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한국 문단의 별이 지다' - 故 박경리의 굴곡 많은 생애

해피y 2018. 5. 27. 21:34

'한국 문단의 별이 지다' -  故 박경리의 굴곡 많은 생애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박경리(朴景利) 소설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는
여인의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향년 82세로 타계한 박씨는 자신의 작품 속 여인들만큼이나 굴곡 많은
생애를 살았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박씨의 말처럼 파란만장한 삶은 그의
문학을 단련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1926년 10월28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통영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1946년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
金幸道)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곧 이어 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잃고 외동딸 영주를 홀로 키우며녹록지 않은
20대를 보낸다. 셋방살이를 하며 은행에 다녔던 박씨는 친구의 도움으로 소설가 김동리를
찾아가 두세 편의 습작 시를 보여주는데 이때 시인은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
고 평가했다고 한다.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박경리(朴景利) 소설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는 여인의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5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박씨는 자신의 작품 속 여인들만큼이나 굴곡 많은 생애를 살았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박씨의 말처럼 파란만장한 삶은 그의 문학을
단련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1926년 10월28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통영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1946년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金幸道)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곧 이어 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잃고 외동딸 영주를 홀로 키우며녹록지 않은
20대를 보낸다. 셋방살이를 하며 은행에 다녔던 박씨는 친구의 도움으로 소설가 김동리를
찾아가 두세 편의 습작 시를 보여주는데 이때 시인은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
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후 김동리는 박씨에게 "시보다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여 쓴
단편 소설 '계산'이 김동리의 추천으로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8월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돼 본격적으로 등단한 후 한해 뒤인 1957년
단편 '불신시대'로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주로 단편을 발표한 박씨는 1958년 첫 장편 '연가' 이후 '표류도', '성녀와 마녀', '김약국
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 굵직굵직한 소설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내성문학상, 한국여류문
학상 등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도 오르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한국 문학 최대 걸작인 대하소설 '토지'를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하기 시작하는데 '토지'
1부를 집필할 무렵 그에게 시련이 잇따라 닥친다. 유방암 선고를 받고 암과 사투를 벌여야했던 것.
1971년 9월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그는 "삶에 보복을 끝낸 것처럼 평온한 마음이었다"고 회고했다.

병마를 이겨낸 후에는 사위 김지하 시인의 투옥으로 또 한번 마음 고생을 겪는다. 그러나 어떤 시련도
창작에 대한 열정은 막지 못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 원고를 썼던 것이다. (중략)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1973년 토지 1부 자서)

토지는 이후 '문학사상'(2부), '주부생활', '독서생활', '한국문학'(이상 3부),'마당', '정경문화',
'월간경향'(이상 4부) 등 여러 매체를 전전하는 우여곡절 끝에1994년 8월 문화일보를 통해 사반
세기 만에 전 5부로 완간됐다.


3부를 마친 후 1980년부터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강원도 원주로 근거지를 옮겨 마지막 순간까지
원주에 머물렀고, 1991년부터는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서 강의도 시작했다. 토지 완간 이후에는
간간이 산문을 기고하고 시집을 출간하는 것 외에는 작품 활동은 최소화한 채 토지문화관 건립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오랜 침묵 끝에 2003년 현대문학에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스스로가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한 이 소설은 건강 악화로 연재 세차례 만에원고지 440여매 분량으로 중단돼
안타까움을 남겼다.


미완성 소설과 산문들을 묶어 지난해 13년 만에 새 작품집 '가설을 위한 망상'을 내놓은 박씨는
최근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 만에 발표하며
시 창작 의욕을 밝히기도 했으나 그 세 편의 시는 결국 박씨가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됐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고인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예측했던게 아닐까.



"그 세월, 옛날의 그집 _ 그랬지 그랬었지 _ 대문 밖에서는 _ 늘 _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_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_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_ 모진 세월 가고 _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_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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