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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strong>1966년 12월 3일<_span> <_p> 이만희 감독, 영화 ‘만추’ 개봉<_p> 이만희(1931~1975)는 1960년대 한국 장르영화의 달인이자 충무로의 보헤미안이었다. 15년 동안 50편의 영화를 양산하면서도 작품마다 자기 색깔을 놓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감독이었다.<_p> 이만희가 연출력과 흥행력에서 인정을 받은 첫 영화는 1962년 8월 9일 개봉한 ‘다이알 112를 돌려라’였다. 당시로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던 스릴러 장르의 이 영화로 이만희는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여 상업성까지 인정받았다.<_p> 이만희를 당대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끌어올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성공이었다. 1963년 4월 1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전쟁영화로는 최초로 20만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워 영화계를 놀라게 했으며 오늘날에는 한국 전쟁영화의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_p> 그러나 이런 성공의 기쁨도 잠시뿐, 이듬해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고편이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1964년 12월 18일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이다. 북한 인민군에게 잡힌 국군 간호장교 포로 7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북한군이 국군보다 더 좋은 옷차림을 하고 있고 또 국군이 바보스럽게 묘사되어 북한이 더 우월한 체제로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_p> 다행히 구속영장은 기각되고 필름에 대해서만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나서 이만희의 구속을 주도하는 바람에 이만희는 결국 1965년 2월 5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_p> 이만희는 재판 중에도 ‘7인의 여포로’ 내용의 일부를 삭제하고 보충 촬영을 통해 재편집한 뒤 ‘돌아온 여군’으로 제목을 바꿔 1965년 8월 27일 개봉했다. 그러나 당국의 검열로 이미 누더기가 된 영화의 흥행 결과는 참혹했다.<_p> 그렇다고 영화에 대한 열정이 수그러들 이만희가 아니었다. 자신의 대표작이자 한국 영화사를 빛낸 주옥 같은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만추’를 1966년 12월 3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것이다. 3일 동안의 특별휴가를 얻어 어머니 성묘를 가는 살인 복역수 문정숙과 위폐범으로 지명수배 되어 쫓기는 신성일 두 사람이 펼치는 인생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사랑을 그린 ‘만추’는 촬영과 녹음이 보름만에 완성되고 출연진이라야 신성일과 문정숙 두 사람이 사실상 전부였는데도 20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여 이만희 영화의 정점을 찍었다.<_p> ‘만추’는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베를린 영화제에도 출품되고 몇 편의 영화로도 리메이크되었다. 1975년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김지미 주연), 1982년 김수용 감독의 ‘만추’(김혜자 주연), 2011년 김태용 감독의 ‘만추’(현빈·탕웨이 주연)로 국내에서 세 차례에 걸쳐 리메이크되었으며 일본에서도 1972년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어 그해 일본영화 베스트5에 올랐다. ‘만추’는 이처럼 한국 영화의 예술성을 한층 높인 걸작으로 꼽히지만 원판 필름은 물론 지방 상영을 위해 복사한 필름도, 외국에 수출한 필름도 사라지고 없어 한국 영화계의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_p> <_font><_font><_p><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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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p><_caption> 총 51<_cite>건<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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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p><_th><_tr><_thead>2010년<_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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