바뀐다.
수주는 부평의 전신인 계양산의 북쪽 수소리에 주의 청사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수소리에 주 청사를 둔 것은 고려 태조 8년(925년)에 이 지역이 지역 호족인 이희목이 왕건에게 스스로 땅을 넘기고 몸을 맡겨 공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안남-계양 도호부는 군사 목적을 중심으로 행정업무까지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이들은 계양산과 그의 옛 이름인 안남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 뒤 충선왕 때이1310년 이 곳은 처음으로 부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넓은 곡창 지대여서 수확이 많은 들이라는 뜻으로 이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때 당시의 인천 일부와 부평을 새로 합해 만든 부천군에 편입되었지만 부평이라는 이름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부평은 그 뒤 1940년 인천부가 행정구역을 넓힐때 인천부 부평 출장소로 들어와 다시 인천 땅이 되었다. 지난 1995년에는 북구가 부평구와 계양구로 나뉘며 이때부터 동뿐 아니라 구의 이름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부평도호부
옛 부평도호부
일제 강점기 시절의 부평역 광장과 부평역
해방이후의 부평 출장소(부평구청의 전신)
부평에서 계양산을 바라보는 풍경
지금은 빌딩에 가려 안보이지만 당시에 허허벌판이였다.
1948년 11월 부평 전경
바로 앞 도로가 경인국도이고 그 너머 마을이 일본 미쯔비시를 뜻하는 삼릉 마을
일본이 이곳에 조병창을 만들 때 그 주요 공정을 맡은 회사가 미쯔비시이고 그 회사 직원들의 숙소가 이 일대에 있었다.
지금의 산곡시장, 백마장. 1948년 사진입니다.
가운데에서 약간 왼쪽으로 멀리 산 아래에 다닥다닥 몰려있는 단층집들이 보입니다. 이미 일제시대 때 부터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60년대 부평 시내의 전파사
백마장 옛모습 -명신여고내리막길(1960년)
1960년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가좌동에서 고개를 넘어 한양아파트를 못 미친 지점으로 보입니다.
내리막길 저 아래 왼편에 지금의 산곡시장이 보입니다. 길 오른편은 미군부대가 되겠습니다.
아마 비행장이 있는 곳일 것입니다.
멀리 보이는 산..가운데 흐리게 보이는 높은 산은 관악산일 것이고, 왼편은 원미산, 오른편은 소사 성주산에서 부평 묘지공원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되겠습니다
백마장 사거리 1960년
현재 위치로 보면 롯데마트에서 청천동 쪽으로 가는 길로 추정
1965년의 부평
백마장 입구의 버스 1968년
1960년대의 부평역
부평 소방서 1968년
십정동 옛길 1968년
청천농장 가는길 1970년대
부개동 송신소 1970년대
부평 시장 문화의 거리 1971년
부평 시장 골목길 1985년
산곡동 굴포천 1980년대
부흥로터리에 자리잡은 동춘서커스 1980년
청천농장 주변 1981년
십정동 주변
백마장 뒷골목
신촌 교회
에스칼 빵공장
부평역 로터리 1988년
산곡 시장내의 백마 극장(1959년 12월 15일 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