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

新연개소문전 -북국에 핀 열꽃 5(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0. 16. 22:07

 

연개소문 이야기 [26화] 북국에 핀 열꽃 5

“장군님!”

연개소문을 기다리느라 밤새 한 잠도 못 이루고 마냥 쪼그리고 앉아있던 계은비가 앉은 채로 연개소문을 불렀다. 얼른 몸이 일으켜 지질 않는 거였다.


“낭자! 어찌 그리 힘이 없어보이오?”


“…….”

밤새 놀라움과 무서움에 벌벌 떨던 그녀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꺼이꺼이 울면서, 말없이 연개소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피와 흙으로 뒤범벅된 옷이었다. 연개소문은 그녀의 우는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산도 물도 생소한 만리타국에서, 단 한 사람 의지하던 남자를 전장에 보내놓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는가 생각하니 그녀가 한없이 측은하였다.

“낭자, 내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는데 왜 울어? 걱정 마오.”

“장군님!”

그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계은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낭자! 내, 낭자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너무 걱정 마오. 오히려 내가 민망하구려.”

그녀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서 대야에 물을 떠왔다.

“세수 하십시오, 장군님.”

“어? 울음 그친 거요?”

상끗 웃는 그녀가 몹시 귀여웠다.
말끔히 씻고 나자 계은비가 조용히 물었다.

“아침식사는 어떻게 하셨나요?”

“허어, 힐리가한의 후대로 잘 먹고 오는 길이오.”

“아, 드셨군요. 그럼 어서 주무세요. 피곤하실 텐데.”

연개소문은 그제야 일어나 침상 위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이 들려던 연개소문의 눈에 장막 한 귀퉁이에 놓인 아침상이 들어왔다. 연개소문은 계은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낭자는 아직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구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고는 말끄러미 연개소문을 마주보고 있었다. 고혹적인 눈매였다. 순간, 연개소문은 그녀를 으스러지게 안아보고 싶었다. 그녀를 안아야만 단잠에 빠질 것 같았다. 이글이글 타는 눈빛을 감추질 못한 채로,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그녀가 재빨리 달려들어 그를 안고 침상에 도로 눕혔다.

“가만……. 가만 계시어요.”

이윽고 개소문을 타고 앉은 은비는 따끈따끈해진 손길을 뻗쳐 그의 바지를 내려버렸다.
그의 몸이 어느새 여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 아늑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아, 좋다……”

향긋한 여인의 체취가 연개소문의 몸을 세포 하나하나 속속들이 어루만지면서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오랜 포옹. 깊디깊은 입맞춤. 끝 모를 행복감이 두 사람을 감쌌다. 그리고 얼마 후, 연개소문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요란스레 코를 골면서, 그는 누가 목을 베어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너무 잘생긴 낭군님…….’

조용히 연개소문의 품속을 빠져나온 계은비는 다소곳이 앉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연개소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연개소문의 승전은 돌궐군의 사기앙양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사실 당나라는 백평산과 대치한 흑산을 점령하기 위해 그 전초전을 폈던 것이었다. 만일 돌궐군의 전진(前陳)인 금산(金山)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결국 흑산은 자연적으로 그 발판을 잃는 결과를 빚게 되어있었고, 이러한 형국에서 연개소문이 당나라군을 일거에 물리쳤던 것이다. 힐리가한을 비롯한 배율치명 등 장수들의 관심이 일제히 연개소문에게로 쏠렸다.
비록 5만 원군의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단 한 사람의 장수로써 능히 5만을 물리칠만한 기개가 있었다.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나라군의 사기가 한풀 꺾어져 있고 힐리가한이 나를 신임하는 바로 이때, 어떻게 해서라도 고구려의 관문인 백평산을 점령해야 한다.’

이 산만 점령해놓으면 아무리 완강한 당나라군일지라도 돌궐을 칠 수 있는 힘을 잃으리라는 계산이 선 것이었다.  

“장군님! 고구려에서 총관부 군관 두 명이 소식을 갖고 왔사옵니다.”

“뭣이?”

연개소문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에 한두 번 소식이 있었지만, 이번은 너무 오랜만인 것이었다.

“어서 들어오도록 해라.”

“예에~”

새삼 고국의 산천이 그리웠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윽고 바우가 두 군관을 안내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장군님, 그간 평안하시었사옵니까?”

두 군관이 연개소문에게 군례를 올렸다.

“오냐, 멀고 험한 땅에 오느라고 너희들이 수고가 많았다. 그래, 집안에는 별고 없고?”

“녜에, 대감마님 내외분과 작은 방 마님께서도 모두 건강하시옵니다.”

“아 그러냐? 나라 안 정세가 궁금하구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한 군관이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어 올렸다.

연개소문은 부친 연태조의 서찰을 펴 들었다.
부모님과 수련. 또 스승도 모두 무사 무탈하며 하루빨리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그가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돌아오지 말고 머물러 있으면서 계속 돌궐을 도와주라는 엄명이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라는 부친 연태조의 자상한 지침이 들어있는 편지였다.


‘돌아갈 수 없다니…….’

연개소문은 부친의 따뜻한 정이 어린 서찰을 가슴에 소중히 품었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라’는 한 마디 속에는 부친 연태조의 아들에 대한 기대와 근심스러움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연개소문은 오랜만에 배율치명 장군의 막사를 찾았다. 그러나 배율치명은 마침 자리에 없었다. 중군에 있는 힐리가한을 배알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내친걸음에 말을 달려 중군 진영으로 향했다.

힐리가한은 배율치명과 전군의 유문정(劉文靜) 등을 불러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연 장군? 어서 들라하여라!”

잠시 후, 연개소문은 군관들의 안내로 어전에 부복하였다.

“전하, 고구려 사신 연개소문 문후 올리옵니다. 옥후 무량하시옵기를 삼가 바라옵니다.”

“오, 장군, 마침 잘 오셨소. 짐이 그렇잖아도 장군을 한번 만나려고 하던 참이라오.”

“전하, 황공하옵니다.”

“장군, 어서 이리 올라앉으시오.”

힐리가한이 연개소문을 자기 바로 옆자리에 앉혔다.

“전하! 본국 소장의 부친께서 총관부 군관을 보냈사옵니다. 부친께서 전하께 문후를 드린 것으로 아뢰오.”

바로 그때 시녀가 와서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마마, 고구려의 사신 연개소문 장군께서 진상하신 보옥 한 상자를 대령하였사옵니다.”

힐리가한은 커다란 입을 한껏 벌리며 연개소문을 향해 치하하였다.

“대감께서 귀한 보옥을 짐에게 보내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래, 고구려 대왕폐하와 대감께서는 옥체 무량하시다 하온가요?”

“전하, 너무 분에 넘치는 말씀을 내리시와, 소장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전하께옵서 성려해주신 음덕으로 본국 대왕마마와 소장의 부친께옵서는 무량하신 것으로 아뢰오.”

“짐은 오히려 장군의 슬기로운 큰 공을 제대로 치하하지도 못하고 있는 이 때에, 귀 부친의 귀한 선물을 받고 보니 오로지 송구할 뿐이오.”

“전하, 변변치 않은 진상, 오히려 황공하올 따름입니다.”

힐리가한은 다시 옆의 배율치명에게 분부를 내렸다.

“고구려 군관들이 돌아갈 때, 짐도 사례를 베풀어야 할 것이니, 경은 알아서 처리하기 바라오.”

배율치명이 머리를 조아리고 나가자, 막사 안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힐리가한과 배율치명 등 돌궐의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 모두 기대에 찬 시선들을 연개소문에게 보내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늠름하였고, 신비를 지닌 듯한 눈동자는 강렬한 빛을 뿜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신중하게 열렸다.

“전하, 지금 당군이 점령한 백평산을 시급히 탈환해야 하옵니다. 그렇지 않고는 백평산 진지가 너무 높아서 금산의 진지는 약화되옵니다. 만에 하나, 금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흑산의 본진도 맥을 쓰지 못할 형세에 떨어질 줄로 아옵니다.”

“장군의 의견이 옳도다!”

힐리가한이 두 손으로 무릎을 쳤지만, 배율치명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장군, 그 의견이 명안이긴 하나, 백평산은 당나라 명장 이정이 있는 본진이오. 그런데 그 어떤 기발한 묘책으로 그곳을 탈환할 수 있다는 말씀이오?”

좌우를 휘둘러보고 나서, 연개소문이 목소리를 낮췄다.

“전하, 소장이 책임지고 완수할 터이니 심려 마옵소서!”

그는 두툼한 자기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가 놓고는 미리 짜놓았던 전략 계획서를 배율치명에게 내밀었다. 힐리가한과 배율치명, 유문정 등이 계획서를 돌려가며 읽었다.

“장군의 계책은 과연 기발합니다.”

유문정이 낮은 소리로 감탄사를 발했다.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백평산 공략의 계책을 상의하였고, 그것을 극비리에 추진시키기로 결정했다.
연개소문은 각 군이 맡아야 할 일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했다.

 ◇◇◇

     
별안간, 돌궐 선봉이 당의 군진이 있는 백평산 기슭을 습격했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배율치명과 유문정 등의 지휘 하에 맹공격이 개시되어 연 3일에 걸친 대공세가 펼쳐졌다.
당나라 진영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야습 작전을 펼치기 위해 병력을 산기슭으로 이동해놓고 있었는데, 만반의 준비태세로 진지를 구축한 이정이 직접 진두지휘하기로 했다. 저번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한 설욕전을 할 작정인 것이었다.
3일째 새벽 으스름을 타고, 당나라의 대군이 대거 돌궐 진영으로 공격해왔다.
이미 이정의 계략을 간파하고 있었던 돌궐은 아주 태연히 당의 기습군을 맞아들여 별 혼란 없이 잘 싸웠다. 그리고 당나라군이 돌궐 선봉의 진영으로 깊숙하게 들어갔을 무렵에는 금산 초입에 매복했던 돌궐 기병이 후미를 짓이기며 터져 나왔다.
잠시 소란스러운 교전이 계속되는 동안 이미 적진에 깊숙이 파고든 당나라군은 순식간에 독 안에 든 생쥐 떼가 되어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수세에 몰리고 있었던 돌궐 선봉진은 다시 전열을 갖추었다. 그리고 당황하는 당나라군을 사살하며 차츰차츰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저희들끼리 부딪치면서 갈팡질팡하였고, 그들의 선봉장은 퇴로를 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와아!” 하는 함성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포위망을 압축해가던 돌궐 기병의 바로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와아!

돌궐군 기병은 배후에서 짓쳐오는 당나라 후원 부대의 압력을 받으며 샌드위치 식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돌궐 기병장 유문정은 아연실색하였다.

“빨리 혈로를 뚫어랏! 빨리!”

그는 분산되는 돌궐 기병을 독려하였다. 금산 초입으로 들어가는 길을 뚫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원체 수가 많은 당나라 군사들과의 싸움이었다.
돌궐의 2천 기병은 점점 힘이 기진맥진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상자의 수도 점점 늘어갔고, 사기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금산 진지에서 당나라군과 싸우던 선봉장 배율치명도 증원된 당나라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중과부적이었다.


‘후퇴명령을 내려야겠군.’

배율치명이 후퇴명령을 내리려고 징을 울리려는 찰나. 언뜻 그의 눈에 불빛이 보였다.
당나라 본진에서 치솟는 불꽃이 온통 하늘을 뚫을 듯이 날뛰었고, 이어서 어디선지 기고만장한 함성이 천지를 뒤흔드는 거였다.

“됐어!”

배율치명은 무릎을 쳤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주살하라! 돌격! 돌격이다! 돌격신호를 높이 올려라!”

곧이어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밤하늘을 쥐락펴락하였다.
돌궐군은 잃어가던 힘을 되찾아 당나라군을 요격하기 시작했다.

“뭐야?”

한참 돌궐군사를 몰아붙이느라 여념이 없던 이정은 깜짝 놀랐다. 마냥 쫓기던 돌궐군사들이 일제히 한 곳을 보고 와! 와! 함성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도 같은 곳을 돌아보았다.

“앗!”

그는 외마디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백평산의 당나라 본진이 활활 타고 있는 것이었다. 쫓기던 돌궐군사들의 함성은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함성이 백평산 뒤쪽에서 화염과 함께 온 산을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 배수진을……. 놀라운 놈이 있다!”

명장 이정은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하니 불꽃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배율치명은 가만있질 않았다. 의기충천해진 배율치명의 선봉진이 총공격을 가해온 것이었다. 퇴로와 진로가 동시에 차단된 셈이었다.
우물쭈물할 여유가 없었다. 앞뒤에서 협공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전의와 질서를 한꺼번에 박탈당하고 갈팡질팡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이정은 전군에게 퇴각명령을 내렸다.

“모두 저 반대편 능선으로 흩어져 빠져나가라!”

명장 이정 역시 전력을 다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돌궐의 동도를 단숨에 점령하려던 이정의 계획은 연개소문의 치밀한 전략 앞에 산산조각 나고 만 것이었다.    


‘오랜 세월 수중에 넣어두었던 백평산을 잃었다. 오늘 새벽 차지하려던 금산의 진지도 물 건너 가 버렸다. ……아아, 누군가? 어떤 놈이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가?’


드디어 야망을 이룰 때가 왔다고 설레였던 이정은 오히려 자신의 대군이 풍전등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 너무 억울했다. 그러나 노장 이정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고,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나와 전군을 한 장소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부장을 급히 불러 명령을 하달시켰다.

“전군은 백평산 서편 능선을 타고 후퇴하라!”

장수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군 · 중군 · 후군이 모두 질서정연하게 산의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