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개판 5 분전 이라는 말의뜻 ~

해피y 2019. 8. 7. 22:10

개판 5 분전 이라는 말의뜻 ~


‘개판오분전’,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수라장, 어찌해볼 수 없는 혼돈… 쯤으로 쓰이는 이 단어.
이 말의 유래가 부산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듯 합니다.
개판의 ‘개’를 키우는 개(犬)로 아시는 분이 많은데,

정확하게는 개판(開板)

 

 

판이 열리기 5분전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의 시작은 한국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쟁을 피해 각지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옵니다.
가난했던 시설. 밥 굶는 분들이 많았는데, 전쟁통은 오죽했겠습니까?
이들을 돕기 위해 무료배식을 하곤 했는데,

그것도 모자라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시계를 가진 사람도 없었던 당시. 하염없이 밥을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

 

“개판 오분전, 개판 오분전…”

이제 5분후면 밥 나눠줍니다. 이런 식으로 종을 쳐 알렸습니다.

말 그대로 ‘먹지 못하면 죽는’ 상황.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아수라장이었죠.

 

 

 

이때 상황 때문에 개판오분전 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갑자기 개판오분전이란 말을 들었을까?

이 개판오분전이 나온 현장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40계단, 부산 중앙동에 위치한 40개의 계단이 늘어선,

어째보면 별 것 아닌 곳.

 

 

이곳이 왜 이렇게 유명한가,

의미를 가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아셔야합니다.

 

6.25로 말미암아 부산은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가득했고,
이 40계단 주변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바글거렸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개판오분전’ 무료

 

급식소도 열렸고,

바로 앞 항구에서 구호물자가 흘러들어 오는지라, 물건을 구하기도,

 

컨테이너 이전 시대라 화물 하역작업에 인부로 일하기로 쉬웠던 곳.

피난민들은 “새벽 일찍 나와 운 좋으면 부두하역 일거리를 구하고

(그것도 사람 많아 구하기는하늘에별따가.)

 

 

공치면 기다렸다 무료급식 한번 먹자.” 는

생각에 너도나도 40계단으로 몰렸습니다.

 

40계단은 이렇게 전쟁, 피난민의 아픔이 서린 골목입니다.

전차. 지금은 도시철도, 도로가 잘 갖춰져 있지만, 해방 이전,

부산을 대표하는 탈 것은 전차였습니다.

 

 

이 노면전차 역시 부산의 자존심이었습니다.

해방 이전 전차가 운행되던 도시는 지금의 남, 북한 통틀어 딱 3 도시.

수도 서울, 북한의 평양,

 

그리고 부산.

그 존재 자체가 부산사람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단순한 위상으로서의 그것 뿐 아니라, 교통수단이
변변찮던 시절,

자갈치 시장에서 고기들 떼다

 

 

전차에 싣고 운반해서

각 동네에 팔아 입에 풀칠하던,

서민의 발이 되어준 수단이었습니다.
차량통행에 방해가 된다고 사라진 이래,

이제 이런 조형물으로만 남아 있네요.

 

 

 

전봇대 입니다.

지금 많이 보이는 콘크리트 전신주가 아니라

나무로 된 전봇대.

당시야 콘크리트가
더 귀하던 시대였고,

 

환경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다른 시대

가끔 전신주에 기름칠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름 장마철 동안 몇날 몇일 비를 맞아 전신주가 썩기도 하,
개가 영역표시를 하면 냄새가 배는데

그것을 방지하는 목적이였다고 하더군요.
이것 역시 사라진 풍경.

언제 일감이 들어올까? 하염없는 기다림.

그래도 이분들은 행복한 편입니다.

 

 

전쟁통에 살아남았고, 피난처였던 부산에 터를 잡았으니…

이것 역시 사라진 풍경이군요.

급격한 도시팽창과 피난민 유입에 상,하수도 보급이 원할하지 않던

 

 

시절이라 물 역시 아침시간에 줄을 서서 받았습니다.

벨브 한번 열면 물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


유일하게 요즘 분들의 공감을 살 광경일까나?

먹을거리도 변변찮고, 볼거리도 없던 시대.

 

 

뻥튀기 아저씨가 기계를 돌리고 엄청난 소리와 함께

강냉이를 만들어내던 장면은 과자를

 

 

기다리는 두근거림과 볼거리를 동시에 만족시켰던 이벤트.
요즘도 시골 장터에서 간혹 볼 수는 있으나,

피난민 아이들의 그런 몰입감이나 제가 어렸을 때
느꼈던 그런 기분은 사라져 추억으로 남게 될 듯 합니다.


여기가 40계단입니다. 예전과 달리 화강암으로 단장된 터라

옛맛은 안나지요.
계단 중간의 아저씨가 키고 있는 손풍금.

아코디언도 그때에 유행하던 악기.

말씀드렸다시피
볼거리가 전무한 때라, 아코디언 하나 들고 연주하면

 

 

 

 

 

 

 

구경꾼으로 주변이 북적입니다.

이명세 감독님의 인정사정 볼것없다를 찍은 장소.

시간이 나시는 분들은 40계단 문화관에 들리셔서

그 시절의 사진과 유물을 관람하시길 권합니다.

 

 

 

다른 거리, 다른 볼거리와는 달리 배고픔,

고향을 버릴 수 밖에 없던 사연 있는 슬픔.

피난 오다

 

 

가족과 헤어져 그리움. 그리고 고향에 가고픈,

가족을 만나고픈 처연한 한.
어떻게든 아수라장 속에 밥 한술 떠서 살아남아야

고향에 돌아가고,

가족과 만나니

 

 

남 밀치고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서글픈 생존욕구.

 

전쟁통의 아수라장이 만든 수많은

이야기가 얽혀있는 40계단 거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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