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8화]도령을 찾아서 [6] “어이구, 그랬쪄? 그랬구낭……. 근데 오늘 오후에 개동이를 찾는 손님들이 왔다 갔는데…….” “뭐유? 개동이를 찾아온 손님?” 수련이 배시시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요것 봐라……. 왜 놀라니? 너, 개동일 찾아 산에 갔던 거 아냐?” “언니, 우리 언제 산에 가 봐요. 나물도 캘 겸 말이우. 난 산이 참 좋더라.” “어라? 말을 돌리네? 너, 아무래도 수상하다.” “원 언니도……. 별소릴 다 해. 뭐가 그리 이상하다구…….” 그러면서 하란은 생각에 잠겼다. ‘개동이를 찾아왔었다는 손님은 그럼 아까 산마루에서 본 그 사람들……? 개동이를 데려가려고 온 걸까?’ 하란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쳤다. “아니, 나물 캐느라 돌아다녔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봐…….” 하란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도로 드러누워 버렸다. “이상하네……. 아무튼 조심해.” 수련이 그렇게 다녀가고 나자 작은 언니 난초가 들어왔다. “얘, 하란아. 오늘 개동이를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는데, 개동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지? 그렇지?” “아유, 작은 언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우? 난 하루 종일 집에 있지도 않았는데…….” 힐끔힐끔 하란의 눈치를 살피던 난초가 뱅긋이 웃음을 빼물었다. “작은 언니는 아무래도 개동이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야. 안 그러우?” “얘두? 별소릴 다하는 구나.” 그러면서 난초가 나가고 잠시 후에 별안간 바깥이 시끌벅적해졌다. 집채만큼 큰 나뭇짐을 지고 개동이 들어서고 있었다. ‘아, 도련님…….’ 또 다시 하란의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좀전에 산마루에서 봤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개동이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별 관심도 없던 집안사람들과 비복들이 이날따라 대문에까지 나가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눈여겨보며 쓸데없는 말을 걸고 하였다. 하란이 날렵하게 방에서 빠져나와 함지박에 찬물을 가득 퍼 담아 개동이에게 종종걸음 쳐갔다. “도련님, 피곤하시겠어요. 어서 세수부터 하시어요.” “허어, 아가씨…….” 개동이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어느새 수련과 난초도 옆에 와서 서 있었다. “하란아! 넌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손님들이 다 보고 있는데, 너, 너, 기껏 상노한테 도련님, 도련님 하면서 세숫물을 떠다 바쳐?” “하이고 망측해라! 별꼴이 반쪽이야!” 큰언니 수련이 하란을 흘기며 매섭게 나무라자, 작은언니 난초는 아예 침이라도 뱉을 듯이 기승을 부렸다. 연비의 마음속엔 이루 말할 수 없는 울분이 안개처럼 서리고 있었다. 그저 빙글거리고만 있었는데, 마치 일곱 살 아이같이 선한 도사의 얼굴에, 연비는 불뚝불뚝 심술이 솟구쳤다. “도사께서는 우리 개소문 도령을 이 집에다 팔아 넘긴 거요?” “허허, 팔아 넘겨?” “도대체, 얼마 받고 파셨소이까?” “흐음…….” 빙글거리던 도사의 표정이 한 순간에 일그러지자, 연개소문이 손을 저으며 나섰다. “장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지금껏 나를 돌봐주신 사부님께 사례는 못할망정, 어찌 그리 무례한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도무지 의혹을 풀 수가 없는 연비는 계속 투덜거렸다. “허어, 도련님. 사례가 다 뭐란 말이오? 우리 귀한 도련님을 잘 가르치겠다고 꼬여내어 이 지경이 되셨는데…….” “이 지경? 대체 이 꼴이 어떻다고 그러시오?” 연개소문은 자기의 떡두꺼비 같은 손을 들여다보다가 그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걷어올렸던 소맷자락도 풀고 돌돌 말아올렸던 베잠방이 가랑이도 풀어서는 조금이나마 단정하게 갖춘 후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군! 나는 이날까지 더 배울 게 없을 만큼의 온갖 학문과 무예를 배웠소. 사부님께 말이오.” “허허, 정신 좀 차리시오. 도련님은 아직도 저 혹세무민하는 도사에게 빠져 있는 거요. 도련님의 거친 손, 남루한 옷차림, 이것들이 다 말해주고 있소. 아무리 쓰다듬어도, 아무리 소맷자락을 내리고 바짓가랑이를 풀어내려도, 도련님의 지금 모습은 그저 상노일 뿐이오. 듣자하니 도련님이 이 댁 상노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던데, 이래도 도사에게 속지 않았다고 하시다니!” 집요한 연비의 추궁에 연개소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도사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매만졌다. “개소문아! 장군을 뫼시고 따라오너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느니.” 도사가 벌떡 일어나 스르르 벽장문을 열자 또 하나의 방이 드러났다. 언뜻 보기엔 무슨 창고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안엔 수많은 책들이 차곡차곡 쌓이거나 세워져 있었다. 연비는 순간 수많은 책들에게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단 한 번 듣도 보도 못한 책들이 수두룩 빽빽한 방이라니! 그는 잠시 경이로운 눈으로 책들의 제목을 훑어볼 따름이었다. 도사가 사뭇 신경질 적인 눈초리로 연비를 보았다. “연 장군! 이 서재에 있는 책 중에서 당신이 한 권 골라서는 한 대목을 접어놓고 개소문에게 풀이해보도록 하시오.” ‘별별 말도 되지 않는 소리!’ 뜬금없는 말이었다. 연비는 문덕도사의 말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대학자라 하더라도 이토록 많은 서책을 어떻게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요술을 부리려고?’ 그는 이 책 저 책 무작위로 뽑아 척척 펼쳐놓고 뒤적거리다가 문득 《서경(書經)》의「홍범(洪範)」이라는 글자에 눈길이 갔다. 연비는 그것이 무척 어려운 글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슴없이 서경을 집어 들자, 노승이 혀를 끌끌 찼다. “하필이면 그 어려운 책을…….” “하아, 너무 어렵겠지요?” 연비가 난처한 표정으로 노승을 바라보자 도사가 아무 거리낌 없이 장담하였다. “나는 일구이언을 하진 않습니다. 어서 그 뜻을 도령께 강(講)하도록 해보시오.” ‘아이고 모르겠다.’ 연비는 마지못해 책을 개소문에게 건넸다. “도련님, 이 책도 배운 것이오?” “그러하오. 이 서재에 있는 책들은 모두 읽었다오……. ‘홍범’은 천지간에 가장 큰 법이라는 뜻입니다. ‘홍범구주’라고도 하는데, 첫째는 오행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다섯 가지 물질을 가리키지요. 둘째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일, 즉 오사(五事)이고, 셋째는 여덟 가지 정사, 즉 팔정이고, 넷째는 다섯 가지 기율, 즉 오기(五紀)이고, 다섯째는 임금의 법도, 즉 황극(皇極)이고, 여섯째는 세 가지 덕, 즉 삼덕이고, 일곱째는 점을 쳐서 의심나는 일을 밝혀내는 일, 즉 계의(稽疑)이고, 여덟째는 하늘이 내리는 여러 징조, 즉 서징이고, 아홉째는 다섯 가지 복과 여섯 가지 곤액, 즉 ‘오복육극’입니다.” “아하, 그렇습니까? 그런데 구체적으로, 소장이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연개소문은 다시 긴 설명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힘입어 사용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우 임금이 순서를 정한 ‘아홉 가지 큰 규범’이기도 하고, 무왕과 기자가 문답한 내용이기도 하지요. 오행이 하는 일은 정덕 ‧ 이용 ‧ 후생의 도구에 지나지 아니하나 그 효용은 세상이 치우침 없이 올바로 다스려지고 만물이 생성됨을 이룹니다. 한나라 학자들은 길흉화복의 미신을 두터이 믿어서 어떤 일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다른 일의 징조가 된다고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오행을 분배하고 미루어 분석함으로써 허황되고 망령된 소리를 즐겨하였습니다. 그것이 잘못 흘러 음양복서의 학술, 즉 길흉을 점치는 학술을 이루었고, 그것이 둔갑하여서는 천문 역법과 미래 예언의 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세 성인(우임금 ‧ 무왕 ‧ 기자)의 본지와 크게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행상생(오행이 상호 생성해 준다는 학설. 나무는 불을 낳고[木生火], 불은 흙을 낳고[火生土], 흙은 쇠를 낳고[土生金], 쇠는 물을 낳고[金生水], 물은 나무를 낳는다[水生木]. 따라서 나무는 불의 어미[母], 불은 나무의 자식[子]이라는 ‘모자관계’로 간주)설에 이르러서는 그 어긋남의 정도가 극에 달했습니다……. 만물이 흙에서 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흙이 어찌 쇠붙이에게만 모체가 되겠습니까. 쇠붙이란 딱딱한 물질이니만큼 불에 녹아내리는 것이 그 본성은 아닙니다. 넘실거리는 강과 바다, 황하와 한수, 저것들이 다 쇠붙이가 녹아 불어난 물이란 말입니까?……. 돌에서 젖이 나오고 쇠에서도 즙이 배어납니다. 만물에 진액이 없으면 말라 버리기 마련인데, 어찌 유독 나무에게만 물이 배었겠습니까?……. 만물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땅이 더 두터워지지는 않습니다. 하늘땅이 어울려 만물을 조화롭게 키우는 이 마당에 어찌 한 아궁이에서 불타고 말 땔나무가 땅덩이를 불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쇠와 돌이 서로 부딪치거나 기름과 물이 서로 끓을 때에 불이 생겨납니다. 벼락이 쳐서 물건을 태우기도 하고 황충을 묻어둔 곳에서는 도깨비불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불이 오로지 나무에서만 일어나지 않음이 분명하지요. 이는 ‘상생’은 서로 자식이 되고 어미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힘입어서 산다는 뜻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하우씨(하나라 왕조를 세운 우임금)는 오행을 잘 이용하였습니다. 하우씨가 산의 모습에 따라 나무를 베어 낸 것은 굽게 할 수도 있고 곧게 할 수도 있는 나무의 성질을 터득한 때문입니다. 토목공사를 크게 벌인 것은 곡식을 심고 거두는 농사의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요, 금과 은과 구리 세 가지를 갈라낸 것은 변형할 수 있는 쇠의 성질을 터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산과 늪에 불을 질러 개간한 것은 타오르는 불의 성질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며, 낮은 쪽으로 땅을 파 나가면서 물길을 만든 것은 낮은 데로 스미며 흘러내리는 물의 성질을 터득한 까닭입니다. 백성이 만물에 힘입어 살아가는 관계가 이렇듯 큽니다……. 어느 것이고 물질 아닌 것이 있으랴만, 유독 나무 ‧ 불 ‧ 흙 ‧ 쇠 ‧ 물만을 오행이라고 하는 건 이 다섯 가지로 만물을 포괄하면서 그것들의 덕행을 칭송함이지요.” 연비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무릎을 탁 치면서 “오, 도련님!”하고 외쳤다. “그것으로 강론이 끝났는가?” 도사가 빙그레 웃으며 묻자, 연개소문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오행’이 잘못 쓰였습니다. 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남의 ‘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이를 남용하였고, 불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불로 공격하는 데에 이를 남용하였으며, 또한 쇠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금은으로 뇌물을 주고받는 데에다 이를 남용하였는가 하면, 나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궁실을 짓는 데에 이를 남용하였고, 흙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논밭을 넓히는 데에만 이를 남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아홉 가지 큰 규범(홍범구주)’의 학설이 끊어지고 만 셈이지요……. 이로써 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연비는 벅차오르는 희열감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오히려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도사가 남모를 비웃음을 물고 일갈했다. “장군! 아직도 불안하시오?” “…….” 연비는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 취한 언행이 얼마나 경망스러웠던가 하고 크게 뉘우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이토록 심오한 학문을 전수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을 도사에게 그 노고를 치하하기는커녕 오히려 무례한 언행만을 일삼았으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경이었다. 연비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창백하기조차 했다. “도사님! 부디……. 제 불찰을 용서해주시오.” 무릎을 착 꿇고서, 연비는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한참 후, 도사가 연비의 두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장군, 너무 상심 마시오. 개소문과 나의 인연은 이제 여기서 끝난 것을……. 내 마지막 열정을 다 바쳐 가르쳤소이다만…….” 연개소문도 입을 열었다. “장군! 사부님께서는 저를 가르치시느라고 오랜 세월을 두고 단 하루도 맘 놓고 쉬지 못하셨소. 늘 동분서주, 온갖 정성을 다하셨소.” 그의 눈에선 저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자아, 그럼 모두들 사랑채로 모셔라. 공 대인께 인사를 여쭤야 하느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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