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

新연개소문전 -북국에 핀 열꽃 3(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0. 12. 22:28

 

연개소문이야기 [24화] 북국에 핀 열꽃 3

 

 

“고이헌지고……


가한의 격노한 목소리가 배율치명의 귓전을 때렸다. 그는 도대체 무어라고 위로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를 몰라서 그저 막막한 마음으로 부복해있었다. 그러다 문득 땅에 떨어진 국서를 주워서는 단정히 펴고 왕 앞의 탁자에 고이 올려놓았다. 그러자 힐리가한은 더욱 험악한 표정으로 호령했다.


“보기 싫으니 치우시오! 고구려 국왕은 그래, 그동안 짐의 국서를 수차례 보았을 터인데, 사신 또한 누누이 설명했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래, 글을 읽을 줄 모르는가, 말귀가 먹었는가, 대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구구한 변명을 이리 적어 보낸단 말이던가. 해괴하도다!”


국서가 다시 땅에 떨어지자, 배율치명은 다시 국서를 탁자에 올려놓은 다음 한 발 물러나 머리를 조아렸다.


“마마, 소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한 말씀 진언코자 하옵니다. 부디 이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시어 고구려 사신을 친견하소서. 후일이라도 조속히 원병이 올 수 있도록 도모하심이 마땅한 줄로 아뢰오!”


그제야 격분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힐리가한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옳은 말이오만, 경도 잘 알다시피, 지난날 고구려의 국난에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파병하지 않은 적이 있었소? 그렇거늘, 작금의 고구려의 태도는 심히 고약하오.”


“마마, 소신도 성려하시는 바를 잘 알고 있사오나, 지금은 감정만을 앞세울 때가 아닌 줄로 아옵니다.”


“딴은 그렇소.”


힐리가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경은 어서 고구려 사신을 들라 하오. 만사 경의 처사에 맡기겠으나, 짐 또한 사신에게 이를 말이 있소.”


힐리가한이 들어있는 장막을 빠져나온 배율치명은 곧장 고구려 사신 연개소문이 기다리고 있는 장막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군, 이렇게 찾아주시니 송구합니다.”


초조히 기다리던 연개소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오. 사신을 불편한 장막에서 오래 기다리시게 하여 도리어 송구스럽습니다. 일단 큰불은 잠재웠으니 지금 전하를 뵈러 가십시다.”


“장군, 귀국의 왕 전하를 뵈옵기가 몹시 두렵소이다.”


연개소문은 배율치명을 따라 힐리가한이 거처하는 행궁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아아, 돌궐 왕의 분노를 살 것은 마땅하려니와, 남장한 계 낭자와 바우는…….?’


두 사람을 종자로 대동하고 와서는 영문(營門)안 초소에 두고 온 일이 자꾸만 걸렸다. 만일 계 낭자가 남장 여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날에는, 대국의 사신으로서 아무리 계집을 밝힌다고 만리타국에까지 끼고 다니느냐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리되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여난에 휩싸이게 될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어느덧 왕이 있는 행궁에 도달하였다.
초라하던 바깥과는 달리, 실내가 대궐 못지않게 하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실내 사방 벽은 당나라 비단, 용상 앞에도 당나라 비단옷으로 의장한 시녀들이 시립해있었다.


두 사람이 용상 앞에 이르자, 시녀들 몇이 커다란 실크 장막을 걷어 올렸고, 왕은 용상에 위엄 있게 앉아 들어오는 두 사람을 주시했다.
그들은 허리를 굽힌 채 용상 앞으로 다가갔다.
연개소문은 힐끗 용상을 봤다. 당나라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곤룡포를 입은 돌궐 왕이 째려보고 있었다.


‘아 아니, 정신적으로 당나라의 노예가 되고서야 어찌 당나라와 대적하겠다는 말인가?’


하기야, 고구려에서도 당나라에 도취된 무리들이 저렇듯 당나라 물품만을 애용하는 꼴을 보고 한심하게 생각했던 연개소문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지금 스스로가 돌궐 왕에게 당할 생각을 하니 다른 생각은 할 여유가 없었다.


“마마께 아뢰오. 고구려의 사신 연개소문이 배율치명 장군의 안내로 방금 계하에 도착한 줄로 아뢰오!”


왕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그러자 궁녀 두 사람이 나서서 사신을 용상 가까이로 인도했다.


어전에 부복한 연개소문이 배례를 올렸다.


“전하, 성수무강하시옵기를 고구려의 사신 연개소문이 배례 올리옵니다. 이번에 외신(外臣)이 우리 대왕 폐하의 성지를 받들고 전하를 배알하게 되어 그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근엄한 표정으로 연개소문을 내려다보던 힐리가한이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호오! 사신께서 대고구려 대왕폐하의 성지를 받들고 원로에 오시기 얼마나 수고가 많았겠소?”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려를 받자와 황공하옵니다.”


“귀국의 대왕폐하께서 짐에게 보낸 국서는 좀 전에 우리 배율치명 장군이 올려 잘 보았소. 대왕폐하께서 성체 무량하시다 하니 다행이오.”


“전하, 성려에 보답치 못한 고구려의 사신 연개소문,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힐리가한은 또 묵묵부답이었다. 연개소문이 슬쩍 보니 왕은 성정을 다스리느라 사뭇 식식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연개소문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짐은 지금 당나라의 침략을 받아 사직이 위태로울 지경에 놓여 있소. 그리하여 귀국에 사신을 여러 차례 보내어 원병을 요청했거늘……. 어찌하여 이제 와서 달랑 홀몸의 사신을 보내주셨단 말이오? 짐은 도시 고구려의 진의를 모르겠구려.”


“전하,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사신도 잘 알다시피, 귀국에서 외환(外患)이 있었을 때에 우리나라에서 국력을 싹쓸이 해서라도 원병을 보내어 동맹국의 우의를 저버리지 않았거늘, 고구려는 대국으로서 어찌 동맹국의 우의를 그처럼 쉽게 저버릴 수 있더란 말이오?”


추상같은 호령이었다. 피 돋는 절규였다. 연개소문은 진땀만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고구려의 원병 10만을 얻은 것보다 명장인 장군을 한 사람 얻은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소. 하하하하!”


힐리가한의 웃음 속에 깃든 비아냥거림. 연개소문은 등골에서 식은 땀이 주르르 흐름을 의식했다.


“전하, 황공하옵니다. 외신은 전하의 성지를 받자와 분골쇄신하겠사옵니다.”


힐리가한은 연개소문의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용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배율치명에게 분부했다.


“경은 대국의 사신을 예우에 어긋남이 없이 대우하오.”


“소신 성지대로 봉행하겠나이다.”


이윽고 돌궐 왕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나갔다.

배율치명은 전군 진영에 새로이 장막을 가설하고는 그곳에 연개소문을 묵게 하였다.
관례대로 할 것 같으면 고구려 사신은 돌궐의 수도인 동도 어느 객관에 머물게 할 일이었지만, 이번엔 그 관례를 깨고 진영 안에 숙소를 정해준 것이었다. 왕의 명령이었다.
연개소문은 종자 두 명, 즉 바우와 계은비 두 사람과 함께 한 장막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날을 두고 배율치명의 주도하에 베풀어진 성대한 연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도무지 가시방석이었다.


연개소문은 그동안 돌궐진영을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군대의 규율 및 풍기는 헤이해지고 진세도 말이 아니었다. 지난날 당나라 진영에서 본 이정의 육화진에 비하면 돌궐의 진세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그러나 배율치명의 군진에는 포로가 되어 오는 당나라의 군사들도 상당히 많아서, 그들을 조사하는 것이 그런대로 유일한 낙이었다.

연개소문의 고뇌는 아랑곳없이 어느새 가을이 돌아왔다. 그러나 북쪽의 가을은 너무나 짧았다. 연개소문은 가을하늘을 수놓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며 뭉클 치솟는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이젠 그 가을도 저물어가고 돌궐의 대 평원에서 불어오는 먼지바람과 대흥안령 산맥을 타고 오는 북국의 매서운 바람이 흑산 계곡을 누비며 세차게 불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발 휘몰아치는 계절이 다가온 것이었다. 북국 돌궐 땅의 눈은 남쪽 평양 땅의 눈과 달라서 그다지 부피가 많은 함박눈이 아니었다. 습기 없는 분말 같은 눈이 연일 내려 쌓여 있다가 매서운 바람이 불면 눈을 들 수도 없이 어지러이 날렸다. 그 눈가루가 온통 흑산 일대를 뿌연 연막으로 가리곤 했다. 이럴 때면 연개소문은 고국에서의 함박눈을 떠올리곤 하였다. 

 
장막 안에 무료히 앉아서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는 것이 연개소문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엔 본국에다 원병 요청을 몇 번 하였고, 한 것만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본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차기도 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는 채 무료한 세월만 흘러갔다.


이제는 돌궐 왕과 그 조신들조차 연개소문을 점점 불신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쌓인 눈이 바람에 뿌옇게 흩날리는 날이나, 대흥안령 골자기를 타고 내려온 매서운 북국의 바람이 장막을 뒤흔들며 맹위를 떨치는 날이면 으레 계 낭자와 함께 장막 안에 있게 되었다.


장막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을 바라보며 온갖 시름을 달래노라면, 언제나 그의 옆에는 계 낭자의 촉촉이 젖은 눈망울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계 낭자의 모습을 볼 때면 얼었던 마음도 어느새 녹아버리곤 했다. 계 낭자는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피곤한 연개소문의 심신을 포근히 어루만져주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자기로 인해 스스로 고생길에 든 여인을 보는 그의 마음도 따라서 훈훈해지곤 하였다.

연개소문이 돌궐에 온 지도 1년이 되었다.
멀리 당나라 진지가 있는 백평산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는 연개소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사신님, 저희 장군님께서 부르시옵니다.”


배율치명의 시종군관이었다.


“장군께서?”


연개소문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감히 대고구려의 사신에게 오라 가라 하다니…….’

 
기분이 씁쓸했다. 

 
‘인질로 잡힌 몸……. 할 수 없지.’


연개소문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배율치명의 장막을 젖혔다.


“사신을 이렇게 오라 가라해서 대단히 송구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배율치명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제법 정중한 인사를 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렇잖아도 문안차 장군을 뵈려고 하던 참이올시다.”


“하, 그것 참 잘 되었구려. 어서 여기 앉으시오.”


연개소문이 자리에 앉자마자 당직 군사들이 꿀차를 날라왔다.


“자, 이 꿀차를 좀 드시지요. 시원하실 거요.”


“허어, 고맙소이다.”


안 그래도 갈증이 나던 참이라, 연개소문은 거무스레한 쇠붙이 잔에 담긴 꿀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어, 시원해!”


배율치명이 소리 없이 웃더니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우물쭈물 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부끄럽소이다만……. 이거 참, 큰일이 났소이다.”


“아니, 큰일이라뇨?”


연개소문은 배율치명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당나라 군진에서는 어제 돌연 2만여 기병이 증강되었다는 급보가 왔소이다.”


‘어쩐지 아침부터 병사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더라니…….’


연개소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짐짓 사죄의 말을 했다.


“그 말씀을 들으니 더욱 송구합니다.”


연개소문은 원병을 보내지 않고 있는 본국의 처사가 매우 원망스러웠지만 그런 내색을 한다는 건 금기였다. 그나저나 증강된 당나라 군사가 곧 침공해 올 것이라는 조짐 아닌가. 마음이 급했다.


“아, 아니외다. 사신은 지난 일을 가지고 너무 괘념치 마오. 그보다는 지금 우리가 당한 눈앞의 일이 더욱 시급하게 되었소이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지요.”


연개소문은 이미 배율치명의 속을 다 읽어버렸다.


“장군께서 걱정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겠소이다. 이 사람도 본래 무인이니 당나라군의 격파에 앞장서겠소이다. 그동안 너무 편안히 놀아서 몸 상태가 말이 아니기도 하고 말입니다. 허허! 염려 마시오!”


“소장이 하고싶었던 말씀을 다 하시니 더 할 말이 없소이다.”


배율치명은 입을 딱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그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연개소문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장막 밖으로 나가자마자 말을 몰아 산비탈을 달렸다.
산 중턱에 올라 멀리 당나라 진지를 살펴보았다.
어마어마한 당나라 진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적진 오른쪽에는 많은 기병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한동안 시선을 보내고 있던 배율치명은 굳어진 표정으로 연개소문을 돌아보았다.


“장군! 적진의 저 기병들은 왜 갑자기 동북간 쪽으로 이동하는 걸까요?”


배율치명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연개소문의 눈길은 계속 적진에 못 박혀 있었다.
말 위에 앉은 채 묵묵히 적진만 주시하던 연개소문이 이윽고 오른손을 들어 적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장군, 저걸 보시오. 저 진세는 분명 육화진이오. 적군은 지금 우리 진을 공격하려고 이동 태세를 취하고 있는 거요. 저들이 공세에 돌입할 땐 저 기병들이 선봉에 설 모양이오.”


배율치명이 무릎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과연, 장군의 말씀이 맞소이다.”


연개소문은 입맛이 떫었다.


‘적군의 병력 이동 형세를 얼핏 보기만 해도 판단할 수 있을 터인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