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백년전 한국 - 서울과 궁궐, 평양과 성곽 이야기

해피y 2019. 5. 17. 21:49


백년전 한국 - 서울과 궁궐, 평양과 성곽 이야기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서울의 궁궐, 그리고 평양의 고적이나 풍경사진으로 꾸몄다. 한말부터 1910년 전후의 관련 사진이 그간 적지 않았지만, 여기에 소개되는 사진은 그 각도나 내용에 차이가 있어 느낌이 새롭다. 

 

궁궐은 임금이 사는 곳이다. 임금은 궁궐에서 정무를 보며 일상생활도 했다. 서울에는 정전(正殿)인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창경궁·경운궁(덕수궁)이 있었다. 궁궐에 관한 사진은 대부분 건물을 찍은 것이어서 경복궁의 강녕전과 집옥재, 건청궁 일부와 향원정을 볼 수 있다. 100년 전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누각, 덕수궁의 원경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궁중 연회 뒤에 여악과 악사가 귀빈을 모시고 찍은 사진이다. 건물의 상당수가 수리와 복원을 통해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만, 막상 100년 전 시점에서 보니 특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서울 시내를 담은 사진은 크게 오래된 고적들, 100년 전 그 시절에 지은 건물, 그리고 풍경을 포함한 생활상으로 나눌 수 있다. 의정부·돈의문(서대문)·흥인지문(동대문)·원각사 석탑·원각사비·관왕묘·석물 등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고적들이다.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비는 1902년 세워진 것이고, 대관정·독립문·독립관·영국공사관·러시아공사관 등은 189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통감관저·경성우편국·일본군 사단사령부·대한의원 등의 건물은 1900년대에 일본이 한국침략과 관련해 건립한 것들이고, 경성이사청은 1896년에 영사관으로 지은 것이다. 독립관을 제외하면 모두 서양식 벽돌건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강철교도 1900년에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서울의 동네풍경을 담은 사진,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 꽁꽁 언 한강에서 낚시하는 장면은 당시 평범한 서울 사람의 생활을 잘 보여준다. 

 

독립문과 독립관은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의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서재필(徐載弼)이 주도하던 독립협회에서 건립했다. 러시아공사관은 1896년 고종이 1년을 머문,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배경이 된 바로 그 건물이다. 공사관을 제외한 근대 건축물은 대부분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침략의 양상이 건물로도 확인되는 셈이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고 고려시대에는 서경이라 칭하며 중요시했으며, 조선시대에도 관찰부가 있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여서 평양성을 둘러싼 문을 공들여 쌓았고, 대동강 주위에는 아름다운 정자며 누각이 많다. 그러나 평양은 남북이 분단된 이후 쉽게 가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먼저 평양의 성문을 하나하나 담은 사진이 있다. 대동문·칠성문·현무문·전금문 등이 그것이다. 또 부벽루와 을밀대·득월루·연광정 같은 정자들이 대동강의 풍광을 배경삼아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 이들 성문과 누각·정자는 현재 남아 있거나 복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자릉을 담은 사진도 있다. 

 

서민들이 대동강에서 빨래를 하고 얼음을 채취하는 모습도 사진에 담겼다. 서울에서 한강이 그러했듯, 평양의 일상이 대동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인이 평양에 세운 이사청 건물과 일본인 거류지는 물론 대동강 철교까지 한국침략의 한 방편이었다. 이들 사진을 빼면 근대화된 풍경을 담은 사진은 없다. 한국의 ‘근대’는 사진을 촬영한 일본인에게는 관심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울의 궁궐과 유적, 또 평양의 성문과 누정을 비롯한 고적은 모두 눈에 익숙하다. 수천 년의 나날들에 비하면 60년 분단의 세월은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사진들은 말해준다. 대동강변 부벽루를 산보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어디 한 사람의 꿈일까마는.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경복궁 후원의 정자. 인공연못인 향원지에 작은 섬을 만들고 2층 정자를 세워 나무 구름다리 취향교(醉香橋)를 통해 건너 다니게 했다. 아래와 위층이 같은 크기이며 겹처마와 육모지붕으로 단장한 화려한 정자다. 고종 초기인 1860~70년대에 지어졌는데, 추녀마루가 모이는 곳에 탑 모양의 기와장식을 얹어 치장했다.


 

 

▲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국왕의 침전(寢殿). 정면 11칸, 측면 5칸의 큰 건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1917년 창덕궁 희정전(熙政殿)이 소실되자 강녕전을 헐어 그 재목으로 중건했다. 현재 경복궁에는 강녕전이 새로 복원됐다.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경복궁이 중건된 뒤에 건립된 고종의 서재다. 중국풍 건물로 장방형의 높은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다. 중앙에 돌계단이 있다. 왼쪽의 팔각 2층 건물은 서고인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으로 언뜻 협길당(協吉堂)이 보인다.


 

 

▲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일대 원래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던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퇴위하고 머물면서 궁호가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함녕전은 황제의 침전으로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환궁하며 세운 전각인데, 1904년 화재로 소실돼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은 이곳에서 승하했다.


 

 

▲ 창덕궁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과 누각. 낮은 골짜기에 연못을 만들고 부용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어수문(魚水門)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2층 건물이 나타난다. 1층 규장각(奎章閣)은 수만 권의 책을 보관하던 서고였고, 이층 주합루는 도서를 열람하며 풍치를 즐기던 곳이다.


 

 

▲ 창덕궁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과 반도지(半島池)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 관람정은 지붕이 합죽선 부채꼴이다. 존덕정은 2층 겹 육모지붕의 정자다. 아래로 흐르는 물은 한반도 지형을 본떴다는 반도지로 추정된다.


 

 

▲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일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 낭인자객들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의 현장이다. 1873년 창건되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가 헐어버렸다.


 

 

▲ 궁중연회 뒤 기념촬영 궁중 연회에서 가무는 주로 의녀(醫女)들이 맡았다. 의녀들은 의술 이외에도 악기와 노래, 춤을 배워야 했다. 사진은 덕수궁에서 연회를 마친 뒤 양복 입은 귀빈을 모시고 여악(女樂)을 맡았던 기녀들이 앞에,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이 뒤에 서서 기념촬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 의정부(議政府)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이었던 의정부는 갑오개혁 시기인 1895년(고종 32) 내각으로 개편되었다가 이듬해 환원되었고, 1907년에 다시 내각으로 개편되며 폐지되었다. 광화문 동편에 있던 이 건물은 지금은 공원이 되었다.


 

 

▲ 남산 주변 1893년 남산 기슭에 세워진 일본공사관 주변 모습. 왼쪽 위편에 깃발이 꽂힌 서양식 건물이 일본공사관이고, 일장기가 있는 곳이 영사관으로 짐작된다.


 

 

▲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서울 신문로2가에 있던 조선시대 서울의 4대문 중 하나.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15년 일제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이유로 철거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 서울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적을 막기 위해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을 쌓았다. 1869년에 대대적으로 개축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사진 왼쪽에 전차표 판매소가 보인다.


 

 

▲ 비각 1902년 고종의 즉위 40돌과 51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 장방형 대리석에 ‘대한제국이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大韓帝國李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이라는 전액(篆額)을 사면에 둘렀는데, 훗날 순종이 되는 황태자가 쓴 글씨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기념비전을 세웠다.


 

 

▲ 대관정(大觀亭) 1897~98년경에 세워진 2층 양식 건물로 외국의 귀빈이 묵던 호텔이다. 연회장이 마련되어 있어 고관이나 외국인들의 연회가 잦았다. 1905년에는 일본군사령관저로도 사용되었다. 소공동 조선호텔 앞쪽 언덕에 있었는데 1928년 개관한 경성부립도서관에 자리를 내줬다.


 

 

영국공사관 서울 정동에 검은색과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건물. 1890년에 착공해 1892년에 준공했다. 1898년 공사관으로 승격되었다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 총영사관으로 낮아졌다. 현재의 영국대사관이다.


 

 

▲ 러시아공사관 덕수궁 북쪽에 건립된 단층의 벽돌 건물. 한국전쟁 당시 본관이 파괴되어 지금은 종탑만 남아 있다.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 감시하의 경복궁을 벗어나 파천하여 1년간 머무른 곳으로 유명하다.


 

 

▲ 한강철교 서울의 용산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철도교. 1899년 9월 노량진과 인천 사이 경인선이 개통된 뒤 1900년 7월 한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철교가 완성되었다. 경인선 부설권은 애초 미국인이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이 이를 인수하여 완성한 것이다. 한강철교는 너비 약 5.1m, 높이 약 11.3m, 길이 약 630m로 경인선 부설 공사 중 최대 난공사였다. 현재의 철교는 한국전쟁 중 파괴된 것을 복구한 것이다.


 

 

▲ 독립문 서울 현저동에 있는 대한제국 시기의 석조문으로 높이 14.28m, 너비 11.48m다. 독립협회의 발기로 1년간의 공사를 거쳐 1897년 11월20일 완공되었다. 1980년 1월 고가도로가 나면서 이전돼 현재는 원위치에서 서북쪽 70m 떨어진 곳에 있다.


 

▲ 노량진 도선 노들나루라고 불린 노량진은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 충청도와 전라도로 나가는 길목이었다. 1910년대 인도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배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야 했다.


 

 

▲ 관왕묘(關王廟) 관우(關羽)를 받들기 위하여 건립한 묘당으로 지금의 신설동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남대문 밖에 건립되었는데, 이후 동대문 밖에도 동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이 동관왕묘는 1602년에 완성된 것으로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 지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한가롭게 놀고 있다.


 

 

▲ 북한산 산영루 북한산 자락에 있던 누각. 현재는 주춧돌만 남았지만, 사진을 들여다보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정취를 즐기던 시인묵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 한강에서 얼음 깨고 낚시 추운 겨울, 한강이 얼면 강태공들은 한강에 나가 빙판에 구멍을 뚫고 낚시를 했다. 한 가족일까, 손에 쥔 물고기를 보며 흐뭇해하는 모습이 낚시가 이들의 생업임을 짐작케 한다.


 

 

▲ 마포 풍경 마포는 용산강이 합류하는 한강 북안의 포구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부리던 교통의 요지였다. 포구 주변의 경치가 수려해 시인묵객들이 즐겨 이곳의 경치를 예찬했다. 인근에 정자나 누각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 동대문 밖 무덤의 문인석 무덤 앞의 문인석과 양석(羊石)으로 보아 왕족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동대문 밖 꽤 높은 산허리에 위치해 있다. 해가 중천에 있는데 세상 모르고 자는 이는 나무 하러 온 아이일까.


 

 

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은 1900년 일본거류민 편의시설로 지금의 충무로2가 서울중앙전화국 부근에 건축되었다. 1905년 한일통신협정으로 서울 전체의 우편사업을 맡게 되었고 통감부 설치 후에는 그 휘하기관이 됐다. 2층의 벽돌건물이었는데, 1915년 경성우편국 새 건물이 들어선 뒤 그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건물 주변에서 인력거꾼과 지게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대한의원 1907년 세운 국립병원 겸 의학교로, 일본인들이 의료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종로구 연건동 마두산 언덕에 있는 이 건물은 1908년 5월 준공되었는데, 붉은 벽돌 2층 건물로 중앙에 시계탑을 배치했다. 현재 서울대학병원 구내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일본군 사단사령부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했는데 사령부가 처음엔 필동에 있다가 용산으로 이전했다. 이후 용산은 일본군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 통감 관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과 동시에 한국의 내정을 장악한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했다. 처음엔 남산 기슭의 일본공사관 건물을 사용하다가 1907년 벽돌로 2층 건물을 지었다. 통감 관저도 이때 지은 것이다.


 

 

▲ 경성이사청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서울의 일본영사관이 경성이사청으로 바뀌었다. 일본은 1896년 현재 충무로1가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벽돌 2층 건물의 영사관을 신축했는데, 1910년 이후 경성부청으로 사용하다가 1930년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들어섰다.


 

 

▲ 평양 대동문(大同門) 조선 중기에 지어진 평양성의 동문. 전체 높이 19m, 석축 높이 6.5m인 2층 누각이다. 축대는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쌓았고 복판에 무지개문을 내서 사람들이 출입하도록 했다. 대동강 건너 남쪽으로 이어졌다.


 

 

▲ 평양 칠성문(七星門) 평양 모란봉(牧丹峯)에 있는 성문. 전형적인 고구려성으로 현재의 문루는 조선 숙종대에 개수한 것이다. 을밀대(乙密臺) 쪽에서 등성이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성벽과 만수대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고, 그 두 성벽 사이에 가로 세워 성문을 세웠다.


 

 

▲ 평양 현무문(玄武門) 평양 금수산(錦繡山)의 성문. 모란봉과 을밀대 사이에 있다. 역시 고구려 때 축조되어 조선 숙종대에 중건됐다. 성문 축대는 다듬은 돌로 선과 면을 갖추어 정연하게 쌓았다. 칠성문과 함께 고구려 성곽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 평양 부벽루(浮碧樓) 산 위의 사람들은 대성산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언뜻 모란대가 보이고 왼쪽 성벽을 따라가면 을밀대로 이어지는 위치다. 오른쪽 대동강가에 있는 누각이 부벽루다.


 

 

평양 모란봉(牧丹峯) 대동강 주변의 절경을 담은 사진이다. 왼쪽 봉우리가 모란봉이고 부근은 금수산이다. 오른쪽 섬은 능라도(綾羅島)이며 산 중턱에 부벽루가 보인다. 그 아래 문은 전금문(轉錦門), 누각은 득월루(得月樓)다. 머리에 짐을 인 아낙들이 지나는 곳은 청류벽(淸流壁)이다.


 

 

▲ 평양 을밀대(乙密臺) 모란봉 중턱에 있는 누각. 사방이 틔어 있다 해서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부른다. 고구려 때 세운 것을 조선 숙종대에 다시 세웠다. 고구려 축성술을 엿볼 수 있는 축대의 높이는 11m에 달한다.


 

 

▲ 평양 득월루 대동강변에 보이는 누각이 득월루, 아래의 문이 전금문이다.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기린굴(麒麟窟)이 나오고 계속 올라가면 을밀대에 닿는다.


 

 

▲ 평양 연광정(練光亭) 대동강변 덕바위(德巖)에 있는 정자로 고구려 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장방형 평면의 누정 두 채가 ㄱ자 모양으로 붙은 형태다. 관서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풍치가 빼어나다.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것이 능라도다. 


 

 

▲ 평양 기자릉(箕子陵) 평양 기림리에 있는 기자의 가묘. 중국 은(殷)나라의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똘똘해 보이는 어린아이가 짐짓 포즈를 취했다.


 

 

▲ 대동강 얼음 채취 한겨울, 대동강이 꽁꽁 얼었다. 강 얼음을 채취해 얼음창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철에 사용하는 것은 평양의 오랜 관습이었다. 얼음을 캐낸 자리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 대동강에서의 빨래 이른 봄, 대동강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아낙들이 강기슭에서 겨우내 밀린 빨래를 하고 있다. 아직 강이 다 녹지 않아 얼음덩이가 떠다닌다. 강 건너편은 선교리인 듯하다.


 

 

대동강 철교 평양 시내와 선교리를 잇는 기차철교로 1905년에 준공되었는데, 평양역과 대동강역 사이에 있었다. 길이는 약 760m. 왼쪽은 나무로 된 인도교. 철교 아래로 나루터가 보인다. 철교에 일장기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듯하다.


 

 

▲ 평양 신시가지 평양의 일본인 거리. 한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장기가 내걸린 건물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평양역 근처로 짐작된다.


 

 

▲ 평양이사청 이사청은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영사관이 개편된 관청이다. 사진은 1909년 1월 순종이 서북지역을 순행하는 중에 평양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는 뜻으로 정문에 아치를 만들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내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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