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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strong>1999년 12월 1일<_span> <_p> 영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 250년 만에 공개<_p>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질식사하게 한 영조가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참혹한 심경을 토로한 묘지문이 2백50년 만에 공개됐다.<_p> 국립중앙박물관은 1999년 12월 ‘이달의 문화재’ 전시품목 중 하나로 1968년 서울 휘경동 거주 이종만씨가 기증해 보관해오고 있던 영조의 ‘어제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을 공개했다.<_p> 가로 16.7㎝·세로 21.8㎝·두께 2.0㎝ 사각형 청화백자 5장에 씌어 있는 이 묘지문의 작성일자는 영조 38년(1762) 7월로 기록돼 있다. 임금이 쓴 묘지문은 통상 문장이 뛰어난 학자가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묘지문은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적게 하여 짐의 30년 마음을 밝힌 것이니…”라며 영조가 직접 작성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로 시작하는 이 묘지문에서 영조는 “그래서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타일렀으나 제멋대로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면서 아들을 뒤주에 가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어 아들의 죽음이 뜻밖의 일이라며 “여러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는데…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며 원통해 하고 있다.<_p> 그동안 학계에서는 사도세자가 노소당인(老少黨人) 간의 정쟁으로 노론에 의해 사도세자가 희생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으나 영조 자신이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육하기 위해 뒤주에 가두었다고 쓴 글이 나옴으로써 그 배경을 둘러싼 새로운 논쟁거리를 제공하게 되었다.<_p> <_font><_font><_p><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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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p><_caption> 총 84<_cite>건<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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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p><_th><_tr><_thead>2009년<_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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