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늘의역사)5월 7일(음력 4월 15일) 庚戌 목요일 구홍덕 박사 진갑

해피y 2020. 5. 6. 22:38

^빨간명찰^<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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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strong>1915년 5월 7일<_span> <_p>

독일 잠수함 U-20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 격침, 1198명 사망<_p>

독일 잠수함 U-20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 격침, 1198명 사망<_p>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격침된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_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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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5월 7일, 약 2,000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뉴욕을 출항하여 리버풀로 향하던 영국 국적의 3만 1,500t급 여객선인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하자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_p>

워싱턴 D.C.의 독일 대사관에게 있어 해전 법규는 아주 명확했다. 대영제국 또는 그 동맹국의 국기를 달고 있는 선박이 전쟁 해역-영국제도 인근 해역 포함-에 진입할 경우 이유를 막론하고 공격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독일 잠수함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영국 해군 본부는 즉시 루시타니아에 전문을 보내 지그재그로 항해하거나 그밖에 공격을 피할 수 있는 항법으로 항해할 것을 명했다. 루시타니아 승무원들은 이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며, 발터 슈비거 대위는 U-20 잠수함에서 어뢰 발사를 명했다. 이 어뢰는 루시타니아호의 우현 한복판에서 폭발했으며, 엔진실 보일러에서 더 큰 폭발이 일어났다. 루시타니아호는 불과 20분만에 가라앉았으며, 배와 함께 목숨을 잃은 1,198명 중에는 미국인도 128명이나 포함돼 있었다.<_p>

루시타니아호는 북대서양을 횡단하는 정기여객선 중에서 가장 빠른 선박이었다. 특히 이 배에 타고있던 희생자 중에는 2세 이하의 유아가 100여명이나 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의 독일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_p>

영국은 루시타니아호가 여객선이었다고 주장하며 독일을 맹비난하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독일이 비무장상선에 대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고 믿었다.<_p>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미국 대통령은 배의 격침에 분노한 미국인들의 열화와 같은 전쟁 요구를 묵살하고, 외교 각서를 통해 배상금 및 여객선 공격 중지를 요구하는 협상을 독일과 벌였다. 독일은 루시타니아호에 무기가 실려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배상금 지급에 합의했다.<_p>

루시타니아호가 침몰과 함께 그 안에 있던 모든 비밀 역시 바닷속으로 사라지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거대한 선체에 비해 단 한 발의 어뢰 명중으로 인해 완전 침몰까지 18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또 700여 명이 넘는 생존자들 역시 독일 잠수정에 의해 어뢰 공격을 받은 후 2차 폭발이 일어났다는 증언을 했다. 루시타니아호 안에 선박을 20분도 채 안돼 침몰시킬만한 파괴적인 폭발물이 실려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_p>

이 문제는 1차대전과 2차대전이 벌어지고, 또 탐사장비의 미비로 인해 한동안 해결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백만장자인 ‘Gregg Bemis’가 발달한 탐사장비를 이용, 90m 이하 깊이에 잠들어 있던 루시타니아호의 일부를 탐사하는데 성공했다.<_p>

밝혀진 바에 따르면, 루시타니아호엔 탄약 4천2백 상자와 유산탄 1천250 상자가 실려있었고, 수뢰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이 폭발하여 배의 침몰을 가속화시켰다.<_p>

물론 이 수치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일부 개인에 의한 은닉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전쟁군수물자를 수송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게 되었다.<_p><_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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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오늘무슨일이45<_cite>건<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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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_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