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7화]도령을 찾아서 [5]
“도사님……. 느닷없이 찾아뵙게 되어 송구하옵니다.
우리 대감께서 개소문 도령님을 찾아뵈라고 분부를 내리셨기에
이렇게 찾아왔사온데…….”
연비는 긴장의 끈을 바짝 당겨 감추고는 도사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도사는 추호의 움직임도 없이 태연자약하였다.
‘으이구, 갑갑해…….’
연비의 입에서는 금시라도 고함소리가 터져 나올 듯,
손은 옆구리에 찬 칼자루를 굳게 잡았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본 노승은 아차하면 큰 일 그르치겠다 싶어서
얼른 입을 열었다.
“모든 것 인연을 따라 행하는 법…….”
가늘게 뜬 도사의 눈. 그 눈에서 새어나온 빛살이
강렬하게 연비의 눈을 찔렀다.
“길이 한 갈래만 있는 것은 아닐 터…….”
도사가 노승의 말을 맞받아 중얼거렸다.
연비는 그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도사의 태도에서 말할 수 없는 위엄을 느꼈고,
짐짓 사기가 꺾였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도사는 다만 입을 굳게 다문 채
조용히 몸을 옆으로 흔들며 앉아있을 뿐이었으나,
방안엔 흡사 요기 같은 고요가 굼실굼실 흐르고 있었다.
문 밖에서 안을 기웃거리고 있던 바우는
안의 공기가 너무 조용하여 부쩍 의구심이 들었다.
도사를 만나면 당장 요절을 낼 것이라고 벼르던 연비장군이었는데,
그저 끽소리 없이 앉아만 있다니, 요지경속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다급한 일은 바로 개소문 도령의 행방을 찾는 일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뭐 하자는 짓거리인지 눈싸움만 계속하고 있다니…….
바우는 안달이 났다.
“여보쇼 도사님! 우리 도령님은 지금 어디 계시오?”
참다못한 바우가 흥분에 못 이겨 부르르 떨면서
버럭 소리를 지른 거였다.
그의 목소리가 방안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노승과 도사와 연비, 세 사람은 동시에 바우를 쏘아보았다.
안 그래도 묘한 도사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던 판인 연비는
발칵 속이 뒤틀려 폭발했다.
“이놈 바우야! 네 어찌 나서서 망발이냐? 가만있지 못할까?”
자못 노기를 띤 목소리였다.
“어구우, 장군님도! 죽치고 가만있기만 하시면
일이 저절로 술술 풀린답니까?”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없는 바우의 서슬에 힘을 받은 연비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도사에게 채근했다.
“도사님, 우리 개소문 도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제야 한참 뜸을 들인 도사가 입을 열었다.
“개소문은 분명히 이곳에 있으니 안심들 하시오.”
그러고 또 다시 입을 다문 도사.
가늘게 들어 올렸던 눈꺼풀마저 스윽 내려버렸다.
가라앉았던 울화가 다시 치밀어 오른 연비의 손이
저절로 허리칼로 가고 있었다.
“장군! 경거망동 하시려오?”
노승이 나지막한 소리로 이죽거렸고,
때마침 도사가 다시 눈을 뜨는데,
그의 눈에서 뻗치는 광채가 온 방안을 위압했다.
“자아, 일어섭시다. 개소문 도령을 만나야지요.”
도사는 풀쩍 몸을 일으키더니 횅하니 먼저 걸어 나갔다.
연비와 노승도 그 뒤를 부랴부랴 따라나섰다.
‘저자가 정말 왕년의 을지문덕 장군이란 말인가?
동명이인? 혹 자기 죄를 숨기느라고 신라군에게 우리 정체를
고발하려는 거야?……
개소문 도령이 정말로 이 신라 땅에 건재하시기나 한 거야?
도대체 우릴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비의 머리를 쑤석거렸다.
‘앗! 까딱하다간 놓치겠군!’
더 이상 의혹의 요모조모를 가늠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허겁지겁 달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도사의 걸음걸이는 너무나 빨라서 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혀를 빼물고 달음박질을 쳐야만 겨우
따라잡을까 말까 하였다.
사실은 도사의 모습이 보였다 싶으면 금방 사라지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저 앞에 도사의 모습이 보이고,
도사는 그렇게 길을 잃을만하며 불쑥 이정표처럼 나타나곤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윽고 나지막한 산마루에 도사가 섰고,
뒤따르던 사람들도 허겁지겁 따라잡아 웅기중기 섰다.
10리 길은 족히 온 모양이었다.
도사는 이리저리 사방팔방을 휘돌아보고는
널찍한 바위를 찾아 걸터앉았다.
신선들이 하강하여 놀았다는 커다란 평상바위였다.
전직 전쟁영웅 문덕도사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도 이리 와서 좀 쉬시지요.”
그러면서 도사의 눈은 저 멀리 저물어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낮의 햇볕을 받아서인지 바위는 온돌처럼 따뜻했고,
눈앞에 첩첩이 솟아있는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로는
노을이 얼비쳐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대자연이 붓질한 작품 앞에서
저마다 숙연해지는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그들은 우선 산이 주는 선물인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시고 있었다.
연비의 속에선 또다시 불안한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니 도사님! 도대체 우리 도령님이 여기 어디 있다는 말씀이오?
도대체 어쩌자고 우릴 이 무인지경에까지 데려오신 겁니까?”
“도사 영감, 만일 오늘 해 안으로 우리 도령님을 찾아내지 못하시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네 이놈 바우야!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연비장군의 공박에 바우도 합세를 하자
연비장군은 오히려 바우에게로 말 화살을 쏘아댄 것이었다.
그때였다.
물끄러미 한 곳을 주시하던 도사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핫! 아하하핫!”
그의 웃음소리는 조용한 산중에
여러 겹의 메아리를 만들며 울려 퍼졌다.
표정이 그럴 수 없이 맑아지는가 싶던 도사가 불현 듯
건너편 계곡에 눈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연비도 노승도 바우도 모두 도사의 시선이 가 닿는 곳을
어림하여 지켜보았다.
“도대체 무얼 보고 그리 웃으셨소?”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연비에겐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스님, 도대체 저 도사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이오?”
노승은 손에 쥐었던 염주를 따글, 따그락, 굴리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염주를 쥐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계곡을 가리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필시, 저 계곡에서 나뭇짐을 지고 오는 초동을 보고 있는 모양이오.”
연비는 노승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뭔가 움직이고 있었다.
집채같이 높은 나뭇짐을 진 초동의 모습이 가물거린 거였다.
짐을 진 초동의 걸음걸이가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산모롱이를 돌아
경사진 비탈길을 올라오고 있는 것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초동이 거의 산마루에 올라왔을 때쯤에야
그가 바로 더벅머리 총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초동이 가까이 올수록 도사의 표정도 엄숙해지고 있었다.
어?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초동, 아니 더벅머리 총각의 나뭇짐 위에는
마치 꽃다발처럼 한 처녀가 앉아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벅머리 총각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뚜벅뚜벅 올라오고 있었다.
도사 앞에 이르른 총각이 나뭇짐을 진 채 고개를 숙였다.
“사부님, 어쩐 걸음이신지요?”
천천히 나뭇짐을 내려놓은 그는 작대기로 지게를 받쳤다.
그리고 나뭇짐 위의 처녀를 냉큼 안아서는 조심스레 땅에다 내려놓았다.
그러자 처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뒷걸음질을 하더니
이내 비탈길로 뛰어가서는 총총걸음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거였다.
‘허어, 공대인댁 막내딸이군.’
하란의 뒤태를 지켜보던 도사는 잠시 그녀의 미래를 떠올리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개동이, 아니 개소문이 안절부절못하는데
연비는 탄식조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허어, 해괴한 일이로다.”
땀을 닦는 개소문의 얼굴에 저녁놀이 내리자
그의 두 눈이 놀을 받아들여 광채를 발했다.
개소문이 눈을 껌뻑거리며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사람들의 눈들이 죄 그에게로 쏠렸다.
아무리 보아도 서로 모르는 얼굴이었다.
연비는 연태조의 가까운 일족이기는 했지만
일개 산성의 별장으로써 개소문이 어릴 적 얼굴을 알 까닭이 없었다.
바우 역시 연태조 댁 상노이기는 하나
개소문이 문덕도사를 따라 떠난 뒤에 들어왔었다. 하지만
개소문의 얼굴과 모습이 연태조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은 받았다.
“개소문아!”
마침 도사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예, 사부님!”
“이 분이 바로 네 부친께서 보내신 족문의 장군이시다.”
“예에?”
“소장 연비입니다.”
연비는 정중하고도 침착한 태도로 연개소문에게 다가섰다.
“개소문 도령님,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시었소?”
“…….”
개소문은 한참 만에 연비가 쥔 손을 빼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먼 길 오시느라 고초가 심했겠소.
우리 부모님께서는 귀체무량하신지요?”
“예, 강녕하십니다만,
도령님의 행방을 모르시어 그동안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개소문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서렸다.
그리고 도사의 우울한 표정을 보자 가슴이 덜컥하였다.
잠시라도 스승을 떠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이
일순 죄스러웠다.
“여보시오, 도사!”
호통 같은 단말마를 떨어뜨린 연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왜 그러시오?”
도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였다.
“이거, 해도 해도 너무 하신 것 아니오?
대감댁 귀공자를 공부시키겠다고 속여 10여년 세월동안
상노로 만들어놓고도
어쩌면 그토록 태연자약 하단 말이오?
뻔뻔함이 도를 넘으셨소!”
“장군!”
도사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흘낏 개소문을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개소문이 스승 대신 말했다.
“장군, 오해십니다.
곡절을 알지도 못하고서 사부님께 그런 무례한 언동을 하시다니,
심히 유감입니다……. 언동을 가려서 하시오.”
“아니 도령님…….”
“장군, 자초지종은 집에 가서 얘기하기로 하고,
이제 그만 내려가십시다.”
도사는 허연 수염을 쓱 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비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개소문도 나뭇짐 앞으로 가서 지게를 지려고 한쪽 무릎을 꺾었고,
그걸 본 연비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도령님, 이제 그 나뭇짐은 버리시지요!”
창날과 칼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였다.
“장군, 말을 삼가라 하질 않았소?
기껏 예까지 힘들여 지고 온 나무를 버리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개소문이 침착하게 연비를 나무라자,
바우가 지게 앞으로 썩 나섰다.
“도령님, 나뭇짐은 이 바우가 지고 갈 것이오니 어서 나오십시오.”
“아, 네가 바우냐?”
개소문이 싱긋 웃었다.
“네 뜻은 가상하다만…….
네가 어찌 내 나뭇짐을 지겠단 말이냐?”
“아이구 도령님, 이래 뵈도 우리 장안에선 당최
이놈 바우를 당할 자가 없습니다.
아무렴 이까짓 나뭇짐 하나 못 질라굽쇼.”
큰소리를 뻥 치고서 대뜸 개소문을 제친 바우는
척하니 지게 멜빵을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썼는데,
나뭇짐이 꿈쩍도 아니하였다.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이판사판이다 하고 일어서려는데,
그 바람에 그만 지게작대기가 쑥 빠져 달아났다.
당연히, 바우는 그만 나뭇짐 밑에 깔렸다.
흡사 패대기쳐진 개구리 형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이쿠 사람 살렷!”
“거 보라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
연개소문은 두 손으로 지게를 번쩍 들어올렸다.
바우가 간신이 빠져나오자 연개소문이 지게 밑으로 들어갔고,
짐을 지자마자 성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앞장서서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흡사 나뭇짐이 저 혼자 퉁퉁 뛰면서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공 부잣집 상노가 나뭇짐을 지고 온다!”
“어디야, 어디?”
“저기다. 와아, 저저, 집채 같은 나뭇짐 좀 봐라!”
일행이 마을에 내려오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루루 뛰어나와
구경하느라고 야단 법석을 떨어대고 있었다.
‘이 수치를 어떻게 갚아주나……. 이그으…….
이 치욕을 기어이 씻고야 말리라!’
연비는 다짐에 다짐을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봉황의 눈처럼 생긴 그의 눈이
금세 빨개지면서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하란은 집에 당도하자마자 부리나케 자기 방에 들어가
이불을 푹 덮어썼다.
그녀의 가슴은 마구 콩닥거리며 이불을 들썩이고 있었다.
‘개동이는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어. 그래…….
남모를 곡절이 있었던 거야.’
그녀의 가슴은 어떤 기쁨에 차올라 팡 터질 것만 같았다.
“하란아! 너, 종일 어디 갔다가 온 거니?”
큰언니 수련이었다.
“나? 나물 캐러 갔다 왔지 뭘…….”
“뭐야, 나물이라구?”
“응, 큰언니.”
“너,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 그치?
무슨 나물을 하루 종일 캔단 말이니?”
“아이참 언니두?
어쩌다 보면 늦을 수도 있지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고 그러우?”
“요, 앙큼한 것 좀 봐! 에고, 나물바구니가 텅 비었더라.
바른대로 말 못하겠니?”
“그거야, 오다가 엎어지는 바람에 죄 쏟아버려 그런 거지.”
하란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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