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4화] 도령을 찾아서 [2]
연비는 깊은 시름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개소문 도령을 찾아야 하느니……”
“장군님, 이번엔 틀림없이 개소문 도련님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바우는 연비 장군이 자기 말에 수긍하는 느낌이 들자
짐짓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걸 네가 어찌 장담하느냐?”
장군이 자기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한숨처럼 말하자,
바우도 턱 말문이 막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필의 말도 주인네의 마음을 아는 듯 발굽도 가지런히 정답게,
따가닥, 따가닥, 서로 발을 맞추어 달리기 시작했다.
말 위에 앉아 흔들흔들하면서 연비는 회상에 빠져 들어갔다.
고구려의 장수 고승(高勝)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신라군의 반격으로 실패한 603년(영양왕 14년).
늙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연태조
(고구려 동부대인. 서부대인이라는 설도 있음)는
그의 나이 50에 이르러서야 아들 하나를 얻었다.
아이의 이름은 개소문이라 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쉰 살에 얻은 아이라 하여 그를 ‘쉰동’이라 불렀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 어찌나 대견하고 귀여웠던지,
연태조 부부는 아들을 금지옥엽으로 귀여워했는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귀여워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엄격한 훈도와 자애로 휩싸여, 어린 개소문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아는 법이라고,
개소문은 자라면서 총명하고 대범한 기질을 보여서,
연태조는 개소문에게 큰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의 개소문은 인생의 전부요 생의 보람이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찬바람 휭휭 불던 연씨댁은
개소문이 태어난 후엔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다.
비약하자면, 개소문에 대한 이야기로 아침 해가 뜨고
개소문을 중심으로 해서 하루해가 저물었다고 할 정도였다.
연개소문은 나이 열 살(613년 영양왕 24년)이 되자
총명이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이 그즈음 연태조의 유일한 낙이었다.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고 있는 아들을 지켜보며,
연태조는 흐뭇한 정감에 젖어들고 있었다.
‘내 이미 늙어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
너는 장차 이 가문을 더욱 빛내고 국가의 동량(棟梁 마룻대와 들보)이
되어라.
내가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이루어야 하느니라…….
너 역시 대대로(大對盧)의 중임을 맡아,
온 집안의 전통과 권위를 더욱 빛나게 하라.
그래서 왕실과 국가를 위해 크나큰 그릇이 되어다오.’
지그시 눈을 감은 연태조의 눈꺼풀이 가벼운 흥분으로 파르르 떨었다.
“대감마님, 문덕도사께서 대감마님을 뵈러 찾아왔사옵니다.”
명상에 잠겼던 연태조는 상노의 전갈을 받고 번쩍 눈을 떴다.
“문덕도사? 그래, 어서 드시라 해라.”
“예이~”
을지문덕.
그는 연개소문이 태어났던 당시부터 연태조 집에 자주 출입하였었다.
그가 지략과 문무를 겸비한 높은 도인임을 잘 아는 연태조는
평소 그를 친구처럼 대했다.
상노의 인도로 도사가 사랑채에 들었다.
“대감, 그간 강녕하시었는지요?”
도복 차림에 커다란 방립을 쓴 문덕도사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신 꺾었다.
“어서 오시오, 장군!”
“허허, 가당찮소. 장군이라니! 그냥 문덕도사라 불러주시오.”
“도사님. 좋소이다. 문덕도사님…….
지난해 살수대전 이후엔 도통 소식을 몰라
궁금하던 참이었다오. 하하, 잘 왔소이다. 진심으로 반갑소이다.”
“하하, 이 사람을 이토록 환대해주시니 늘 고맙소이다.”
“어서 이리로 앉으시오.”
문덕도사가 좌정하자,
개소문은 읽던 책을 턱 덮고 일어나서 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도사님, 그동안 강녕하셨사옵니까?”
“어허, 우리 도령께서는 어느새 훤한 장부가 되셨소이다.”
개소문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물러나 앉았다.
열 살 아들이 장부가 되었다는 도사의 말에 연태조는 귀가 솔깃하였다.
아들의 모습이 새삼스레 대견스러워서 그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요 몇 달간 어찌 지내셨소?”
“하하, 이 사람이야 원래 발길 닿는 곳이 내 집이라,
부지런히 떠돌아다니고 있습지요.”
“허허허허!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여길 오셨는지 퍽 궁금하외다.”
“예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와…….”
“무슨 말씀인데 그리 뜸을 들이시오?”
허연 수염을 쓰다듬고 있던 문덕은 다소곳이 앉아있는 개소문 쪽으로
천천히 눈길을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도령을 맡아 가르칠까하여 왔습니다.
어려우시겠지만 몇 년간만 제게 맡겨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호오, 우리 개소문이를 맡겨 달라 그 말씀이시오?”
“예, 그렇습니다.
미력하나마 힘닿는 데까지 수도와 수련을 쌓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장차 이 나라에 큰 그릇이 되도록 해볼까 하옵니다.”
“큰 그릇?”
“부질없는 예감일지 모르오나,
살수대전의 승리보다 더욱 큰 승리를 이끌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태조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바로 눈앞의 을지문덕을 비롯하여 을파소 등,
대고구려의 역사를 찬란히 수놓은 기라성 같은 위인들은 모두
입산수도한 인물들이었다.
“잠시 이별함은 더 큰 장래를 도모함이오니 부디 소인을 믿어주시오이다.”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연태조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옳은 말씀이오. 내, 도인을 믿는 까닭에 기꺼이 아들을 맡기겠소이다.”
연태조는 오직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뿐이었다.
바로 그 마음으로,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여 망설임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
다음날, 떠날 차비를 마친 연개소문이
아버지 연태조 앞에 하직인사를 올렸다.
“아버님, 소자, 돌아올 때까지 옥체 보중하옵소서.”
“오냐, 전심 수도하여 대성해서 돌아오너라.”
그렇게 떠난 아들 개소문을, 연태조 부부는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아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하였다.
이제는 영양태왕 시대가 가고 영류태왕 6년(623년).
꼽아보니 10년.
연태조의 아들 연개소문은 10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인 거였다.
애가 닳을 대로 닳아버린 개소문의 부모가
초조한 심정으로 아들의 행방을 찾기 시작한지도 수년이 흘렀다.
회상에서 빠져나오며, 연비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는 동안,
말은 패강 둔덕을 부지런히 달려 어느덧 평양성 차피문 앞에 도착했다.
웅장하고 수려한 홍범궁 정문을 지나면 고래 등을 닮은 사락궁에 이른다.
이 사락궁은 나라의 귀인을 맞이하는 수춘부(壽春部)이다.
동부 도총관 연대인 댁으로 가려면 수춘부의 오른쪽 높은 돌담을 끼고,
줄곧 내성 쪽으로 달려야 한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내성 옆에 있는 버드나무촌에 이르며,
이곳에 바로 연태조의 저택이 있는 거였다.
어느새 두 사람은 연태조의 저택 대문 앞에 이르렀다.
대문 앞에서 파수 보던 몇 몇 군사들이
연비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며 달려 나왔다.
어떤 군졸은 말고삐를 받아들고,
어떤 군졸은 연비에게 허리를 꺾고 인사를 했다.
“장군님, 어서 오십시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냐, 너희들이 수고가 많구나.”
날쌔게 말에서 뛰어내린 연비는
다급한 걸음걸이로 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사랑채 객청에 앉아 연비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총관부 낭장 오영팔이
달려 나오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장군님, 어서 오십시오.
총관 대인께서 장군님을 기다리신지 오래입니다.”
“오, 오 낭장, 그 사이 잘 있었는가?
그래, 대감께오선 지금 어디 계신가?”
“예, 사랑에 계시옵니다.”
오영팔의 뒤를 따라서 대문을 지나 중문을 들어선 연비는
사랑채의 문들이 평소와는 달리 화들짝 열려 있음을 알아차렸다.
예전 같았으면 오뉴월 무더위에도 꽉꽉 닫혀있던 문들이,
오늘따라 활짝, 활짝, 열려있는 거였다.
연비의 마음도 한결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오영팔이 섬돌 아래 서서 공손히 아뢰었다.
“대감마님, 연장군께서 지금 막 도착했사옵니다.”
“그래, 어서 들라 해라!”
연비는 성큼 성큼 사랑방 앞으로 다가갔다.
평소에는 으레 아랫목에 누워있던 연태조였는데,
오늘은 보료 위에 앉아있는 거여서 연비는 내심 흐뭇했다.
연비는 귀인모와 대검을 떼어 윗목에 놓고 정중히 절을 올렸다.
“소장, 대감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 그간 강녕하시었는지요?”
연태조도 연비를 보자 얼굴에 화색이 만면해지며
입에선 은근한 말투가 나왔다.
“허허, 반갑네 이 사람, 내 자네를 무척 기다렸다네.”
“너무 늦게 뵙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연태조는 백발성성한 수염을 내리쓸고 있었다.
“그동안 산성에는 별고 없었는가?”
“예, 그러하옵니다.”
“내 오늘 자네를 급히 오라 한 것은
우리 개소문 소식을 알았기 때문일세. 그래서 자네를 불렀다네.”
칠순을 바라보는 노구에선 그의 화려했던 옛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었지만,
사람을 누르는 위엄은 여전하였다.
붉은 얼굴의 눈매에서는 아직도 광채가 어리었다.
요즘 들어 부쩍 수척해진 까닭은 단지
아들 개소문 걱정 때문일 것이었다.
‘대고구려의 실권을 한손에 움켜쥐고 천하를 호령하며
천군만마를 질타하시던 총관님…….’
연비는 가슴이 찌릿하였다.
“대감, 개소문 도령이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연비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재촉하듯 물었다.
“자넨 그동안 우리 개소문을 찾아보려고 많은 고생을 했네만,
또 한 번 수고해주게나. 이번만은 틀림없을 성싶네.”
“대감, 저야 무슨 한 일이 있사옵니까?
하오니, 도령님 있는 곳이나 하교해주십시오.
즉시 가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다급히 서두는 연비의 태도에 연태조는 빙긋이 웃음을 머금고
탁자 위에 놓인 서찰봉투를 내밀었다.
연비는 서찰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서는 마치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흥분하였다.
“대감, 지금 곧 떠나겠습니다.”
“고맙네그려! 하지만 이렇게 조급하게 떠날 것이 아니라,
오늘은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내일 아침 일찍 길을 떠나도록 하게.”
“하오나 한시가 여삼추입니다.
이 서찰로 보면, 개소문 도령은 적지 신라 땅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일각이라도 지체할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지요?”
“하하하하! 됐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만도 크게 마음 놓이는 일…….”
호탕한 웃음 저편에 언뜻 그리움의 실체가 꿈틀거리며
말꼬리를 집어삼키더니
기어이 얼굴이 창백해지며 주름살이 파르르 떨렸다.
연비 장군은 또 한 번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를 읽었다.
-예맥 땅 임둔 지선사(誌璇寺)-
다음날 아침, 연비는 일찍 일어나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연 총관 댁 심복인 상노 바우를 비롯하여 10여명의 졸개를 변장시키고
길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러고 연비는 사랑채로 하직인사를 갔다.
“대감, 소장 지금 떠나겠습니다.”
“아하, 지금 떠나려는가? 자아, 이 노자를 받아가게나.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터이니, 부디 조심하여 무사히 성사하길
빌고 있겠네.”
“예에, 대감 분부를 명심하여 봉행하겠사옵니다.”
하직인사를 마친 연비는 드디어 떠나기 시작했다.
변장한 군졸들과 함께 남쪽의 국경지대를 향해 길을 재촉한 것이었다.
치악산 상봉 동쪽에 높이 솟은 바위 뒤로,
사월의 긴 하루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난날엔 대고구려의 평원(平原) 고을이었던 신라 땅.
이곳은 옛적 예맥국 천년 왕조의 흥망성쇠를 고이 간직한
유서 깊은 도읍지였다.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평원 땅을, 지선마을을,
방금 솟은 태양이 환히 비춰주고 있었다.
마을 중앙에 유난히 큰 기와집 한 채가 우뚝 솟아있었다.
바로 공대인(公大人) 댁이었다.
주인 공대인은 본래 고구려의 벼슬아치였으나,
고을이 신라 땅으로 변하자 이름을 바꾸고
이 깊은 산골에서 숨어 살게 된 것이었다.
해와 달을 나란히 그린 솟을대문은 아침부터 활짝 열려있었다.
해가 하늘 복판에 떴는데도 공대인 댁에는 아무도 출입하는 자가 없더니,
오로지 한 여인이 총총걸음으로 솟을대문 문턱을 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솔잎에 싸고 볏짚으로 동여맨 누치* 열두 마리가
소중하게 들려 있었는데,
그녀가 중문으로 들어서자 여종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오며
수선을 피웠다.
“아이쿠, 유모님! 어서 오시어유!
안 그래도 우리 유모님 이야길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래, 대감마님과 안방마님께선 평안들 하시냐?”
“그럼은입쇼. 쇤네도 이렇게 무사무탈하구유!”
유모가 그녀에게 눈을 흘겼다.
“자넨 아직도 그 느물거리는 버릇, 못 고쳤구나?”
그러면서 유모가 들고 온 꾸러미를 건네주자,
여종은 물고기 꾸러미를 들여다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나, 이 누치가 아직도 살아서 꼬리를 치고 있네유!”
“호오 그러냐? 자네가 반가운가 보네! 이 누치,
대감마님께 찬으로 올리게.”
“예에, 마침 오늘 아침부터 마님께서 누치를 잡숫고 싶다고 그러셨는데,
참 잘됐네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맞은편 별당에 있던 공대인의 막내딸 하란이 달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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