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11월 12일 화요일

해피y 2019. 11. 11. 21:38

^빨간명찰^<_p>

▷<_strong>1962년 11월 12일<_span> <_p>

‘6억달러’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_p>

‘6억달러’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_p>

1962년 11월 12일 일본 외무성에서 있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오히라 일본 외상의 회담장면.<_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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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은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에서 받아낼 요량이었다. 1961년 6월 20일 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조기 타결을 지시했다. 1962년 10월 20일 김종필은 오히라 외무장관과 이케다 총리를 만나 1차 탐색전을 펼쳤으나 일본은 3억달러 제공만 고집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반드시 청구권이라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고, 6억달러 이하는 양보할 수 없다”는 긴급훈령을 내렸다.<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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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은 오히라를 다시 만나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한·일회담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타결지었다.금액은 6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로 매듭지었으나 ‘청구권’이란 문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독도문제의 해결방안으로 독도 파괴를 일본 측에 제안하고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는 일본 측의 의견에도 합의해줬다는 사실도 알려져서 충격을 주었다. <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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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졸속 타결이라며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지만 김종필측도 할말은 있었다. 어떻게든 6억달러를 받아내려다 보니 일부 문구에 소홀하게 됐고, 일본의 외환보유액이 18억달러였을 때 6억달러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한일 청구권에 대해 ‘6억달러+알파’라는 ‘김종필·오히라 메모’ 합의로 10년간 지지부진하던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의 물꼬가 틔였다는 긍정적 평가와 군사정권의 밀실 타협이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상존한다. 이후 정부 간 공식협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1963년 3월부터 독도 문제 등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이어졌고, 이에 6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6·3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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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오늘무슨일이61<_cite>건<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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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_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