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

新연개소문전 -북국에 핀 열꽃 2(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0. 11. 22:53

 

연개소문 이야기 [23화] 북국에 핀 열꽃 2


 

장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연 사당이 하나 있었다.
사당 안에는 한 석상이 제 자리를 잃고 나동그라져 있었다.
왕은 그 석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석상에는 ‘대고구려국 동명성왕’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왕은 지난밤 꿈속에 나타난 노인이 바로 이 석상의 화신임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부하를 시켜 사당을 개축시키고 석상을 복원하여 제자리에 안치하도록 분부했다.
그리고 공사가 다 끝난 어느날 밤 꿈에, 왕은 또다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내 그대의 갸륵한 마음에 보답하고자 다시 찾아왔노라. 이곳은 그대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요새가 되리니, 이곳 지형을 잘 살펴보도록 하라. 그러면 군사상의 요긴한 비밀통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부디 잊지 말고 이 지역의 생구(生口)를 찾도록 하라.”

날이 밝자 왕은 부하들을 풀어서 이 지역을 샅샅이 탐사하라 시켰고, 결국 천연동굴을 발견한 것이었다. 연개소문이 통과한 바로 그 생구를 통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오늘의 돌궐이 있게 한 것이었다. 그 후 돌궐 왕은 이 사당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대대로 사당을 받들었다. 사당을 지키는 동시에 이 동굴을 지키는 사공을 배치하게 된 것이었다.     

◇◇◇

늙은 사공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연개소문은 새삼 사당주위를 돌아보았다. 연개소문의 가슴 속에는 훌륭한 조상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충만해 있었다. 

‘나야말로 그 생구를 통해 위기를 모면하지 않았는가……



어느새 해가 기울어 산기슭에는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이 늙은이의 초옥에서 묵어가십시오. 초라하고 좁은 곳이지만 하룻밤이야 어찌어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반갑게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노인장께 청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이처럼 배려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연개소문 일행은 사공의 초옥에서 하룻밤 묵게 되어 세 사람이 함께 큰방에 들게 되었다. 방이 두 개 뿐이라 계 낭자를 따로 재울 수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낭자, 불편하지만 참아야겠소.”


“아유 장군님, 소녀 걱정일랑 마시와요. 소녀 오히려 장군님께 누를 끼치게 되어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밤도 깊었으니 낭자는 먼저 아랫목에서 주무시오. 우린 내일의 준비도 있고 해서 이따가 잘 터이니…….”


계 낭자가 말끄러미 연개소문을 응시하였다.


“소녀도 잠이 오질 않사옵니다. 이렇게 밤을 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사옵니다.”


계 낭자의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계 낭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낭자를 이 낯선 땅에 남겨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끝까지 데리고 다니기는 해야겠는데...... 아녀자와 더불어 행동하는 것은 영 부자유스럽고……’


생각 끝에 그는 늙은 주인을 찾아가 사정하였다.


“노인장, 어려우시겠지만 부탁 한 가지를 좀 들어주시겠는지요?”

“아니 무슨 부탁이신지?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들어드립지요. 말씀해보시구려.”

“우선, 남자 옷 한 벌만 구해주십시오.”

“누구? 아, 저 낭자 입히시려고요?”

“예, 남장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구려. 이 산 아래에 민가가 있습지요. 그곳에 더러 고구려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한번 구해보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사공은 마을에 내려가 남자 옷 한 벌을 구해왔다. 연개소문이 은자 한 줌을 내밀며 치하하자, 거듭거듭 사양하던 사공은 마지못하여 은자를 받았다.

“생각해보면 주인장은 우리 생명의 은인이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우리를 구해주셨잖소? 은자 몇 푼으로 어찌 그 보답을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 노부가 고맙습니다. 우리 돌궐을 위해 먼 길을 오셨는데, 별 말씀을.”

늙은 사공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남장여인 계은비가 부끄러운 듯 고개 숙이자 연개소문이 빙긋이 웃음을 물었다.
바우도 히죽이 웃으며 농을 걸었다.

“히히히히! 꽃처럼 예쁜 사내이네요!”

은비는 좀체 고개를 바로 들지 못했다.

“계 낭자! 이제부터 낭자는 완전한 장정의 몫을 해야 하는데, 자신 있으신 거요? 만일에 낭자가 아녀자란 것이 탄로 나면, 그 때는…… 일이 여간 난처해지는 게 아니오.”

입술을 살짝 물었다 풀고는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짐짓 남자 목소리를 지어냈다.

“장군님, 잘 알겠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장군님의 뜻에 순응하겠사옵니다.”

바우가 박장대소하면서 뺑뺑이를 돌더니 갑자기 심각해져서 말 고삐를 잡았다.

“자, 갈 길이 바쁘니 어서어서 떠납시다.”

세 사람은 주인 사공에게 공손히 하직인사를 남기고 산 아래로 말을 몰았다.

◇◇◇

배율치명(倍律治明)은 돌궐의 선봉장으로써, 문무겸전의 장군이었다.
그는 당나라 이정과 대치하여, 요락수를 끼고 높이 솟은 금산 북녘에 진을 치고 있었다.
연개소문이 선진(先陳)의 장막이 있는 초소에 이르렀다. 그는 곧 초소를 지키는 군졸에게 돌궐어로 일렀다.

“고구려에서 국서를 받들고 사신이 도착하였다고 아뢰어라.”

그들은 고구려에서 사신이라는 말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연개소문 일행을 정중히 맞이했다. 그리고 초소 군관은 곧장 본진으로 말을 달려 이 사실을 알렸다.

얼마 후, 여러 군관의 안내로 연개소문은 배율치명의 장막에 이르렀다.
배율치명은 친히 장막 밖에까지 나와서 고구려 사신 연개소문을 맞았다.

“원로에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소이까? 본관은 돌궐 선봉장 배율치명이라 하오. 귀국의 대왕마마 성체 무량하시옴을 우리 전하와 문무 조신들이 앙축 경하하옵니다.”

연개소문도 정중한 위의를 갖추고 인사를 교환했다.

“귀국의 성상폐하 성체 무량하옵심을 앙축하오이다. 아울러 귀하와 온 나라 안의 문무귀관들이 만강하심을 고구려 사신 연개소문 본국 성상마마의 성지를 받들어 문안 올리오.”

배율치명은 연개소문을 벙하니 바라보았다.

‘나이가 어려 보이나, 용모와 위풍이 당당하여 얼핏 보아도 비범한 인물이군.’

대고구려 동부총관의 아들 연개소문. 그는 대왕의 성지를 받들고 온 대국의 사신답게 당당한 풍모를 지녔다. 은연  중에 사람을 위압하는 힘이 서려있었다.
그러나 배율치명은 내심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하면 뭐하나. 한 사람의 사신이 어찌 이 급박한 상황의 돌궐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5만군, 많게는 10만대군의 원군이 구름꽃을 피우며 달려올 줄 알았던 배율치명으로서는, 단 한 사람, 시종까지 세 사람이라는 사신의 행차 앞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망만을 되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대단히 반가운 표정이던 배율치명의 얼굴에 차츰 불안의 기색이 감돌았다. 연개소문은 몹시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50전후의 비대한 몸집을 한 배율치명은 이글이글한 두 눈과 좌우 광대뼈가 불거져 얼굴모습이 얼핏 보아도 앞뒤 꽉 막힌 고집불통으로 보였다.
자기 성질을 최대한으로 죽이면서, 배율치명은 다시 정중한 예절로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마침 전하께오서 장막에 행차하여 계시오. 사신께서는 우선 국서를 봉정하시고, 전하를 배알하실 절차를 밟으심이 좋을 듯하오.”

연개소문은 배율치명의 그러한 배려에 내심 고마웠다.

“감사하오이다. 귀국의 대란(大亂)에 도움 되지 못하는 본인을 이처럼 환대하시니 다만 황송할 따름이오.”

그는 소중하게 지녀온 국서를 두 손으로 받들어 배율치명에게 건넸다.

“사신께서는 전하의 교지가 계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귀국의 국서를 전하께 상주하여 대명을 배수하고 오겠소이다.”

국서를 정중히 받들어 든 배율치명이 곧장 총총히 사라졌다.

◇◇◇

돌궐 왕 힐리가한(頡利可汗)은 선봉군 임시 장막 안에서 초조하고 짜증스러운 태도로 교의에 앉아있었다. 그는 가끔 얼굴을 찡그린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돌궐의 시조 아사나(阿史那)는 고창(高昌) 서북 편에 있는 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지방에 많이 서식하고 있는 이리떼와 함께 지냈다는 전설적인 인물인 것이었다.
돌궐은 북으로는 고원지대로서 황막한 사막이 펼쳐져 있고, 서남으로는 중원의 당나라, 동남에는 고구려에 인접하여 지리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어려운 입지조건에서 그들은 유목국가를 이루고 평화롭게 살아왔다. 그러나 중원의 한족은 이들을 평화롭게 살도록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한나라와 위나라 때부터 돌궐을 이이제이(以夷制夷 : 이 나라의 힘을 빌려 저 나라를 제어함)책으로 다스리다가, 결국 수나라 때에 와서는 동 · 서 두 개의 돌궐로 갈라지는 불운을 맞게 했다. 그 후 돌궐은 계속 골육상쟁을 일삼아 국력은 급속도로 미약해졌다.
돌궐 왕은 아사나 이래 통일된 왕국을 이룩해왔다. 그러나 목간가한 이후 서 돌궐이 분립되고, 가한의 아들 대라사가 반기를 들어 돌궐 서부지방의 20여주를 점령하고 자칭 수령이 되었다.
한족은 한나라 이후 돌궐을 평정하려고 최군보(崔君甫) 등 많은 장수를 보내서 갖은 계략을 다 썼지만, 그 때마다 돌궐은 이를 잘 피해갔다. 하지만 수양제 때에 와서는 기어이 동서로 갈라지고 만 것이었다.
이후 수양제는 황문시랑 배구(裵矩)를 돌궐왕 계민가한(啓民可汗)에게 보냄으로써 친선을 표방했지만 그 실은 돌궐이 고구려와 말갈 등 여러나라와의 국교를 단절시키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돌궐은 계속 고구려와 친선을 도모하여 동맹관계의 국교를 유지해왔다.
수나라를 뒤엎고 들어선 당나라의 태종은 이제 천하를 평정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고구려에는 문벌정책을 써서 친당분위기를 조성해놓고, 고구려의 오른팔이며 당나라로서는 북쪽의 화근이었던 돌궐을 먼저 평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정 장군으로 하여금 당나라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돌궐은 장수 배가리(裵可離)를 고구려에 보내서 원병을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자 힐리가한은 다시 장군 아사나두이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원병을 요청했던 것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원병 보내준다는 소식이 올까하여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날이 이젠 지겨워졌다. 모두 때려치우고 싶다.’

힐리가한은 울컥 치미는 울화를 간신히 참고 있었다. 중군에서 무료하게 원군 오기만을 기다리기엔 힐리가한의 성정이 너무나 조급했던 것이다. 국가가 자신의 대에서 없어지느냐, 되살아나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이 중대국난을 당해서, 그가 평정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안일하게 원병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기에는 더할 수 없이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달리 어찌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선봉장 배율치명의 진중에 머무르면서 눈이 빠지게 원병 오기만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힐리가한은 벌떡 교의를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때 시위군관이 들어와 읍하고 아뢰었다.

“마마, 방금 고구려에서 사신이 도착하였다 하옵니다.”

“뭐야? 고구려에서 사신이?”

힐리가한은 귀가 번쩍 뜨였다. 하지만, 원병 온다는 소리가 아니라 사신이 도착하였다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는  맥이 쭉 빠졌다.

“으흐흐흐흐음…… 사신이라고?”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 급박한 판에 한가하게 사신이라니! 누굴 놀리는 거야?

“그래, 사신은 지금 어디에 있다 하더냐?”

“예에, 지금 선봉장 배율치명 장군 막사에서 마마를 배알할 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하옵니다.”

“알겠다. 물러가 있거라.”

힐리가한은 털썩 교의에 주저앉고 말았다. 말갈에서는 이미 5천의 원군이 와서 선봉진에 서 있는 판인데, 고구려는 이제야 겨우 사신을 보냈다니, 은근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배율치명이 장막 안으로 들어왔고, 왕의 용안을 힐끗 살피면서 허리를 굽혔다.

“마마, 고구려국에서 사신 연개소문이 도착하여 국서를 봉정하였사옵니다.” 

배율치명이 두 손으로 국서를 받들어 힐리가한에게 바치자, 그래도 행여나 싶은 마음에 힐리가한이 급히 국서를 펴서 눈동자를 열심히 굴렸다.

「돌궐 국왕 전하
경애하는 전하와 왕후 전하의 성체 만강하옵기를 바라오. 아울러 전하의 크신 성덕이 온 나라 안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미칠 것을 기원하오. 지난번 귀왕 전하께서 짐에게 보내신 사신 아사나두이 장군을 통해 당나라의 군대가 대거 침범하여 귀국의 전운(戰雲)을 크게 번지게 하여, 전하의 종묘사직이 위급하다는 국서를 받고 짐은 크게 경악을 금치 못하는 바이오. 동맹국인 전하의 나라가 이토록 위급하니 짐인들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것이리오?  이에 짐은 곧 원병을 보내려 하나 짐의 나라 안 형편이 더욱 미편(未便)하여 , 이로 인해 국론이 양립되고민심이 나빠질까 저어하여 오늘까지 국론을 밝히지 못하고 짐의 결단이 지연되어 온 바이오.
짐이 대통을 이어 고구려 종묘사직을 지켜오는 동안, 내외로 환란이 끊이지 않음은 짐의 부덕한 소치라 하더라도, 짐의 뜻은 억조창생이 바라는 바를 또한 저버릴 수 없는 바라, 전하는 이러한 짐의 충정을 깊이 통찰하여 짐 홀로의 뜻을 펴지 못하는 마음을 살피기 바라오... 귀국의 사정을 자세히 탐문하여 국론을 통일코자 사신 연개소문을 전하께 보내는 바이니, 전하의 넓으신 아량으로 짐의 어려운 처지를 살펴주시기 바라오. 오직 귀국이 위태로울 때 적기에 파병하지 못하는 것만을 민망하게 생각할 따름이오.」



국서를 다 읽고 난 힐리가한의 눈이 잉걸불처럼 타고 있었다. 얼굴엔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숨결마저 거칠어지더니 얼굴근육이 극심하게 떨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후들후들 떠는가 싶더니 기어이 국서를 좍! 찢어 양손에 들었다. 생각 같아선 조각조각 내고 싶었지만, 그래도 국왕의 체통은 지켜야하기에 두 조각으로만 내고 말았다. 이윽고 두 조각 난 국서가 배율치명의 머리에 툭 툭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