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12화]음모에 걸려들기 [3]
“우리 대감 나리께서 사신 어른을 기다리고 계시오. 어서 안으로 드시오!”
병졸들이 초롱불을 높이 치켜 올려 앞을 밝히며 종종걸음 쳤다.
사신 이대룡은 50전후의 비대한 체구에 번쩍이는 군청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타고 있는 평교 뒤엔 붉은 비단으로 포장된 커다란 궤짝을
6명의 장정들이 받든 채 줄래줄래 따라왔는데,
궤짝이 상당히 무거운지 장정 여섯이 모두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서도 비척거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일행이 중문에 들어서자, 대청마루에 나와 있던 소 총관이 반가이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 대인! 이렇게 한밤중에 행차하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소이까? 어서 올라 오시지요.”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두 팔을 벌리고 이대룡을 맞이했다.
이대룡은 흐뭇했다.
대고구려 국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소 총관이 이처럼 반가이 맞아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인이 자기를 상좌에 앉힐 것을 번연히 알고 있었지만
일단 마룻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소 총관 대감, 문안 올리옵니다.
소관이 귀국에 와서 총관대감의 하해와 같은 은총을 입고 있습니다.”
소 총관이 당나라 사신인 이대룡에게 지성을 다해 돌봐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랬더라도 저토록 존대를 하다니,
소익환은 너무 흡족한 나머지 그를 껴안을 듯이 다가가 안아 일으켰다.
“허허, 이 대인,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오시오.”
소 총관이 정중한 태도로 이대룡을 상좌로 안내하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슬며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 대감, 대감께 올리려고 가져온 물건이 있습니다.
우리 관원들이 어제 본국에서 가져온 것인데,
괘념치 마시고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여섯 명의 장정들이 비단보에 싸인 궤짝을 낑낑거리며
마루 위에 올려놓았다.
소 총관의 입이 헤벌어졌다.
지금껏 이대룡이 가져온 물건은 으레
보물이거나 희귀한 패물, 또는 값진 피륙들이었다.
오늘 가져온 저 큼지막한 상자에도 아마 그런 것들이 들어 있으려니
싶으니 소 총관의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인, 늘 좋은 선물을 가져오셔서 소인, 받기만 했습니다.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 할지……”
하인들이 그 육중한 궤짝을 들고 안으로 사라지자,
소 총관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이대룡에게 인사를 차렸다.
“허허허, 소 총관 대감,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 조그마한 성의를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오히려 부끄럽습니다그려.”
*양각도(羊角島) : 평양시 중구역 유성동의 대동강 유역에 있는 섬
면적은 1.2㎢이고, 둘레 길이는 7㎞, 북동∼남서쪽 길이는 약 3.5㎞,
가장 넓은 중앙부에서의 폭은 약 500m이다.
이윽고 돌궐원병 이야기가 나왔다.
이대룡은 노련한 외교관이었다.
“대감께서 말씀하시는 돌궐 사신 문제는 소관으로서는 금시초문이외다.
새삼스레 사신을 보내서 원병할지 안 할지를 알아본다니,
도시 모를 일이외다.”
이대룡이 따지듯이 말하자 소 총관이 짐짓 웃었다.
“허허허……. 이 대인은 내 말뜻을 잘 모르셔서 불안하신 모양인데,
사실은 그게 아니외다.”
“아니, 대감께선 소관을 놀리시는 것이오?
어서 그 사유나 좀 풀어놔 주시오.”
소익환은 아주 조심스럽게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내 그 문제 때문에 이 대인을 찾아뵈려 했소이다.
대인, 심려 놓으십시오. 실인즉, 이번 사신으로는
연태조의 아들 연개소문이 가게 될 것이오.
현재 돌궐은 왕위계승으로 인해 내분이 심할 뿐,
고구려의 내정에는 일체 개입하지 않고 있소이다.”
“하기야, 우리 당나라 군사가 돌궐의 주위를 완전 포위하고 있으니,
귀국의 사신인들 어찌 돌궐 땅에 들어갈 수 있겠소?”
“허허허, 그것을 몰라서 사신을 보낸답니까?”
“그렇다면?”
소익환은 어리둥절해하는 이대룡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극성스레 돌궐파병을 주장하는 연태조의 아들을
사신으로 보낸다지 않습니까?”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이대룡이 능청을 떨었다.
“하하하! 소 대감께서 그토록 심오한 뜻을 가진 줄 미처 몰랐습니다.”
“하하하하!”
소익환은 이대룡이 알아듣는 것이 흡족하여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참, 이 대인!”
별안간 웃음을 딱 그친 소익환이 이대룡을 은밀히 불렀다.
“아니 왜 그러시오?”
“연태조의 아들 연개소문을 처치하는 일은 전적으로
귀국 당나라군의 손에 달려 있소이다.
이 점 잊지 마시고 잘 조처해주시기를 바라오.”
“아, 예에. 그 점은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소관이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하하하! 여하튼 이 대인만 믿소이다.”
“자아, 이젠 그런 이야긴 접고, 술이나 드시지요.”
소익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흐뭇하고 통쾌하였다.
모종의 밀령을 받고 고구려에 들어온 지 수 년 동안,
이대룡은 교묘한 수법으로 고구려 조정에 파고들었다.
그의 박식달변(博識達辯)은 고구려의 고관대작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설득해나갔다. 돈이 있는 자가 돈에 입맛을 다신다고,
이대룡이 가져온 금은보화에 그들은 아주 수월하게 포섭되어 간 것이었다.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통쾌한 웃음을 거듭 터뜨렸다.
◇◇◇
며칠 후 단오절이었다.
평양성 남문 밖에서 5마장 쯤 떨어진 곳인 패강*의 물줄기로 둘러싸인
양각도*에는 아녀자들의 그네타기 놀이가 한창이었다.
무성한 버드나무의 사이마다 온갖 오월 꽃들이 호들갑스레 웃어댔고,
한쪽에서는 활터와 씨름터가 마련되어 많은 장정들의 함성이 요란하였다.
이들 놀이터와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 한 건장한 청년이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었고, 그 옆의 버드나무엔 붉은색 준마가 매여 있었다.
청년이 무슨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것을 그윽히 내려다 보던 준마는
가끔씩 잔디를 걷어차며 히이잉, 울고 있었다.
버드나무 큰 둥치에는 대궁과 쌍전(雙箭 나란히 붙어있는 두 개의 화살 통),
장창(長槍 긴 창)이 얹혀 있었다.
그때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령님―”
바우였다.
“무슨 일이냐?”
숨이 턱에 닿도록 허겁지겁 달려온 바우는 연신 식식거리면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서 큰 싸움판이 벌어졌습니다요!”
그네터에서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넌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느냐?
그네 뛰는 아녀자들이야 싸우든지 말든지, 그게 무슨 구경거리라고!”
청년, 아니 연개소문이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바우를 나무라자,
바우는 연해연방 손짓발짓까지 해가며 동동거렸다.
그러면서 입에서 침이 튀도록 버럭버럭 소리질렀다.
“아이쿠, 도령님! 그게 아니오라, 저, 저, 저기 자세히 좀 보사이다.
어림군의 장수와 당나라 군사들입니다요!
저것들이 한패거리가 되어서는 말입죠.
그네 뛰는 아녀자들을 희롱하지 뭡니까?”
“뭣이? 그게 사실이렷다!”
“옆에 있던 다른 청년들이 말리려고 했는뎁쇼,
아, 그것들이 청년들을 창대로 마구 후려치고 난리 났습니다요!”
연개소문은 벌떡 몸을 솟구쳤다.
그는 재빨리 쌍전을 등에 메고 장궁(長弓 : 앞을 순전히 뿔로 만든 활)을
어깨에 두른 후 창을 비껴들고서 순식간에 말 잔등에 올랐고,
곧장 말의 엉덩이에 채찍질을 했다. 말이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네 터는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어림군의 군관들이 장창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여인들을 이리 몰고 저리 몰며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고, 또 어떤 놈들은 처녀들을 붙잡아 치마를
들어 올린다거나 젖가슴에 손을 쑥 집어넣고 주물럭거린다거나
꽉 끌어안고 입술을 덮친다거나 하며 갖은 희롱을 다하는 중이었다.
연개소문은 울컥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순간 그의 눈에서는 파바박! 불꽃이 일었다.
그는 말고삐를 바싹 당겨서 인파를 헤치고 달렸다.
행패를 부리고 있는 군관들에게 다가간 것이었다.
“네 이놈들! 그만 두지 못할까!”
추상같은 호령이었다.
쩌렁쩌렁한 그 목소리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고막까지를 때렸다.
바로 앞에서 아녀자를 붙들고 수작을 부리던 한 놈은 그 호령소리에
질겁하여 여자를 놓고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놈 연개소문이다. 잡아랏!”
여러 군관들 틈에서 한 놈이 연개소문을 알아본 것이었다.
상전의 반대파인 연태조의 아들을 만났으니,
단단히 혼찌검을 내주자 하는 심보가 발동한 것이었다.
수십 명의 군사들이 연개소문을 겹겹이 에워싸고 차츰차츰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하하하핫!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바로 그 짝이로구나!”
말 위에서 좌우를 한 번 둘러보던 연개소문은 이내 허공을 향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대충 보아하니, 너희들은 어림군의 군관과 당나라 사관의 무관들인 모양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즐거운 명절에 아녀자들을 희롱하고 양민을 괴롭히는가?”
서슬 퍼런 개소문의 태도에 찔끔 했는지,
누구 하나 앞으로 나서서 대꾸하는 군졸이 없었다.
강변은 잠시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때였다.
어림군 편에서 불쑥 말을 몰고 나오는 장수가 하나 있었다.
그는 어림군 총관인 소익환이 가장 신임하는
아장(亞將 포도대장. 용호별장 등에 속함)으로,
무예가 탁월하고 뱃심 좋기로 장안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인
장택술이었다. 나라 안 5부 총관부를 통틀어 무예나 힘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택술은 썩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연개소문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근질근질하던 참이야!”
그는 제법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호통 쳤다.
“네가 바로 연태조의 아들 개소문이렷다! 허허허허! 잘 만났다!”
“뭐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아장 놈아! 감히 뉘 앞에서 아가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연개소문이 치켜든 눈꼬리를 빳빳이 세우고서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일갈하자, 장택술도 행여 질세라 목청을 높였다.
“이 철부지 개소문아! 그래, 어림군 총관부의 아장 장택술이를
네 모른단 말이냐? 너야말로 하룻강아지인 걸 진정 몰랐더란 말이냐?
하아, 몰랐다면 이제라도 좀 알아 뫼시거라! 으하하하! 하하하핫!”
안하무인 장 아장의 거만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잡아 흔들었다.
연개소문도 되받았다.
“이놈! 행실이 고약하더니, 말버릇 또한 형편없구나!
그래, 나라의 녹을 먹는 어림군 총관부의 장수란 놈들이
당나라 사관의 무관을 선동하여 연약한 아녀자나 희롱하고,
이놈! 적을 맞아 싸우라고 내준 창으로 양민들이나 후려치고,
그것이 고작 너희 놈들이 하는 일이더란 말이냐! 이, 천하에 한심한 놈아!”
“에잇! 시끄럽다! 내 창이나 받아랏!”
장택술은 장창을 비껴들었다.
그리고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연개소문을 향해 바람처럼 돌진하더니,
불과 대여섯 걸음 앞에서 우뚝 멈췄다.
그런데 창이 연개소문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지만
좀처럼 놈의 손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눈빛에 걸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강렬한 눈빛으로 놈을 냉동시킨 연개소문은 곧이어 호령했다.
“이놈! 어찌 창을 던지지 못하느냐?
던지지 못하겠으면 냉큼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어라!”
“야잇!”
그 말에 약발을 받은 장택술이 냅다 창을 던졌다.
장창은 햇살에 창날을 번쩍이며 힘차게 날았다. 그런데, 날긴 날았는데,
“쟁그랑!” 소리와 함께 두 동강으로 꺾어져서 힘없이 모래 밭에 나뒹굴었다.
연개소문의 장창이 그의 창을 정확하게 때렸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창을 한 바퀴 빙 돌려 던졌다가 가볍게 받아들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핫 이놈! 네놈의 창법이 고작 이것이더냐?”
“야이놈!”
장택술이 분기탱천하여 달려들었다.
연개소문은 자기의 창을 거꾸로 들고는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장택술이 수십 명의 군사들과 함께 연개소문을 에워쌌고,
차츰차츰 포위망을 좁혀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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