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9화]도령을 찾아서 [7]
사랑채엔 공 대인이 홀로 보료 위에 앉아 있었다.
“어서 이리들 앉으시오.”
그렇게 일행에게 자리를 권한 후,
도사는 공 대인을 바라보며 이들을 소개했다.
“대인, 이 분들이 고구려 평양성에서 개소문을 찾아오신 분들이오.”
“아, 그러시오? 좀 전에 손님들 오셨다는 소린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멀리서 오신 귀한 손님들인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공 대인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제가 이번에 연총관 댁 도련님을 모시러 온 연비입니다.”
“소승은 지선사에 있는 성철이옵니다.”
인사가 모두 끝나고 제각기 정좌하자 도사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개소문의 수업을 위해 이곳을 택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소.
첫째 이유는, 이 평원 땅이 그 옛날 우리의 조상인 예맥의
고도(古都)였기 때문이었소.
개소문에게 우리 조상의 옛 결의를 심어주기 위해
이 땅을 택한 것이지요.”
방 안에는 황동촛대에서 촛불이 휘황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너울대는 불길을 따라서 사람들의 그림자도 너울거렸고,
감회 어린 표정들도 불빛에 어른거렸다.
“둘째는, 이곳이 신라 땅이기 때문이었소.
고구려에서는 그 어디를 가나 동부 총관부의 연 총관댁 도령이라는
안이한 의식을 갖기 쉬운 법. 그래서 이 적지를 택했던 거요.
개소문으로 하여금 위난과 곤경 속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고 항상 자신을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소.
그리고 셋째 이유는, 이곳에 공 대인이 계시기 때문이었소.
공 대인이 아니었더라면 이곳에서 개소문이 저토록 출중한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닦지는 못했을 거요.”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방 안의 공기는 더욱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을 거요.
개소문이 이 댁의 상노 노릇을 한 이유 말씀이오.……
적지인 이곳에서 개소문의 신분을 숨기고
주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한 피치 못할 방편이었소.
이 또한 수행의 한 과정이기도 했습니다만.
아무튼 그동안 개소문에게 수업장소를 제공해주시고
개소문의 신분을 철저하게 숨겨 안전을 도모해주신 대인의 노고에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소이다.”
“심히 과찬의 말씀이외다.”
천상 선비타입인 공 대인이 자상하게 말했다.
“이 몸 또한 과거에는 고구려의 녹을 먹었던 사람이외다.
그래서 연 총관님과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던 사람이라
오직 옛 정을 감안하여 그리 했을 뿐이외다.
개소문 도령이 그동안 내 집에서 무진 고생만 하셨다는 걸 생각하면
그저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인 어르신께선 무슨 그리 황공한 말씀을 하십니까?
베풀어주신 은혜에 무어라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는 판에…….”
개소문은 공 대인에게 정중히 절을 했고,
연비 장군도 허리를 굽혀 치하의 말을 했다.
얼마 후, 공 대인의 세 딸이 술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수련과 난초는 상노인 개동이가 여러 손님과 함께 점잖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은근히 놀랐다.
그들은 개동이를 핼끔거리면서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하란은 달랐다.
그녀는 개동이를 발견하자마자 마구 가슴이 뛰었고
개동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너희들 거기 앉아라. 저의 미천한 딸들입니다.
얘들아, 손님들께 인사 여쭈어라.”
세 딸은 동시에 대답하며 제각기 큰절을 올렸다.
“너희들 듣거라. 이 분들은 고구려에서 개동이 도령님을 모시러 온
귀인들이시다. 개동이 도령님은 귀인댁 도령으로, 그동안 사정이 있어서
이곳에서 몸을 숨기고 계셨느니라.
허나 이제 고구려로 돌아가시게 되었구나. 그쯤만 알고…….
이 일은 절대로 밖에 발설하면 안 되느니…….극비사항이니라.
아무튼 그동안 너희들이 개동이 도령님께 잘못한 일이 많을 터.
이 자리에서 사과드리도록 해라.”
딸들은 경악의 표정을 나타냈다.
수련과 난초는 개동이에 대한 자신들의 지난 행동을 생각하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란은 날아갈 것만 같은 기쁨을 가득 안고
다소곳이 개소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께서 집에 계시는 동안 어린 저희들의 불민한 행동으로
고생이 더욱 심하셨을 줄로 아옵니다. 부디 용서하시와요.”
“낭자, 별 말씀을 다하시오. 낭자의 배려 덕분에 오히려 즐거웠소.”
연개소문은 지극한 정을 담뿍 담은 눈길로 하란을 보며 웃어주었다.
“하하하, 도련님, 고맙소이다.”
공 대인은 즐거운 얼굴로 술잔을 기울였다.
“이제 너희들은 물러가라.”
세 딸들은 다소곳이 몸을 일으켜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도련님!’
비몽사몽간을 헤매다가, 하란은 화닥닥 몸을 일으켰다.
하늘엔 달이 밝았다.
그녀의 발길은 무엇에 홀린 듯 후원 별당으로 가고 있었다.
온갖 화초의 향기를 맡으며, 그녀는 별당 옆 연못가에 앉았다.
그토록 애태우던 개동이의 정체를 오늘에야 알았고,
그와 극적인 사랑을 속삭였다.
‘그런데 날만 새면 떠나시겠네…….’
그녀는 자기가 이별을 감당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도련님, 아아, 도련님……. 이 마음 어쩌면 좋아요?’
그때, 누군가가 다가서고 있었다.
“낭자!”
“아! 도련님!”
개소문은 슬며시 하란의 손목을 잡았다.
“한참이나 찾았소.”
“아직 술자리가 파하지 않았을 텐데…….”
“낭자한테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무슨?”
하란은 불안한 얼굴로 개소문을 보았다.
연개소문은 하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차근차근 말했다.
“낭자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별안간 허전하구려.
이제껏, 근 십년간을 숨겨왔지만, 나는 고구려의 동부 총관 외동아들이오.
연개소문……. 아버님 쉰 살에 나를 낳았다고 해서 ‘쉰동이’라고도 불렀는데,
개소문이란 이름 첫 자를 따서 ‘개동이’로 행세했던 거요…….
내 돌아가더라도 마음은 언제나 낭자에게 있을 터…….
가서 자리가 잡히는 대로 낭자를 모시러 오리다. 약속하오.
그 때까지 부디 몸조심 하시오.”
“도련님, 아아, 도련님…….”
하란은 연개소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연개소문은 가만히 하란의 얼굴을 들어 올려 입을 맞추었다.
입술과 입술 위에 둘의 눈물이 뒤섞여 범벅이 되어갔지만,
달은 모른척했다.
남자가 여자의 옷섶을 헤치는 소리,
남자와 여자가 살 섞는 소리, 그리고 마치 새소리 같은 신음…….
너무 황홀하여 질투가 날 지경인 것을 꾹꾹 누르고서,
달은 그저 말없이 한 쌍의 연인을 비춰주기만 했다.
오월의 햇살이 동부 총관부에 따사롭게 쏟아져 내리고 있는 가운데,
어디선가 군마소리가 들리더니 우뚝 멈추는 기색이었다.
연태조는 재빨리 사랑채 영창문을 드르륵 열었다.
상노가 총총히 사랑채로 뛰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연태조의 목소리에 잔뜩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대감마님, 도련님께서…….”
“뭐야? 도련님이 어찌 되었다는 게냐?”
상노는 숨이 차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왔느냐?”
“예, 지금 막, 도착하셨습니다.”
연태조는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망연히 서 있으려니 중문을 급히 들어서는 연비를 따라 들어오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늠름하였다.
연태조의 가슴은 발작이라도 날 것처럼 마구 뛰었다.
그는 가슴을 고르잡으며 아랫목에 가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대감마님! 소장, 도련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이제야 와서 송구하옵니다!”
연태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음, 장군! 수고 많았네. 어서 올라오게나……. 아, 내 아들아!”
그는 가슴이 벅차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그시 감은 연태조의 눈에서는 방울방울 눈물이 대롱거렸다.
“아버지…….”
개소문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개소문아!”
그러고 연태조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감격이 커서 목이 메어버렸다.
개소문은 그런 아버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 백발성성한 머리, 움푹 들어간 눈,
초췌한 모습이 이제 스무 살 아들의 가슴을 아릿하게 후벼 팠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연태조가 별안간 바깥을 향해 상노를 불렀다.
“밖에 나가 오 낭장을 좀 들라하라!”
“예이~ 분부 받자옵니다.”
상노가 뛰어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오영팔 낭장이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대감마님, 부르셨사옵니까?”
“오냐,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니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군졸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맘껏 즐기도록 하라!”
“예, 깊은 배려, 황감하오이다!”
연태조는 아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나라 안팎의 정세에 대하여는 잘 모르겠구나.”
“예, 사부님께서 간간이 알려주셨습니다만, 밝히 알지는 못하옵니다.”
“그래? 내 할 말이 많구나.
이제부터 너는 국내외 정세를 착실히 살펴 알아야 될 것이니라. 알겠느냐?”
“예에, 명심하겠사옵니다.”
연태조는 긴 한숨 후에 총괄적인 국내외 정세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국내 정세는 날로 어려워져 가고 있다.
전쟁의 혼란을 초래하지 않겠다는 무사안일주의가
당나라의 회유책에 휘말려 더욱 사리판단을 못하고 있느니라.
신흥 당나라는 친선책을 구실로 사신을 통하여 국내 정세를
염탐할 뿐만 아니라…… 조정의 권신들을 뇌물로 매수하여
북공책(北攻策)을 아예 포기했다.
오히려 남벌(南伐)할 것을 권하고 있는 판이다.
그들의 속셈은…… 어떻게 해서라도 강대한 우리 국력을
남으로 돌리게 하자는 것이다.
신라·백제·고구려 세 나라가 서로 싸우도록 해놓고,
그 틈에 돌궐을 치기 위함이다.
그래서 자기들 동북방을 튼튼히 하고 난 후면,
그 다음엔 어디를 칠 것인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야말로 스스로 환란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것이
현재 고구려의 실정이니라.”
연태조는 말을 잠시 중단하고 물을 마셨다.
개소문은 조용히 꿇어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연전에 당 고조(이연 : 565~635)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이세민 : 재위:626~649)은 천하 제국을 건설하려는
발발한 야심을 품고, 먼저 고구려의 동맹국인 돌궐을 치려 하고 있다.
정세가 이렇게 되고 보니 당장 위급한 쪽은 돌궐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돌궐 왕 힐리가한이 우리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해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당나라의 문벌정책에 휩쓸린 우리 조정의
민의겸 막리지를 위시하여 소익환 총관 등의 조신들은
돌궐 파병 문제를 놓고 논란만 거듭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편 돌궐의 왕 힐리가한은 우리 내정이 이러한 것도 모르고
아사나두이(阿史那杜爾) 장군을 파견하여 계속 파병을 독촉하고 있다.
더욱이 아사나두이 장군은 과거 여러 차례 고구려를 위해 원병을 이끌고 왔던
장본인이다. 그러니 우리 조정에서는 그의 요청을 가볍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당나라의 눈이 있으니 파병할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당나라와의 화친만을 고집하는 일부 친당 무리와 간신배들의 농간으로
조야는 모두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있는 게야……
게다가 당나라 간첩 이대룡(李大龍)의 계략에 빠져서는 돌궐 파병을
적극 반대하는 소익환 민의겸 등은 종종 나에게 박해를 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구나. 나라 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의 안위조차도
이토록 위급한 지경이니, 너는 이제껏 닦은 문무기량을 다하여
나라를 구하고 가문을 건지는 일에 추호도 방심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녜, 아버님, 명심하겠사옵니다.”
부친이 기나긴 이야기를 마치자,
연개소문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마음을 굳게 다졌다.
연개소문이 돌아오고 나서, 동부 총관부 연태조 댁에는 다시
활기찬 기운이 넘쳐났다.
그러나 고구려의 내정은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돌개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파병 문제를 놓고 두 파의 반목이 날이 갈수록 거칠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류태왕도 더 이상 차일피일 할 수가 없어서 전국의 방백·성주들을 소집하였다.
해가 서산마루에 질 무렵, 연 대인 댁 솟을대문 앞에서 두 귀인이 말을 내렸다.
대문 근처에서 서성이던 위병이 달려와 귀인들의 준마를 마구로 끌고 갔다.
“연대감은 지금 댁에 계시느냐?”
40전후의 후리후리한 귀인이 대문지기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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