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처마와 육모지붕으로 단장한 화려한 정자다.
고종 초기인 1860~70년대에 지어졌는데,
추녀마루가 모이는 곳에
탑 모양의 기와장식을 얹어 치장했다.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경복궁 강녕전(康寧殿)국왕의 침전(寢殿).
정면 11칸, 측면 5칸의 큰 건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1917년 창덕궁 희정전(熙政殿)이 소실되자
강녕전을 헐어 그 재목으로 중건했다.
현재 경복궁에는 강녕전이 새로 복원됐다.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경복궁 집옥재(集玉齋)경복궁이 중건된 뒤에 건립된
고종의 서재다.
중국풍 건물로 장방형의 높은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다.
중앙에 돌계단이 있다.
왼쪽의 팔각 2층 건물은 서고인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으로 언뜻 협길당(協吉堂)이 보인다.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일대
원래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던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퇴위하고 머물면서
궁호가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함녕전은 황제의 침전으로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환궁하며 세운 전각인데,
1904년 화재로 소실돼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은 이곳에서 승하했다.
창덕궁 부용지(芙蓉池)
창덕궁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과 누각.
낮은 골짜기에 연못을 만들고
부용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어수문(魚水門)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2층 건물이 나타난다.
1층 규장각(奎章閣)은 수만 권의 책을 보관하던 서고였고,
이층 주합루는 도서를 열람하며 풍치를 즐기던 곳이다.
창덕궁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과반도지(半島池)
창덕궁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과 반도지(半島池)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
관람정은 지붕이 합죽선 부채꼴이다.
존덕정은 2층 겹 육모지붕의 정자다.
아래로 흐르는 물은
한반도 지형을 본떴다는 반도지로 추정된다.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일부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 낭인자객들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의 현장이다.
1873년 창건되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가 헐어버렸다.
궁중연회 뒤 기념촬영
궁중연회 뒤 기념촬영궁중 연회에서
가무는 주로 의녀(醫女)들이 맡았다.
의녀들은 의술 이외에도 악기와 노래, 춤을 배워야 했다.
사진은 덕수궁에서 연회를 마친 뒤
양복 입은 귀빈을 모시고
여악(女樂)을 맡았던 기녀들이 앞에,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이 뒤에 서서
기념촬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의정부(議政府)
의정부(議政府)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이었던 의정부는
갑오개혁 시기인 1895년(고종 32)
내각으로 개편되었다가 이듬해 환원되었고,
1907년에 다시 내각으로 개편되며 폐지되었다.
광화문 동편에 있던 이 건물은 지금은 공원이 되었다.
남산 주변
1893년 남산 기슭에 세워진 일본공사관 주변 모습.
왼쪽 위편에 깃발이 꽂힌 서양식 건물이 일본공사관이고,
일장기가 있는 곳이 영사관으로 짐작된다.
돈의문(敦義門)=서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서울 신문로2가에 있던
조선시대 서울의 4대문 중 하나.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15년 일제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이유로
철거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서울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적을 막기 위해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을 쌓았다.
1869년에 대대적으로 개축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사진 왼쪽에 전차표 판매소가 보인다.
비각
1902년 고종의 즉위 40돌과 51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
장방형 대리석에
‘대한제국이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
(大韓帝國李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
이라는 전액(篆額)을 사면에 둘렀는데,
훗날 순종이 되는 황태자가 쓴 글씨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기념비전을 세웠다.
대관정(大觀亭)
대관정(大觀亭)1897~98년경에 세워진 2층 양식 건물로
외국의 귀빈이 묵던 호텔이다.
연회장이 마련되어 있어
고관이나 외국인들의 연회가 잦았다.
1905년에는 일본군사령관저로도 사용되었다.
소공동 조선호텔 앞쪽 언덕에 있었는데
1928년 개관한 경성부립도서관에 자리를 내줬다.
영국공사관
서울 정동에 검은색과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건물.
1890년에 착공해 1892년에 준공했다.
1898년 공사관으로 승격되었다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 총영사관으로 낮아졌다.
현재의 영국대사관이다.
러시아공사관
러시아공사관덕수궁 북쪽에 건립된 단층의 벽돌 건물.
한국전쟁 당시 본관이 파괴되어 지금은 종탑만 남아 있다.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 감시하의 경복궁을 벗어나
파천하여 1년간 머무른 곳으로 유명하다.
한강철교
한강철교서울의 용산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철도교.
1899년 9월 노량진과 인천 사이 경인선이 개통된 뒤
1900년 7월
한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철교가 완성되었다.
경인선 부설권은 애초 미국인이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이 이를 인수하여 완성한 것이다.
한강철교는
너비 약 5.1m, 높이 약 11.3m, 길이 약 630m로
경인선 부설 공사 중 최대 난공사였다.
현재의 철교는 한국전쟁 중 파괴된 것을 복구한 것이다.
독립문
서울 현저동에 있는 대한제국 시기의 석조문으로
높이 14.28m, 너비 11.48m다.
독립협회의 발기로 1년간의 공사를 거쳐
1897년 11월20일 완공되었다.
1980년 1월 고가도로가 나면서 이전돼
현재는 원위치에서 서북쪽 70m 떨어진 곳에 있다.
독립관
1896년 창립된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되던 건물.
독립문 근처에 있으며,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해 만들었다.
‘독립관’ 현판은 순종이 황태자 시절 한글로 쓴 것이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도 강연회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원각사지(圓覺寺址)
원각사지(圓覺寺址) 십층석탑
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시대 석탑.
높이 12m. 국보 제2호.
탑골공원 자리는
조선 초기 원각사라는 큰 사찰이 있던 곳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형태가 특수하고 화려함과 기교에 있어
조선시대의 석탑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원각사비
원각사비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
1471년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 4.9m, 비신(碑身) 너비 1.3m이다.
보물 제3호.
귀부(龜趺)는 화강암, 비신은 대리석이다.
탑골공원에서 놀던 아이들이 사진의 모델이 되었다.
노량진 도선
노량진 도선노들나루라고 불린 노량진은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
충청도와 전라도로 나가는 길목이었다.
1910년대 인도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배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야 했다.
관왕묘(關王廟)
관왕묘(關王廟)관우(關羽)를 받들기 위하여
건립한 묘당으로
지금의 신설동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남대문 밖에 건립되었는데,
이후 동대문 밖에도 동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이 동관왕묘는 1602년에 완성된 것으로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 지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한가롭게 놀고 있다.
북한산 산영루
북한산 산영루 북한산 자락에 있던 누각.
현재는 주춧돌만 남았지만,
사진을 들여다보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정취를 즐기던
시인묵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강에서 얼음 깨고 낚시
한강에서 얼음 깨고 낚시추운 겨울,
한강이 얼면 강태공들은
한강에 나가 빙판에 구멍을 뚫고 낚시를 했다.
한 가족일까,
손에 쥔 물고기를 보며 흐뭇해하는 모습이
낚시가 이들의 생업임을 짐작케 한다.
마포 풍경
마포는 용산강이 합류하는 한강 북안의 포구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부리던 교통의 요지였다.
포구 주변의 경치가 수려해
시인묵객들이 즐겨 이곳의 경치를 예찬했다.
인근에 정자나 누각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은 1900년 일본거류민 편의시설로
지금의 충무로2가 서울중앙전화국 부근에 건축되었다.
1905년 한일통신협정으로
서울 전체의 우편사업을 맡게 되었고
통감부 설치 후에는 그 휘하기관이 됐다.
2층의 벽돌건물이었는데,
1915년 경성우편국 새 건물이 들어선 뒤
그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건물 주변에서 인력거꾼과 지게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대한의원
대한의원1907년 세운 국립병원 겸 의학교로,
일본인들이 의료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종로구 연건동 마두산 언덕에 있는 이 건물은
1908년 5월 준공되었는데,
붉은 벽돌 2층 건물로 중앙에 시계탑을 배치했다.
현재 서울대학병원 구내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군 사단사령부
일본군 사단사령는
부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했는데
사령부가 처음엔 필동에 있다가 용산으로 이전했다.
이후 용산은 일본군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통감 관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과 동시에
한국의 내정을 장악한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했다.
처음엔 남산 기슭의 일본공사관 건물을 사용하다가
1907년 벽돌로 2층 건물을 지었다.
통감 관저도 이때 지은 것이다.
경성이사청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서울의 일본영사관이 경성이사청으로 바뀌었다.
일본은 1896년 현재 충무로1가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벽돌 2층 건물의 영사관을 신축했는데,
1910년 이후
경성부청으로 사용하다가
1930년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들어섰다.
평양 대동문(大同門)
조선 중기에 지어진 평양성의 동문.
전체 높이 19m, 석축 높이 6.5m인 2층 누각이다.
축대는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쌓았고
복판에 무지개문을 내서 사람들이 출입하도록 했다.
대동강 건너 남쪽으로 이어졌다.
평양 칠성문(七星門)
평양 모란봉(牧丹峯)에 있는 성문.
전형적인 고구려성으로 현재의 문루는
조선 숙종대에 개수한 것이다.
을밀대(乙密臺) 쪽에서 등성이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성벽과
만수대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고,
그 두 성벽 사이에 가로 세워 성문을 세웠다.
평양 현무문(玄武門)
평양 금수산(錦繡山)의 성문.
모란봉과 을밀대 사이에 있다.
역시 고구려 때 축조되어 조선 숙종대에 중건됐다.
성문 축대는 다듬은 돌로 선과 면을 갖추어
정연하게 쌓았다.
칠성문과 함께 고구려 성곽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평양 부벽루(浮碧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