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간도의 한국인

해피y 2019. 6. 16. 22:34

[간도의 한국인] 김재홍씨 수집자료 단독 공개 2

 

 

[한겨레 21돌 창간특집]
‘독립운동 씨앗’ 뿌리던 산천…그 숨결 아직도 들리는 듯
겨레의 꿈 키우던 광야…그때처럼 윤동주의 별도 뜬다네 


 

▲ 용정 광명중학교의 겨울풍경

용정의 광명중학생들이 1929년 겨울 어느날 교정에서 신나게 눈싸움 놀이를 하고 있다. 1912년 기독교계 영신중학교 부속 영신소학교로 설립됐으나 1924년말 재정난으로 히다카 헤이고로라는 일본인 낭인에게 넘어가 은진(기독교), 대성(연길 공교회·유림), 동흥(대종교) 등과 달리 친일계 학교로 변해갔다. 1936년 봄 윤동주 시인과 함께 대학 진학 자격을 얻고자 유일한 5년제였던 광명에 편입했던 문익환 목사는 “일본인 선생들이 학생들을 일본 외무성 순사나 만주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고 혈안이 된 그런 학교였다”고 얘기하곤 했다.

▲ 명동여학교 동창회


1929년 4월27일 열린 명동여학교 동창회 기념사진. 1911년 명동학교 부설로 명동여학교가 문을 열면서 명동촌 여성들은 비로소 한글을 깨치고 자신만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고만녜’로 불리던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도 이 학교를 다니며 ‘김신묵’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뒤이어 1914년 용정의 명신여학교, 1920년 화룡현 명신사 삼도구 충신향의 삼명여학교, 1921년 화룡현 삼개사 만진기의 정신여학교, 유하현 삼원포의 삼성여학교, 연길현 용진사 대교동의 교향여학교 등이 잇따라 생겨났다.

 

 

▲ 국사 가르치던 은진중학교

1940년 무렵 용정 은진중학교의 부례수(브루스) 교장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김약연 등 간도 대표 15명의 요청으로 캐나다 선교회가 1920년 세운 은진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5년 끝내 문을 닫은 명동중학교의 맥을 이었다. 일제가 금지한 우리말은 물론 영어·성경·국사·과학실습·다양한 특별활동 등 수준 높은 수업으로 수많은 지도자를 키워낸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 명동학교 동창회

1962년 서울 동국대 교정에서 월남한 명동학교 출신들이 처음으로 동창회를 열었다. 신민회 회원으로 개교 산파 노릇을 한 정재면 선생(앞줄 오른쪽 세번째), 문재린(왼쪽 옆) 목사, 그 아들인 문익환(뒷줄 오른쪽 네번째) 목사, 김기섭, 윤영춘, 윤영규씨 등의 모습이 보인다. 1908년 명동서숙으로 출범한 명동학교는 명동중학교와 명동여학교로 증설되면서 25년간 1200명의 인재를 배출하며 간도 독립운동의 기지가 됐다.

 

▲ 간도지역 선교사들

1910년대 초 조선 주재 캐나다 장로교회선교협의회 소속의 구례선(로버트 그리슨) 목사와 부인 레나가 간도지역 선교를 위해 말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는 희귀 사진이다. 구례선 목사는 정재면 선생과 더불어 실학자였던 규암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도함으로써 명동촌을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축으로 한 민족교육과 교회운동의 기지로 탈바꿈시켰다.

 

▲ 동만노회

1940년대 초 동만노회 21회의 주역들. 앞줄 오른쪽 네번째가 이권찬 목사, 두번째 줄 오른쪽 두번째가 이태준 목사, 한 사람 건너 용정 제창병원 육장안(블랙) 원장, 규암 선생, 서고도(스캇) 선교사, 한 사람 건너 문재린, 이병하, 이성국 목사, 세번째 줄 오른쪽 두번째 서창희(서대숙 박사 부친) 목사의 모습이다. 간도에서 이주한인사회·기독교·민족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삼위일체’를 이뤘다. 191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함북노회에 속했던 간도의 교회들은 수년 사이 200여개로 늘어나 1921년 12월 토성보예배당에서 동만노회로 독립한다.

 

▲ 명동교회

명동학교 설립 이듬해인 1909년 설립된 명동교회의 초기 전경. 교육을 조건으로 명동학교 교사로 부임한 정재면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여 규암과 원로들이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 명동촌 주민들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도 교인들이 몰려와 일요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 3·13 만세운동의 현장 오층대건물

1919년 3월13일은 명동촌의 운명이 결정되던 날이다. 용정촌 서전대야에 8000여명의 간도 주민이 가슴마다 태극기를 품고 운집했다. 명동촌의 지도자들과 명동학교의 브라스 밴드가 앞장을 선 가운데 용정 시내 일본 영사관으로 향하던 시위행렬이 오층대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 경찰의 발포로 19명이 목숨을 잃고 30여명이 다쳤다. 이듬해 1월 명동학교 출신들이 독립군 무기 조달을 위해 조선은행 자금을 강탈한 ‘15만원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일제의 탄압은 한층 거세진다.

 

▲ 경신참변

1920년 경신참변 때 일본군이 한인 독립군을 총살하고 있는 장면.(재미 사료수집가 맹우열씨 소장) 일제는 이들을 ‘비적’ 또는 ‘마적’으로 몰아 중국인과 한인 사이를 이간하려 했다. 청산리 전투가 있기 하루 전인 그해 10월20일, 일제는 이른바 ‘불령단의 소굴’(항일독립운동의 기지)로 명동촌을 지목하고 보병·기병·공병까지 동원해 명동학교를 불태우고 주민을 살상하는 등 이른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 안중근 의사 사격연습터

1908년 안중근 의사가 사격 연습을 했던 명동촌 뒷산 문암골. 1907년 명동촌에서 석달간 머물렀던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 러시아 연해주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국내 진공을 감행하다 회령에서 참패한 뒤 이곳에 홀로 찾아와 절치부심하며 권총 사격 연습을 했다. 그리고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시켰다.

▲ 1947년 무렵 중국 공산당 명동지부 임원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1920년대 초부터 간도 한인사회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빠르게 퍼진다. 용정 대성중학교 부설 동양학원이 설립되는 등 각 학교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고, ‘청년회’란 이름으로 수많은 사회주의 운동단체들이 생겨난다. 명동촌과 명동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규암이 용정으로 옮겨간 1930년대 초반 이후 공산주의 세력의 지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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