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존 리치 寫眞展-戰爭과 日常 그리고 希望

해피y 2017. 6. 20. 22:53

 

존 리치 寫眞展-戰爭과 日常 그리고 希望

 

大韓民國歷史博物館에서는 <존 리치 寫眞展-戰爭과 日常 그리고 希望>을 特別展으로

전시하고 있다. (전시기간: 2017.04.03~07.03)

 

존 리치(John Rich, 미국, 1917~2014) 1950 625전쟁 勃發 일주일 만에 韓國에 도착하여

3년간 머무르면서 전쟁을 기록했던 記者로 그의 컬러사진 속에서 우리는 전쟁의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으며, 전쟁 중에 살았던 가족과 어린이, 군인을 마주하며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投影해볼 수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끔찍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는 존 리치의 回顧처럼 평화로운 日常이 전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일상의

사진들 속에서 전쟁 중에도 이어지는 강한 意志力을 만날 수 있다.

이 사진전을 통해서 전쟁 중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품었던 희망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존 리치 寫眞展> 1층 부출입구 전시공간에서,< 67년만의 歸鄕> 3층 기획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다.

 

*표시가 있는 것은 사진전의 설명을 보충하기 위하여 나의 생각을 더하고, 다른 자료에서

 확인한 참고자료이다.

 

                             2017.06.11   孤 山  朴 春 慶

 

 

존 리치 寫眞展-戰爭과 日常 그리고 希望


(01) 존 리치 사진전


(02) 존 리치 사진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 부출입구 전시공간


(03) 존 리치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 그러다가 몇 년 전 어느 날, 그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사진들이

     완벽하게 보관되어 있는 거예요. “


    01 戰爭 속의 사람들


(04) 전쟁 중 어느 여름, 할아버지와 손자.


(05) 金浦비행장 부근의 어린이, 뒤쪽으로 對空 機關砲가 장착된 장갑차가 있다.


              

           (06) 長竹[긴 담뱃대]을 들고 갓을 쓴 老人


(07) 蓋馬高原 長津湖 부근의 가족과 美 海兵隊

미 해병대가 장진호 부근에 도착한 날로 추정된다. 장진호 전투는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이다.


*長津湖 戰鬪

美 第10軍團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함경남도 長津湖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中共軍 제9兵團 예하 7개 사단이 포위하자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하여

1950.11.27~12.11까지 2주간에 걸쳐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장진호 전투로 막대한 損失을 입은 中共軍 제9병단은 후방으로 철수하여 3개월에 걸쳐

부대를 再編成하였다.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돌파하여 咸興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 제9병단이 서부전선의 제13병단을 지원할 수 있는 力量을

소멸시켜 서부지역 전선의 미 제8군이 위기를 모면하는데 一助하였다.

이 작전을 통하여 미 해병 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南下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興南에 도착하여, 흥남 철수작전(1950.12.15~

12.23)을 통하여 남쪽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興南 撤收는 193척의 軍艦으로 군인 10만여 명, 민간인 10만여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켰다.


(08) 전쟁 중 어느 여름, 할아버지와 손자


(09) 휴전협상에 참석한 UN군측 대표.  -1951 7월 開城-

白善燁 한국군 소장-통역장교 이수영 중령-알레이 버크 美 해군 소장-헨리 로디스 미 육군

소장. (오른쪽부터)

 

*休戰會談(休戰協商)

휴전회담은 유엔 駐在 소련 대표가 1951.06.23 휴전협상을 제의하고, 美國이 이를 받아들여

1951.07.10일부터 開城市 高麗洞 來鳳莊에서 본회의가 개최되었으며 1951.10.25

板門店으로 장소를 옮겨 회담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52년 후반기에 戰線은 다시 加熱되어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局地戰 형태의

高地爭奪戰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53.03.05 소련 首相 스탈린이 사망하자 4월부터 휴전회담이 再開되었으며 06.08

포로송환협정이 타결되어 휴전협상의 모든 議題가 합의되었으나 1953. 06.18 유엔군측이

억류 중이던 반공 포로 2 7,000여 명을 李承晩 대통령의 決斷으로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석방시켜 韓·美 간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1953.07.27 10:00 유엔군과 공산군측 대표가 서명하여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대한민국 대표는 휴전에 반대하여 休戰協定書에 서명하지 않았다.


(10) 더위를 식히고 있는 美軍 兵士들과 이를 신기하게 처다 보고 있는 마을 주민들.


(11) 1950년 겨울, 서울 收復 후 市廳 앞에서 新兵들이 행진하는 모습


(12) 國軍 부대원들의 모습


(13) M46 패튼[Pattons] 戰車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미군 병사들과 구경하는 아이들


(14) 美軍들을 위한 위문공연


(15) 巨濟島 포로수용소의 暴動

 1952 4월 유엔군측이 경남 巨濟島에 세운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의 폭동이

 일어난 후 수용소 내에 걸린 懸垂幕들이다.


(16) 부상당한 포로들

 포로들의 폭동 뒤 수용소 안의 부상 당한 포로들.


(17) 북한군 포로들을 심문하는 美軍 兵士

 북한군은 민간인 복장으로 避亂民 人波에 잠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民間人 복장으로 피란민 대열에 潛入했기 때문에 1950 12월 중순, 나도 피란 나오면서

 黃海道에서 두 번이나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받았으며, 江華島에서도 폭격을 위해 선회하는

 미군 전투기들을 향하여 수많은 피란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必死의 努力을 다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18) 서로 지켜보고 있는 記者들

 존 리치는 共産 側 기자들과 유엔 측 기자들 사이에서 友情이 싹트는 경우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02 戰爭, 破壞


(19) 서울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폭격으로 파괴된 汽車들. 철로 끝에 서울역이 보인다.

 *그 뒤에는 北岳山과 三角山(北漢山)이 보인다.


(20) 舊 中央廳 앞에 설치된 大砲


(21) T-6 텍산(Texan)機 編隊

 

*T-6 Texan

   2人乘 訓鍊機로 미국 노스 아메리칸社에서 1935년 처음 생산하였으며, 한국은 1950

   5월 공군 장병들과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캐나다에서 퇴역해 민간에 넘어간 T-6

  10대를 구매하였다.

  625전쟁 개전 직후 한국공군은 T-6에서 손으로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으나 6 27일에

  끝나고, P-51 Mustang이 도입된 이후에는 미군과 마찬가지로 훈련 및 정찰용으로

  사용하였다.


*군용 항공기 앞에 붙어있는 알파벳은 항공기의 종류를 나타낸다.

   -T(Trainer); 훈련기  -F(Fighter); 전투기  -A(Attacker); 공격기

-B(Bomber); 폭격기 –C(Carrier); 수송기  -H(Helicopter); 救助機

-O(Observation); 觀測機  -R(Reconnaissance); 정찰기  -X; 實驗機


(22) 폭격으로 폐허가 된 마을


(23) 불을 뿜는 美 海軍 戰艦 아이오와(Iowa)號의 艦砲


(24)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25) 헬기를 타고 찍은 全景 사진


(26) 市街戰의 흔적이 남아있는 南大門(崇禮門)


(27) 항공모함 갑판에 날개를 접고 정렬되어 있는 콜세어(Corsair).

콜세어機는 특히 長津湖 퇴각전투에서 功을 세웠다.

 

*F4U Corsair

  1940년 보우트社가 개발한 미국의 艦載機로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미국의 單發 프로펠러 전투기로 콜세어(Corsair)라고도 한다

 

*6·25전쟁이 발발하여 10 19일 平壤 收復 時까지 북한에서 겪은 미 공군의 폭격.

 美軍機의 平壤 폭격은 전쟁 발발 3일후인 6 28일 平壤 飛行場과 大同江 人道橋 폭격부터

 시작하여 아침과 낮 두 차례씩 폭격하였다.

 이를 피해 평양에서 京義線을 따라 남쪽 70리에 있는 黃海道 제일 북쪽인 고향 黃州郡

 黑橋로 피난하였으나 平安南道 中和와 경계선에 있는 철도터널과 黑橋 鐵道驛 일대,

 黑橋川의 교량 등 京義線 철도와 1번 國道의 兵站線 차단을 위한 폭격이 계속되었다.

그 당시 미 공군 비행기는 機種에 따라 폭격형태가 달랐다.

 B-29폭격기는 高空에서 폭격하는데 북한군이 高射砲로 사격해도 포탄이 B-29가 비행하는

 高度(實用上昇限度 12,500m)까지 미치지 못하고 폭발하였다.

 무스탕(P-51 Mustang의 일본식 발음)은 아침과 낮에 폭격하고 바로 떠나는데

 구라망(Grumman의 일본식 발음)은 피해상황까지 확인하는지 폭격하고 나서도 한참을

 旋回하고 나서야 떠났다.

 그 다음에 나타난 쌕쌕이’(飛行音이 소리를 내는 F-80 Z전투기)는 소리 없이

 나타났다가 폭격 후 번개처럼 사라지는 나름대로 특징이 있었다.

 

*F4F Wildcat

  1937년 미국 Grumman社 제작 단발 프로펠러 전투기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날개를 접을 수 있는 艦載機로 20mm기관포와 폭탄으로 공격했다.

*P-51 Mustang

  1944년 미국 노스 아메리카항공사가 제작하여 제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사용된

  전투기로 주요임무는 폭격기 호위임무와 전투비행이었다.

  미 공군이 육군에서 독립된 이후 F-51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625전쟁 때북한에서는

  보통 이전 명칭인 P-51로 불렀다.

*F-80C 슈팅스타[Lockheed F-80C shooting star]

  1941년 미국 Lockheed Martin社에서 제작한 미국 최초의 Z전투기로 Cal. 50기관총과

  폭탄을 사용하였다.

1950 10 MIG-15기를 격추하여 Z전투기간 최초의 공중전이 되었다.

*B-29 Super Fortress

   Boeing社가 제작하여 1942년 初度 飛行, 1944 6월 實用 배치된 미국의 戰略爆擊機로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 本土 공습의 主力機로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

   원자폭탄을 투하한 폭격기로 유명하며 6·25전쟁 때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03 계속되는 日常과 希望


시골이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끔찍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습니다.

              -존 리치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중에서-


(28) 시골 全景


(29) 시골 전경


(30) 中古物品을 파는 소년

 廚房도구, 女俳優들의 사진 등 중고품을 팔고 있다.


(31) 초여름의 農夫

       전쟁 중에도 계절은 바뀌고, 논과 밭을 돌보는 일은 계속되었다.


(31) 초여름의 農夫

전쟁 중에도 계절은 바뀌고, 논과 밭을 돌보는 일은 계속되었다.


(33) 빨래터 風景


(34) 봄을 기다리는 兵士

 많은 병사들이 곳곳에 핀 진달래를 보며 혹독했던 겨울의 끝을 즐거워했다.


(35) 사진관 앞에 수줍게 서 있는 아이들


(36) 유리그릇, 주방도구를 팔고 있는 가게


(37) 開城의 市場


(38) 서울 南大門市場의 어머니들


(39) 公園으로 소풍 나온 夫婦


(40)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

 근처에 대포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전쟁을 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하루는 대포소리도

 안 났는데 사람들이 소 달구지에 무엇을 싣고 끌고 나오는 거예요.

 당시 라디오가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났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게 避亂이었어요.       

                               -존 리치-


(41) 서울의 市場風景

그 해 5월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새롭게 전개될 생활에 대한 예감이 충만한 특별히 아름다운 5월이었다.

 그러나 하필 1950년의 5월이었다.


(42) 1951년 봄, 다시 찾은 서울시청 앞에 서있는 어린이들


(43) 파괴된 水原華城 長安門


(44) 생활필수품만 챙겨 떠나는 避亂民 家族


              

        (45) 북한군의 南下를 막기 위하여 폭파된 漢江鐵橋(人道橋) 1년뒤 모습.

      625전쟁 초기 발생한 비극적 사건 중 하나로 최소한 500~8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피란을 가는데 龍山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길에서 밤을 새고 길에 빽빽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손을 놓지 말라고 하셨어요. 漢江다리까지 갔는데 갑자기 !’하는

소리가 나더니 한강 다리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백사장으로 떨어졌어요.”

 

    *漢江人道橋爆破事件

625전쟁 초기인 1950.06.28 02:30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하여 민간인

500~8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蔡秉德 육군참모총장이 敵의 서울 침입 2시간 후에

漢江의 교량들을 폭파하도록 工兵監 崔昌植 大領에게 명령한 다음, 始興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한강대교와 3개의 鐵橋 폭파에 한국군 주력부대의 후퇴와 서울시민의 피란에

대해서는 고려되지 않았다.

早期 폭파로 人命被害는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정부는 8 28일 폭파 책임자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敵前非行罪'로 체포해

19509 21일 銃殺刑을 집행했으며, 崔 대령의 軍法裁判 전에 蔡秉德 육군참모총장은

1950 7월 河東戰鬪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崔大領 夫人의 호소로 12년 만에 再審을 거쳐 崔昌植 대령은 上官의 명령에 따른

행동으로 正當性이 인정되어 1962년 無罪 판정을 받아 死後 復權되었다.


(46) 손을 흔드는 소년

  추락한 북한군 전투기 殘骸에서 손을 흔드는 소년의 표정에서 希望을 엿볼 수 있다.


(47) 동료와 함께 汶山驛 팻말 앞에 서있는 존 리치(왼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