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

新연개소문전 -도령을 찾아서4 (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9. 20. 22:11


연개소문 이야기 [6화]도령을 찾아서 [4]




◇◇◇ 

 
개동이가 나뭇짐을 지고 산을 내려오고 있을 무렵,

구릉산 동녘에 자리 잡은 지선사 본당의 드높은 기왓골엔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오의 정적을 고즈넉하게 드리운 지선사 후원.

별당 밀실에서는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 분명히 우리 도련님을 보셨다고 그러셨죠?”


“허허 참, 성미도 급하시오……



노승의 눈은 다시 잠잠하게 감겨졌다.


“스님, 정말이지요? 우리 도련님 계신 곳을 아시지요?”


허엄!”


그제야 눈을 번쩍 뜬 노승은 천천히 염주를 헤아리며 말을 이었다.

 

“개소문 도령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약 한 달 되었는데

……그새 어디 다른 데로 옮기진 않았을 거요.”



“우리 대감께오선 스님께서 주신 전갈이라 틀림없다 하시고 소인을

보내신 것이옵니다. 스님께서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소식을 보내주신 은공, 참으로 크옵니다.”

“허, 별 말씀을....... 어쨌거나 당장은 실망하실 터…….”

“실망할 것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오니까?”

연비는 성철 스님의 말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이 맹랑하게 되었소.”

“예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니까?”

칠순 넘은 노승 성철은 단정한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 모습에서 범할 수 없는 도력이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연비는 가슴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연비를 비롯한 10여명의 군졸이 농사꾼 차림으로 변장하고

평원 땅에 도착한 것은 그들이 고구려 연태조의 집에서 출발한지

근 열흘만이었다.

일행이 구릉산 동녘 지선사에 이르렀을 땐 이미 한낮이 기울기 시작한

무렵이었지만,

사월 하순의 따가운 햇볕은 여전하였다.
연비의 얼굴에선 줄줄이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10여명의 군졸들도 기운이 쪽 빠져보였다.


한 열흘 잔뜩 긴장했던 마음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일시에 마음을 놓은 까닭이었다.
군졸들을 지선사 언저리에 대기시켜 놓은 연비는

바우만 대동하고서 사찰 경내로 들어섰었다.  


“지금 개소문 도령은……

요 아랫마을에서 상노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만한 정보야 이미 알고 든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노승의 입에서 그것이 기정사실이라고 못 박고 나오니

연비는 울화가 불끈 치밀었다.

“뭐라구욧! 그게 그럼 정말이었단 말씀이요?

개소문 도령이 상노의 몸으로 팔려가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오?”

연비는 부르르 치를 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이 저절로 허리의 칼집을 움켜쥐었다.

쉰을 넘긴 나이지만 팔팔한 무인의 혈기가 울뚝불뚝 우러나오고 있었다. 
노승은 지그시 웃음을 문 채로 연비를 올려다보았다.

“허어, 장군, 공연히 흥분하지 마시오.

매사 침착하게 처리해야 하거늘…….”

연비는 갑자기 부끄러웠다.

“아하, 소인이 그만……. 용서하시오.” 


일이 있어 아랫마을에 들렀던 노승 성철은 우연히

도사 을지문덕을 보았었다.

살수대전에서의 명장이었던 문덕도사는 한 때

귀신을 부린다는 둥 호랑이를 여러 마리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둥

수수께끼 같은 소문을 한 몸에 지닌 인물이었다.

노승도 평양성에서 몇 번 봐서 얼굴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문덕도사가 연태조의 외아들 개소문을 유인해낸 이후

10년이 되도록 행방불명 상태여서 연태조의 온 가족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때마침 저녁 무렵이었다.

문덕도사가 앳된 청년에게 산더미 같은 나뭇짐을 지워서는

공대인 집으로 들어가는 참이었다.

청년의 차림새가 여느 상노의 모습 그대로 남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얼굴엔 범상치 않은 기품이 서려있었다.

훤한 이마, 우뚝한 콧날, 번쩍이는 눈빛,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훤칠한 키까지, 흡사 연태조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었다.
그들이 공대인 집으로 들어서는 것을 똑똑하게 확인하고

몸을 돌리려던 노인은 대문 밖으로 나오는 한 처녀와 맞닥뜨렸다.

“낭자, 말씀 좀 묻겠습니다.”

노승이 두 손을 합장하고서 처녀에게 머리를 숙이자,

처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들어가신 도사는 스치고 보니 소승과 죽마고우인

문덕도사올시다. 그런데 이 댁에 무슨 일로 들어가는지,

또 함께 들어간 청년은 누구인지 몹시 알고 싶소. 알려 주시겠소?”

“어머나 그러세요?”

처녀는 아주 자세히 대답해주었다.

“문덕도사님은 우리 주인댁의 먼 친척 되시는 분이랍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도사님이 데려온 상노이구요.”   

“하아, 무슨 곡절이 있으렷다.”

노승은 혼잣말을 하였다.
그리고 지선사로 돌아온 노승은 비밀리에 사람을 불러

고구려 평양성으로 심부름을 보냈던 것이었다.

“장군, 내 안내할 터이니 어서 갑시다.

일각을 지체할 수 없는 법…….”

“스님, 송구합니다. 폐를 많이 끼치는군요.”

“아니오. 그런 말씀은 거두시오.

인연 닿는 대로 움직임이 불가의 도리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변장 군졸 10여명은

연비 장군이 나오자마자 날랜 동작으로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일행은 공대인 집 대문 밖에 다다랐다.
연비가 군졸들에게 세세히 지시하였다.


“너희 네 명은 이 바깥에서 파수를 보거라.

무슨 이상한 낌새가 보이거든 즉각 안에 알려야 하느니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주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도록! 알겠느냐?”

“예 이~”

분부를 받잡은 군졸들이 제각기 흩어지자,

연비가 노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스님, 어떻게 할까요?”


한참 궁리 끝에 노승이 입을 열었다.


“소승이 시주 온 것인 양 목탁을 두드릴 터이니

장군은 몸을 숨기고 기다리시오.”


“예, 그것이 좋겠습니다.”


노승이 눈을 지그시 감고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시작하자,

젊은 계집종 하나가 바가지에 쌀을 담아가지고 나왔다.


“스님, 약소하지만 이것을 받아가세요.”


노승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니다. 나는 시주를 청하러 온 것이 아니니라,

사실은 이 집 주인어른을 뵈러 온 것이니라.

들어가서 그리 아뢰어라.”


계집종이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쪼르르 달려 들어갔고,

잠시 후, 젊은 낭자가 나왔다.


“스님, 송구하오나 저희 부친께서는 출타 중이시라

지금 집에는 아니 계시온데…….”


‘오히려 잘 됐구나.’


노승은 주인을 만나 이러쿵저러쿵 절차를 밟는 것보다는

곧장 문덕도사를 만나는 것이 시간 절약도 되겠다는 착안에 이르렀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낭자, 죄송하오만

소승이 댁의 어르신을 만나 뵈려고 하는 까닭은 사실,

댁에 계시는 도인과 상노로 있다는 청년을 만나기 위해서라오.”


“어머머, 별…….”


낭자는 금세 아니꼽다는 얼굴로 변해서 종알거렸다.


“난 또, 우리 아버님을 뵈러 오신 줄 알았는데,

고작 상노를 보자면서 무엄하게시리 주인을 찾는담…….”


낭자는 뒤도 돌아보질 않고 종종걸음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런 고약한 계집 같으니!”


노승의 등 뒤에 선 채 이 꼴을 본 연비가

오만상을 찌푸리자 노승이 말렸다.


“허허, 장군, 고정하시오. 고작 철없는 중생인 것을……”


노승이 다시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좀처럼 인기척이 없었다.
오로지 목탁소리만이 울려 퍼질 따름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노승의 뒤에 선 채로, 연비는 초조함을 감추질 못했다.
성질 같아선 한 발로 대문을 팍 걷어차고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꾹꾹 눌러 참았다.

자칫 경거망동했다간 개소문 도령께

폐가 될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참기를 잘했다.
다시 자박자박 발짝 소리가 나더니 빠끔 대문이 열린 것이었다.

“스님, 저를 따라 오세요.”

좀 전의 그 계집종이 얼굴을 쑥 내밀고는 퉁명스레 내뱉었다.
노승이 묵묵히 계집종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자,

연비와 바우도 성큼성큼 노승의 뒤를 따랐다.

중문을 지나서 들어간 계집종은 이윽고 후원 옆에

동그마니 서 있는 방을 가리키고는 황급히 달아났다.

계집종이 가리킨 방. 상노의 방 치고는 꽤 조용하고 깨끗하였다.
창문들이 훨쩍 열려있어서 안이 환히 들여다 보였는데,

아랫목에 한 늙은이가 목침을 베고 누워있었다.

연비는 그가 바로 왕년의 을지문덕 장군임을 알아차렸다.

‘흥, 뻐기는 거야?’

성질 같아선 당장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만 싶었다.

하지만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일도 아니라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딱, 딱, 탕그르르…… 딱, 따닥, 따닥, 떼그르르…….

노승은 또 다시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꽤나 시끄러울 텐데도,

도사는 방안에 누운 채 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연비의 불쾌지수는 가히 도를 넘고 있었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바우 역시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기어이 노승을 제치고 쓱 나서며 소리를 빽 질렀다.

“여보쇼, 도사 영감!”

하지만 방안에선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도사 영감!”

바우의 목소리가 귀청을 뚫을 것만 같이 컸지만

방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도사 영감! 얼른 일어나 보슈!”

그제야 아주 조금 반응이 있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도사가 ‘나 안 죽었어!’ 하는 듯이

끄응, 하고 몸을 뒤척여

다시 돌아 누워버리는 거였고, 그뿐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바우가 아니었다.

문턱 안으로 성큼 발 한 짝을 들여놓은 바우는

몸을 한껏 디밀고서 젖 먹던 힘까지 죄 동원하여,

목청이 찢어져라하고 소리쳤다.

“도사! 아, 도사! 도! 사! 영! 감!”

그제야 문덕도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마치 자기를 깨우는 고함소리를 처음 들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살짝 실눈을 떴다.

“아함! 한 숨 자알 잤군!”

도사는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하다말고 힐끔 문 밖을 살피는 척했다.

“어인 손님들이신가?”

나지막한 목소리이긴 했지만 찌르는 듯 강렬한 눈빛이었다.

예리한 칼날이 쑥 하고 몸을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움찔한 바우는 몸을 다시 바로 세웠다.

내친 김에 들여놓았던 발마저도 슬그머니 뺐다.
바우에게서 노승에게로 갔다가 곧 연비에게로 옮기는 도사의 눈길은

은밀히 시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파밧! 파바밧!…….

의혹에 가득 찬 그 눈초리가 석 달 열흘 갈아댄 칼날처럼

허공을 찔러댔다. 
그 눈길을 의식했는지 어쨌는지,

노승은 그저 평온한 태도로 목탁 두드리던 손길을 멈췄다.

그리고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소승 문안드리오.”

“스님이 내게 무슨 볼일이시오?”

“소승, 지선사에 있는 승려 성철이온데, 장군님…….”

도사의 얼굴이 갑자기 침울해지는 것을 알아챈 노승을 얼른 말을 바꿨다.

“아니 문덕도사님을 뵙고자 왔습니다.”

“오호, 그렇소이까? 내가 바로 문덕이오.

무슨 일이신지, 어서 방으로 올라들 오시지요.”

노승과 연비는 그제야 문덕도사 앞에 좌정할 수가 있었다.
바우는 차마 방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문밖에서만 쭈뼛거렸지만,

온 신경을 안에다 쏟고 있었다.

 
“이렇게 번거롭게 해드려 송구하외다. 실은…….”

노승의 정중한 목소리를 뒷전으로 하고서

도사는 꼿꼿이 앉아 눈을 감았다.

노승 역시 그런 도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연비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초조한 심정을 간신히 다스리고 있었다.

오랜 수도생활로 정화된 노승의 태도는 근엄하였다.

30만 명에 육박하는 수나라 군사를 섬멸하였었던,

그 어마어마한 살생의 업보를 고스란히 안고 홀연히 사라졌었던

도사의 얼굴 역시 화평하고 태연스러웠다.


‘뭔가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게 된 연비는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도대체 이러한 침묵은 성미가 불같은 그로선 고문에 가까웠다.
꼼짝도 아니한 채로 눈을 감고 있던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눈을 떴다.


두 눈길이 서로 맞부딪힌 그 사이엔

비수의 날과도 같은 광선이 바지직 타올랐다.

그 상태로 또 긴 시간이 흘러갔고,

드디어 노승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한 웃음을 깨물었다.

도사도 덩달아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노승이 연비의 등을 가볍게 치며 입을 열었다.


“도사님, 바로 이 분이 고구려 연태조 대인의 족문인 연 장군이오.”


“예, 소장, 연비입니다.”


연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절을 하자,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문덕도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장군이 바로 연비 장군이었구려!

내가 문덕이라오! 그런데 어인 일로?”



                                        주영숙의 동양자수 작품/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