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5화]도령을 찾아서 [3]
“유모, 어서 오시와요. 안 그래도 유모 기다리느라 눈이 빠질 뻔했어요.”
“아가씨, 그 동안 잘 있었수?”
“호호 유모, 잘 있었고말고요.
어머니껜 나중에 들르시고 먼저 내 방부터 가요, 녜?”
하란의 고운 손이 유모의 치마꼬리를 잡고 이끌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우리 애기씨가 또 무슨 이야길 하시려구 이러실까?”
앞서서 종종걸음 치는 하란의 가녀린 허리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유모는 시름에 잠겼다.
‘귀인댁 막내딸로 태어난 몸이 하필이면 상노를 사랑하여
저리도 애를 태우는구나……’
하란의 얼굴이 전에 없이 수척해진 것 같았다.
해쓱한 하란의 얼굴을 보면서 유모는 더욱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하란은 제 방에 들어와서도 행여나 누가 볼세라
발을 드리운 다음에야 유모와 마주앉아
두 손으로 유모의 한 손을 잡고는 작은 목소리로 도란거렸다.
“유모, 그동안 개동이를 얼마나 찾았던지 몰라요.
대체 어디에 가서 나무를 하는지,
온 산을 다 헤매어도 보이질 않아요, 어디 가서 찾죠?”
“뭐라구유? 애기씨가 험한 산길을 헤맸다구요?”
“아유, 유모…… 구릉산, 백운산, 거슬암산, 동서남북,
산이란 산은 다 가봤어요.”
유모는 혀를 찼다.
“하이고 하란 애기씨, 그러다 큰 변을 당하면 어쩌려구……
남정네들도 꺼리는 험준한 산엘 혼자 다니다 무슨 봉변을 당하시려구
……”
“하지만 유모, 나는 기어이 개동이 정체를 꼭 알아야겠어!”
하란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드러나고 있었다.
하란을 맡아 길렀던 유모는 누구보다도 하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개동이라는 나무하는 상노를 연모하기 시작할 때부터 유모는
누차 말렸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타오르는 게 사랑이라는 괴물이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아는 유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유모가 하란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은
유난히 하늘이 맑던 이른 봄이었다.
그날 유모는 하란과 함께 빨래터에 가려고
우연히 개동이의 옷 보퉁이를 풀어헤치게 되었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동이의 옷에 군데군데 묻어있는 핏자국.
장수들이나 가질 수 있는 요도(허리에 차는 칼).
“에그머니나!”
유모는 순간적으로 느낀 바를 말했다.
“개동이는 혹, 어디서 사람을 죽인 도적……그런성싶은데?”
그 순간 하란의 얼굴이 핏기를 잃었다.
너무 끔찍했다. 그녀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개동이가, 개동이가……그럴 리가 없어……”
유모는 하란의 반응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 아기씨! 왜 그러셔요?”
하란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진 거였다.
유모는 몹시 당황하여 하란을 껴안고 급히 그녀의 방에다 눕혔다.
‘아니야, 개동이가 그럴 리 없어……’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하란이 긴 속눈썹 가닥 가닥에
이슬을 매단 채로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자기를 근심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는 유모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유모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란의 맑은 눈동자가 그녀를 울린 거였다.
‘아니야, 잘못 본 거야……’
하란은 유모의 말을 부인하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혹을 좀처럼 떨칠 수가 없었다.
‘상노 신분에 어찌 허리칼을 지닐 수가 있으며,
그 수많은 핏자국은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그의 옷에 묻은 핏자국은 십중팔구 남의 피일 것이고······’
더더욱 유모의 말이 그럴싸하게 다가왔다.
“아아······.”
파리해진 하란의 입술에선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입술은 괴로움에 못 이겨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날 밤, 하란은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만가지 상념으로 뒤범벅이 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당장 날벼락이 떨어질 텐데······.’
한시바삐 개동이의 정체를 파악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그녀를 안타깝게 했다.
‘개동이는 절대로 흉악한 도적일 수 없어······.’
궁리 끝에, 그녀는 개동이의 뒤를 밟기로 작정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간편한 옷차림을 한 하란은
개동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소에 여물을 먹이고 난 개동이가 지게를 지고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냥 나무하러 가는 게지?’
그러면서 하란은 조심조심 개동이를 뒤쫓아 갔다.
그는 어느새 동구 밖을 벗어나고 있었는데,
발걸음이 어찌나 빨랐던지 하란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새 그만 놓치고 만 것이었다.
“유모, 나 어떡하면 좋아?”
유모가 하란의 얼굴을 측은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쯧쯧쯧······, 고운 얼굴에 그늘이 한 가득이네.’
하란이 얼마나 괴로웠던지는 그녀의 초췌해진 얼굴이 잘 말해주고 있었다.
“아이고 아가씨, 어쩌자고 거길 갔었어요?
전에도 치악산에선 웬 도적놈이 사람을 둘씩이나 죽였다던데······.”
하란의 얼굴이 금세 탈색되었다.
“설마 개동이가 그 도적은 아니겠지요?”
“아가씨, 설마가 사람 잡는단 말, 못 들어보신 거유?”
“······”
바작바작 타는 가슴을 안고, 하란은 살래살래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개동이가 아닐 거야······. 절대로 아니야······.’
돌이질 칠수록 조바심이 나서,
그녀는 무슨 말이든 해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모, 내일은 치악산으로나 가봐야겠어.”
“아이고 아가씨! 치악산엔 산성이 있어서 병정들이 우글거릴 턴디,
감히 개동이가 상노 처지에 어떻게 올라갔을라고요.”
“아깐 개동이가 치악산에서 사람 죽인 그 도적일지도 모른다고 하더니?
말이 앞뒤가 다르잖아요?”
“오메?”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알아차린 유모가 입을 가리는 것을 유심히 보며,
하란은 한참 만에 유모의 귀에 속삭였다.
“유모, 나, 내일 또 변장을 하고 산에 올라가야겠어. 뒷일을 부탁해······.”
“허걱! 뭐라구윳? 치악산엘 간다구윳?”
“쉿!”
유모가 펄쩍 뛰거나 말거나, 하란은 손가락으로 유모의 입을 막았다.
다음날 이른 아침, 하란은 간단한 차림에 나물바구니 하나만 달랑 메고서
날렵하게 대문을 나섰다.
곱디곱게 자라온 규중처녀의 몸으로 반나절이나 걷게 되자,
하란의 몸은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까스로 걸음을 재촉하여 기어이 치악산 기슭에 이르렀고,
그제야 바위 하나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아픈 다리를 톡톡 두들기면서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비로봉과 삼봉(三峰), 남대봉(南臺峰) 등의 높고 낮은 여러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었다.
어떤 산봉우리는 흰 구름을 허리에 휘감고는 하늘을 찌르는 모양새였고,
저 앞에서 비로봉은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산 중턱에 석축으로 쌓아올린 웅장한 산성이 햇살을 받아 빛났다.
이름 모를 새들이 가지각색의 기화요초들 사이에 숨은 채 지절거렸고,
아름드리나무들은 하늘을 덮을 듯이 들어차서는 산의 위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유모의 말대로 병사들이 궁술이나 창검술을 익히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어느덧 하란은 치악산 상봉의 커다란 바위에까지 올라갔다.
“희유우!”
이 바위에는 신선들이 하강해서 놀았다는 전설이 있었지만,
규중처녀인 그녀로선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커다란 평상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을 턱에 받치고
산 아래를 굽어볼 뿐이었다.
험준한 벼랑을 타고 쏟아져 내린 물이 기암절벽의 가시밭길도 마다않고
거침없이 곤두박질 치며 이판사판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여러 곳에서 샘솟은 물이 뒤섞여 한 줄기의 띠를 이뤄 산허리를 쿡쿡 지르며
청아한 노랫가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애탄 눈길로 찾는 개동이의 모습은 그림자조차도 보이질 않는 거였다.
‘오늘도 헛수고인 거야? 아아, 개동아, 어디 있어? ······’
그녀는 자신의 한계에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발딱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서운한 마음과 더불어 크게, 아주 크게 소리쳤다.
“개동아! ······ 개동아!”
터질 것만 같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마주보이는 절벽을 치고 한 바퀴 맴돌아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올 뿐이었다.
무시무시한 외로움이 그녀를 엄습했다.
바로 그때였다.
마치 그녀의 부르는 소리를 듣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따가닥, 따가닥, 말을 달려오는 한 장수가 있었다.
그의 모습을 확연히는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늠름한 장수임에 틀림없었다.
어깨에는 커다란 활을 메었고 왼손에는 긴 창을 비껴들고 오른손으론
말고삐를 잡고 달려오는 그의 모습엔 늠름한 대장부의 기상이
서슬 퍼렇게 어려 있었다.
계곡에 흐르는 개울을 사뿐히 뛰어넘은 그는 달리던 말에서 훌쩍
뛰어내림과 동시에 노송의 나뭇가지를 잡았다.
그리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새처럼 옮겨 다니며 뭔가를 살폈고,
또 다시 말 등에 올라 날렵하게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장수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져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될락 말락 할 즈음, 하란은 그만 소스라치고 말았다.
“흡! 개동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장수의 얼굴과 몸은 개동이와 아무래도 쌍둥이처럼 닮은 거였다.
‘개동아, 나야. 하란이야······ 아아, 나를 못 본 거야?’
그런데 하란이 넋을 놓고 바라보는 동안,
산성에 당도한 듯싶던 장수가 별안간 말머리를 돌리더니
큰 바위 쪽으로 오고 있었다.
하란은 화들짝 놀라 바위 틈새로 몸을 숨겼으나
그 즉시 속절없이 들키고 말았다.
장수는 그녀를 보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렸고, 하란을 알아보았다.
“아니, 하란아가씨 아니시오?”
하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서는 멀뚱히 섰다.
몸이 얼어붙은 것만 같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자신의 눈도 믿을 수가 없었고, 귀도 믿어지질 않았다. 꿈만 같았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장수는 개동이가 분명했다.
“하란 아가씨, 아가씨가 어떻게 여길······?”
“······”
“별안간 이런 모습을 보시게 되어 쑥스럽습니다만,
그러나 아씨, 놀라지 마십시오.”
하란은 그저 가슴이 먹먹할 뿐이었다.
알지 못할 희열이 그녀의 몸을 나른하게 감쌌다.
뺨은 살포시 달아올랐고, 유달리 커다란 눈,
그 속눈썹엔 송알송알 이슬이 매달리고 있었다.
“개동아. 아아, 세상에, 개동이가 장수님이었다니······”
그녀는 이윽고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는 그녀의 조그마한 어깨가 물결치듯 출렁였다.
주체할 수 없는 격정. 개동이는 우두커니 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서서히 불타는 것 같았다.
“하란 아가씨!”
기어이 하란을 와락 품었지만, 개동은 그 이상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억센 두 팔로 힘껏, 더 힘껏 껴안았을 뿐이었다.
그의 품안에서 화란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개동이를 만나기만 하면 쌓였던 정회를 한꺼번에 풀리라고 마음먹었던
하란이었지만, 막상 그의 품에 안기고 보니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가슴만 팔딱이고 있을 뿐이었다.
팔딱이는 가슴이 그대로 개동이에게 전해지자,
향긋한 그녀의 체취가 개동이의 거친 숨결을 자극하였다.
으스러지게 그러안은 두 사람의 가슴엔 불이 일고 있었다.
어느덧 서녘의 산마루에 기우는 햇살이 두 사람을 따사로이 감싸 돌았다.
“하란 아가씨, 이제 돌아갈 시간이오.”
굵직하고 부드러운 개동이의 목소리가 하란의 귀에
말할 수 없는 황홀감으로 스며들었다.
윤기 반지레한 그녀의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것을 보다가,
개동이는 덥석 하란을 오른팔로 껴안고서 날렵하게 말에 올랐다.
그의 말 '비호'는 쏜살같이 산비탈 길을 달렸다.
얼마 후, 계곡으로 들어가자 허름한 산채가 나타났고,
개동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란이 잠시 주위를 살피고 있는 동안
어느새 상노복장으로 변신한 개동이가 집채 같은 나뭇짐을 지고 나왔다.
그리고 하란의 앞에다 지게를 내려놓았다.
“자아, 아가씨, 여기 나뭇짐 위에 올라앉으시오.”
“어머나?”
하란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살래살래 머리를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개동이 ······ 아니 도련님은 나뭇짐 지시기만 해도 버거우실 텐데,
어찌 소녀까지······? 싫사와요!”
개동은 난처한 표정을 감추질 못하고 채근했다.
“아가씨! 아직 갈 길이 멀었는데,
아가씨가 나뭇짐 위에 앉지 않고서 어떻게 나를 따라 오실 수가 있겠소?
괜히 그러지 마시고 얼른 올라앉으시오!”
그래도 하란이 몇 걸음 더 물러나며 머리만 세차게 흔들자,
개동이는 싱긋이 웃었다.
그리고 하란을 번쩍 들어서는 냉큼 나뭇짐 위에다 올려놓았다.
그 위엔 뜻밖에도 사람이 앉기에 알맞도록
푹신푹신한 자리까지 마련돼 있었다.
하란이 안정감 있게 앉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뭇짐을 거뜬히 짊어진 개동이는 성큼성큼
빠르게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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