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3화]도령을 찾아서 [1]
4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태양은 일찌감치 동녘에 솟아올랐으나 안개가 두터워 잘 보이질 않았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는 있었지만,
자욱이 밀려드는 수증기의 여파로 몇 발짝 앞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럇!”
“이랴 이럇!”
두 사내가 다급하게 말을 달리며 외치는 소리가 안개를 헤집었다.
은니를 확 풀어놓은 것만 같은 안개에 싸인 채 길손들은
희끄무레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며 저마다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두 사내는 뻘뻘 흐르는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연해연방 말의 엉덩이를 후려갈기며 달렸다.
“따가닥! 따가닥!”
“워어- 워어!”
두 사람은 촌각을 다투어 말을 달려 패강* 언저리 나루터에 도착했고,
즉시 말을 멈추고는 훌쩍!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아직도 안개에 싸인 채 웅기중기 모여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한 사람은 남색 바탕에 붉고 푸른색으로 수놓은 의복에
높다란 관에는 두 가닥의 공작 깃털을 꽂은 장수였다.
그리고 한 사람은 비록 말은 타고 왔지만 허름한 무명옷에
텁수룩한 더벅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여맨 모습이
장수를 따르는 비복임에 틀림없었다.
날래게 말에서 뛰어내렸던 젊은 비복이 장수의 말고삐를 받아 잡았다.
“오호! 패강의 경색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바우야, 그렇지?”
“예에, 연 장군님, 그렇고말고요.”
장년의 연 장군은 텁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미소 띤 얼굴로 주위를 한 바퀴 휘돌아보고는
다시 패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기슭 저쪽에서는 나룻배가 사람들을 태우느라 여념이 없었고,
태양의 강렬한 빛살에 몰리다 안개는 기어이 주춤주춤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짙은 안개에 숨어있던 검푸른 청루벽(靑樓碧)과 능라도(綾羅島)의 모습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고, 그 사이를 흐르는 푸른 강물 위를 덮은 물안개에도
햇볕이 내리쬐어 반사되자,
물빛이 하늘에 올라 하늘과 강물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저마다 반짝였다.
그 사이로 한 마리의 백로가 유유히 강 위를 선회하였다.
아하, 불이 붙는다. 불이 붙는다.
의주 통군정 붙어난 불은 압록강수로 꺼주련마는
용천 철산 선천 정주 가산 박천을 얼른 지나
안주 백상루에 붙난 불은
향산 동구 뚝 떨어져 청천강수로 꺼주련마는
숙천 순안을 얼른 지나
페앙(평양) 모란봉 붙난 불은
삼산반락은 청루벽이요 이수중분에 능라도로다
능라도며는 을밀대요 을밀대며는 만폭대라
대동강수로 꺼 주련만은
이 내 가삼에 붙어난 불은 어느 누구라 꺼주리
꺼줄 이 없고 믿을 친구가 발라서(없어서) 나 어이 할까요
-수심가 부분-
“아, 천연으로 만들어진 이 선경을 어이할꼬.”
연비 장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탄성을 발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누른 그는 왕도 장안성으로 눈길을 돌렸다.
동, 서, 남, 삼면이 패강으로 둘러싸였고,
북은 산으로 싸여 천혜의 요새를 이룬 난공불락의 왕도 평양성이었다.
성난 호랑이의 형상을 한 목멱산(木覓山 서울 남산의 옛 이름)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모란봉.
그 남녘 기슭에 당당한 위엄으로 솟아있는 구제궁(九梯宮)은
아직도 흐릿한 수증기에 싸여있었지만,
그 웅장한 자태는 마치 병풍을 두른 것처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왕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눈여겨보며
연비는 마음이 한결 훈훈해졌다. 그는 또 한 번 수염을 왼손으로 내리쓸었다.
이윽고 저쪽 강가의 나룻배가 떠날 채비로 닻을 걷어 올렸고,
강을 건너려고 나룻배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도 우왕좌왕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패강의 아름다움 덕분인지,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부드럽고 밝았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여보게, 저 장수는 동부 총관부 별장 연비 장군 아닌가?”
“하하, 그렇군. 그러고 보니 자넨 촌놈 중에서도 상급 촌놈일세!”
“예끼 이사람! 큰 소리 작작 하게나!
자기는 그나마 촌놈도 못 되는 두메산골 놈이면서 뭘 그러나?”
“아이고, 그러십니까요? 하지만 나는 저 바우놈의 친구입니다그려!”
“아하, 그러신가? 그렇다면, 자네가 바우를 안다고 하니 묻겠는데,
그래, 연개소문의 행방을 알았다던가?”
“글쎄 아직도 개소문의 행방을 모르는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그 댁에서는 여간 수심이 아니라네.”
“암, 여부가 있을라고.
천하 명문대가의 외아들 행방을 10년이 넘도록 모른다니 참…….”
우직하고 소박한 시골백성들은 장안성 명문거족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인양 저마다 한 마디 씩 거들었다.
또 다른 나룻배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바우는 말고삐를 잡고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장군의 애마와 자기가 타고 온 말을 차례로 배에 끌어올린 것이었다.
곧 이어 연비가 배에 오르고 그 뒤를 따라 모든 사람들이 승선하자
드디어 사공이 닻을 올렸다. 임시로 놓았던 가교도 끌어올려졌다.
두 사람의 사공이 삿대를 잡고 성큼성큼 저으니
배는 강의 중심을 향해 미끄러지듯 떠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었고
물 위엔 채 가시지 않은 안개 때문인지 수증기가
강물을 따라 이리저리 노닐었다.
조물조물 물살을 지으며 도도히 흐르는 패강 위에는
태공들의 고깃배가 여기저기 한가로이 떠 있었다.
건너편 강변엔 수양버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무더위에 겨운 나머지
그 자태를 강물 아래로 드리웠다.
“언제부터 저렇게 퇴색되었던고…….”
강변에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청루가 시야에 들어왔다.
청루 한 복판에 풍치 좋게 세워진 화선 경당(기생 서재)에서는
삼현육각의 흥겨운 가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문이 활짝 열려진 경당 누각에서는 동기(童妓) 한 쌍이
힘겨운 칼춤 배우기에 한창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아직도 연약한 동기들은 힘에 겨운 장검을 양 손에 한 자루 씩 들고
음률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자유자재로 장검 돌리는 묘기가 눈에 선연하였다.
비좁은 선실에 있는 뭇 사람들이 동기들의 고달픈 수련에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뱃사공이 젓는 노는 유유히 패강을 가르며
강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어느 태공의 배에선가 요즈음 성 안에서 한창 유행되고 있는
구슬픈 동기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고달프다 동기야 울지를 마오
세월이 흐르는 그 사이에로
멋진 노래와 춤이 배워지리니
즐겁다 웃질 마오 화선 아가씨
천하의 풍류호걸 그대 품안에
금방석 은방석 호강이 떴네.
오는 임은 웃으며 와도
가는 임의 애절함이여
아, 스승도 그녀도 울고 말았네.
구슬픈 노래의 여운이 잉잉 강물에 메아리 되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가냘픈 목청이 높고 낮고 길고 짧음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솜씨는
마치 계곡의 물이 돌돌 굴러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물이 천길만길의 절벽으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힘찬 가락으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동기의 노래에 넋을 빼앗긴 듯 빠져들었다.
행색도 초라한 중년의 아낙이 한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그 노래에 취해 있었다.
“가락이 참 멋들어져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그녀가 옆의 남편에게 말을 건네었다.
“허허, 그렇게 멋들어지다면서 왜 울어?”
“하지만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걸 어떡해요?”
“당신은 이 노래의 내력이나 알고 그러오?”
“내력이 있나요? 어떤 내력인데?”
“허허, ‘목단아’라는 사람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오.”
왕도 평양성 장안의 남가락골에 ‘목단아’라는 위인이 있었다.
그는 명문거족 가문에다 숱한 재산까지 물려받은 사람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의협심이 강한 반면에 방탕하기도 했다.
목단아는 풍류에 빠진 나머지 가문을 돌보지 않고
밤낮없이 주색잡기에서 깨어날 줄 몰랐는데,
도무지 그칠 줄을 모르던 그의 풍류 행각 때문에,
그렇게도 당당하던 그의 가문은 어느 순간에 퇴색되었고,
그 많던 재산마저도 모두 탕진되었다.
그렇게 가문이 몰락된 후,
배운 거라곤 풍류 밖에 없던 목단아는 할 수 없이
동기 경당에서 노래와 춤을 가르쳐서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가 애써 가르친 어린 기생들이 장안에서 명성을 떨칠 양이면,
천하의 권문세도가인 어림군의 소 총관을 위시한 풍류한량들이
모여들었다. 그 화선(기생들을 배에 태우고 영업하는 배)을
독점하려고 있는 재산을 딸딸 긁어 탕진하고 결국엔 비참하게
타락하여 폐가 망신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더욱이 이즈음은 당나라의 화려한 풍조가 들어와서
온 장안을 풍미하고 있었다.
화선에 꾀인 한량들이라면 은방석금방석을 탕진해가며
애태우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달은 목단아는 이윽고,
동기들을 가르치는 스승직을 내던지려 했는데,
그러나 세상만사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던 목단아는
세도가 소 총관의 눈에 들어 얼마간의 밑천을 장만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쓰라린 그 직업을 청산하고 지금은 일엽편주에 몸을 의지하는
태공이 된 것이었다.
“여보, 당신도 조심하세요.”
남편의 장황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내가 그런 위인이나 되면 제법이게!”
사람들은 아직도 노래의 흥취가 가시지 않아 표정들이 흐뭇해보였지만,
뱃전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연비만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만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연지기의 장본인이었는데,
무슨 곡절인지 다시 울적해진 거였다.
바우는 눈치 빠른 종자답게 장군의 마음을 척 알아차렸다.
‘왕도 장안성이 저렇게 퇴락해가는구나.’
패강의 풍경에 흐뭇해하던 연비였으나,
강변에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청루의 홍등가를 보고 기분이 몹시 상한 거였다.
“장군님!”
바우가 슬쩍 곁으로 다가가 수작을 걸었다.
“…….”
“장군님의 마음을 소인도 알고 있습지요.”
“어허, 네놈이 감히 상전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수작을 떨어? 고이연!”
“해해해해, 장군님, 이래뵈도 소인은 허구헌날
대감마님만을 뫼시고 살아오는 터인뎁쇼? 그만한 눈치야 없을라굽쇼?”
“그래? 대감마님께서 네놈에게 내 말을 하시었다 그 말이냐?”
“아이구, 그런 게 아니굽쇼.
대감마님께오선 소 총관이 워낙 방자하여
당나라 사신들과 날이 날마다 놀아나는 통에
강변에 청루가 많이 늘어난다고 걱정하시고 계시던뎁쇼.”
“뭬야? 그래서 네놈이 내 마음을 안다고 껍적거렸던 게야?”
“해해, 말하자면 그렇습지요.”
“허긴 그렇구나.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바우 너도 천하의 연태조 대인님을 뫼신지 10년이 다 되어가니 알만하다.
허허허허, 제법이구나.”
“해해, 서당개 3년에 비하겠습니까요. 이놈은 3년이 아니라 석삼년입죠!”
“하하, 하긴 그렇다.”
바우는 괜히 신이 나서 우쭐거렸다.
배는 유유히 강기슭으로 향해 다가가는데,
첨벙 첨벙 삿대질을 하는 뱃사공의 구리빛깔 팔뚝에
힘줄이 툭툭 불거지고 있었다.
“어기야 디야!”
거센 목소리에 맞춰 삿대질을 할 때마다
사공의 팔에서 근육이 불끈불끈 일어섰다.
잠시 후 배가 조용히 ‘내성 나루터’에 닿자,
사공들은 부랴부랴 널판 가교를 놓았다.
그동안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웅성거리며 부산하게
내릴 준비를 하였다.
연비와 바우도 각자 말을 몰고 하선했다.
“장군님, 어서 타십시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사옵니다.”
바우는 연비의 애마를 대령하였다.
“오냐, 많이 늦었구나.”
연비가 날렵한 동작으로 말 등에 올라타자, 바우도 잽싸게 말에 올랐다.
“이럇!”
연비가 고삐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채찍을 높이 들어 말의 엉덩이를 때리자,
말은 따가닥, 따가닥, 달리기 시작했다.
장군의 구레나룻 수염이 바람에 보기 좋게 휘날렸다.
두툼한 입술을 굳게 다물고 말을 달리던 연비장군이 별안간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은 갑작스런 제동이 걸려 “히이잉~” 하며 앞발을 들어
파바박 허공을 찬 후에야 멈추었다.
“바우!”
바우도 말고삐를 늦추고 천천히 장군의 곁으로 말을 몰았다.
“장군님! 소인을 부르셨사옵니까?”
“오냐! 너는 아까 분명히 말했으렷다?
대감께오서 개소문 도령이 있는 곳을 아신다고 말이니라.”
“예에, 그러믄입쇼! 소인 두 귀로 틀림없이 들었사옵니다.
소인이 언제, 장군님께 거짓을 아뢴 적이 있사옵니까?”
“허허, 이놈 보게? 잔말 거두고 네가 들은 바대로 다시 말해보렷다!”
“아이쿠, 장군님도……. 벌써 몇 번이나 말씀 올렸는뎁쇼?”
바우는 원망스럽다는 눈길로 연비를 바라보았다.
힐끔 바우의 눈치를 살핀 연비는 빙그레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허허, 녀석!……. 내가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니라.
뜻밖에도 개소문 도령이 있는 곳을 알았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고,
그게 정말 개소문 도령인가, 미심쩍어서 그러는 것이니라.”
연비의 눈길은 말없이 허공을 더듬었다.
‘풍문에만 의지하여 숱한 고을을 득달같이 달려가곤 했었지…….
번번이 허망한 뜬소문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뒤에는
그 얼마나 큰 낙담에 빠지고 했던가…….’
* 패강(浿江) : 평안남도 북동부 낭림산맥의 서쪽에서 발원, 남서류하여 진남포시 부근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길이 438㎞, 유역면적 1만 6673㎢.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긴 강으로 고조선시대에는 열수, 고구려시대에는 패수·패강, 또는 왕성강이라고 불려오다가 고려시대 이래로 대동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고종 때의 문신 최자(崔滋)는 그의 시구에 “여러 물이 모여서 돌아 흐르므로 이름이 대동강이 되었다(衆水所匯名爲大同).”고 그 이름의 유래를 밝혔다. 낭림산맥의 동백산과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대체로 요동 방향의 산계(山系)를 따라 남서류하던 본류는 덕천 부근에서 마탄강(52.6㎞)과 합류한다. 이 흐름은 북창 부근에 이르러 지질구조선을 따라 급전하면서 남류한다. 순천 부근에서 장선강, 성천 부근에서 비류강(132.7㎞)과 합류하면서 다시 남서 방향을 취한다. 중·하류에 이르러 남강(185.4㎞)과 합류하면서 하폭이 넓어지고 유량이 급증하여 대하천이 되고, 주변에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하류에서는 멸악산맥 북부의 황해도지방을 배수하여오던 황주천과 재령강(129㎞)과 합류하여 진남포 서쪽에서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패강‧패수‧패하 등의 용어는 한국의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백제 초기의 북쪽 경계인 '패하'는 예성강이었으며, 고려시대에도 예성강의 일부가 '패강'으로 불렸다.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에 자리 잡았던 시기에는 대동강이 패수로 불리었다. 또한 요동의 개현 지역에 흐르는 '어니하'를 패수라고도 하였으며, 이 밖에도 패수라고 비정될 수 있는 강은 여러 개 상정된다. 하지만 성덕왕 34년, 당나라가 정식으로 신라의 영유권을 공인한 이른바 ‘패강 이남의 땅’에 등장하는 패강은 지금의 대동강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연암박지원의 말은 다르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ㆍ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당(唐)의 의봉(儀鳳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2년(677)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고구려 보장왕(寶藏王)을 요동주(遼東州) 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성의 둘레는 3리에 지나지 않으나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았다.
그 제도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네 모서리가 반듯하여 네모 말[斗]을 놓아둔 것처럼 보인다.
지금 겨우 반쯤밖에 쌓지 않아서 그 높낮이는 비록 예측할 수 없으나,
성문 위 다락 세울 곳에 구름다리를 놓아 허공에 높이 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공사는 어찌 보면 매우 거창스러운 듯하다.
여러 가지 기계가 편리하여 벽돌을 나르고 흙을 실어오고 하는 것이 모두
기계가 움직이고 수레바퀴가 굴러 혹은 위로부터 끌어올리기도 하며 혹은 저절로 가기도 하여
그 법이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모두가 일은 간단하되 공로는 배나 되는 기술이다.
그 어느 하나 본받지 않을 것이 없으나,
다만 길이 바빠서 골고루 구경할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설사 진종일 두고 자세히 본다 하더라도 갑자기 배울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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