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신발인 짚신은 빨리 떨어지고, 오래 신을수 없었던 것이 단점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고무신은 비싸도 오래 신을 수가 있었구요,
그래서 선호하다 보니까 우리 신발로 굳어 졌다고 하더군요.
저는 지금도 한복을 입을때 왕자표 고무신 생각이 간절 하답니다.
그나마 고무신도 요즘은 중국에서 수입을 해 온다는데요.
품질이 많이 떨어져서 거의가 찾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더라구요.
고무신이 우리 곁에 오기전 까지는 농경 사회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짚을 가지고
짚신 이나 미투리를 만들어서 신었는데요. 이것은 자본이 전혀 안 들었구요.
부지런만 하면 얼마 던지 삼아서 신을 수가 있었습니다.
통 나무를 파서 만들었다는 나막신은 비오는 날 장화대신 신었다는데요.
이 나막신은 신분에 구별 없이 널리 신었다고 하더군요.
조선 말엽 궁중 상궁 나인이나 사대부 중년 여인들이 많이 신었다는 궁혜,당혜,
운혜가 있는가 하면 나이먹은 여인이 신는 흑혜, 기생들이 많이 신었다는 기혜가
있었구요, 남자들 신발로는 테사혜, 외코혜, 발막혜, 등이 있었답니다.
또 있지요 추운 겨울에 남자들이 신었던 동구니 신, 눈위에서 걸을 수 있는 설피가
있었습니다. 설피는 요즘도 두뫼 산골에서는 이용을 하는 것 같더군요.
이렇게 서민들은 짚신을 신고 있을 때 양반가 에서의 신발들은 색갈과 무늬에 따라,
신발의 운두와 색채 조화에 따라 신분이 엄격히 구별 되었다네요.
고무신이 우리 곁에 처음 왔을 때는 귀한 신발이라 고무신 닳는 것이 아까워 고무신
엽구리에 차고 맨발로 다녔다는 사람들 많았구요, 아이들이 고무신 신고 뛸라 치면
고무신 닳는다. 뛰지 말아라 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고무신은 짚세기에 비해 흙도 잘 안들어 가지요.
고무신이 더러워지면 물에 북북 씻어서 툭툭 털면 새 신발 같아 졌으니까요.
그 당시 며느리들은 시어머니가 외출했다가 돌아 오면 시어머니 고무신 깨끗이 닦아
다음 외출할 때 툇돌에 가지런히 놓아 드렸지요.
고무신에도 흰 고무신과 검정 고무신이 있었습니다,
검정 고무신은 폐타이어로 만들어서 질겼다 라는 말이 있더군요.
지금도 농촌에서는 검정고무신 신은 사람들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군대간 사이에 애인이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는 말이 있지요.
옛날에 아녀자가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았을때 도망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