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

新연개소문전 -북국에 핀 열꽃 1(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0. 10. 22:59

 


연개소문 이야기 [22화] 북국에 핀 열꽃 1​

‘어떡하지?’


연개소문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족히 10만대군은 되어 보이는데?’

제아무리 만부부당*의 연개소문이지만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망치는 것도 그렇다. 혼자라면 어찌어찌 도망 칠 수가 있겠으나, 바우와 계 낭자가 걸렸다.

‘승산이 서질 않아!’

산 아래서는 이미 많은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산을 타고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작정하고 달아나는 것만이 상수였다.


“자, 말머리를 돌려라!” 


일행은 잽싸게 말머리를 돌려 산꼭대기를 향해 치달렸다.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달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뒤에선 여전히 수많은 당나라 군사가 함성과 함께 몰이꾼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앗!”


정신없이 달리던 연개소문은 별안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고, 그 자리에서 우뚝 말을 멈췄다.
바로 앞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우린 이제 죽었습니다.”


“아아, 어떡해요?”


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캄캄했다. 당나라 군의 아우성만이 점점 더 크게 들려올 뿐이었다.


“이대로 잡히느냐, 떨어져 죽느냐……. 과연 죽는 길 밖에 없단 말인가?”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절벽 위를 올려다보자, 하늘엔 한가한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여기서 끝인가……



더욱 기세가 맹렬해진 당나라군의 추적.
절망이란 괴물이 연개소문의 온 몸을 갉아대기 시작했다.
초여름 한낮의 태양이 이글이글 타는 듯이 내려쬐고 있었고, 연개소문의 이마에선 팥죽같은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심산유곡에서의 진퇴양난이라니!’


온통 절벽으로 둘러싸인 막다른 길이었다. 이제 최후의 수단은 추적해오는 당나라군과 정면충돌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와아!


와아!

당나라군이 점점 절벽이 있는 길로 육박해오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안광은 전에 없이 강렬한 불길을 담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장군님! 저기 생구(生口)라고 글씨가 있습니다.”


“무엇이, 생구?”


그의 머릿속으로 번개같이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음양학에서 사람의 머리에 숨구멍이 있듯이 산 또한 그러하다. 이 바위만 움직여보면 반드시 뚫린 길이 있을 법도 하다.’


그는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생구>라고 적힌 바위에 대들었다.
계낭자도 바우도 모두 한 몸이 되어 죽을힘을 다해 바위를 당겼다. 그러자 그 커다란 바위가 움찔움찔 앞으로 밀렸다. 젖혀진 바위 안으로 들여다보니 어두컴컴한 가운데 희미한 통로가 보였다. 어차피 갈 곳도 없어서, 세 사람은 우선 안으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굴의 바로 안벽에 자세한 안내도가 새겨져 있었는데, 통로는 두 개가  있다고 설명되어있었다. 한 통로는 돌궐의 동도(東都)로 가는 길, 또 한 통로는 남쪽의 중립지대로 통하는 길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비로소 연개소문의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불뚝불뚝 기운이 용솟음쳤다.


“서둘러라! 말을 이 굴로 끌어들여!”


바우와 계 낭자가 마치 입에 혀처럼 민첩하게 움직여주었다.
당나라 군사들의 함성이 얼마 머지않은 곳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가늠하면서, 세 사람은 다시 합세하여 그 큰 바위를 원래 위치로 돌렸다. 입구가 갑자기 깜깜해지자, 연개소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입구가 빈틈없이 봉쇄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정의 군사들은 그들이 사라진 바로 앞에서 우왕좌왕할 것이었다.

굴은 그리 넓지 않아서 말을 타고 갈 수는 없었다. 일행은 말고삐를 잡아 쥐고 돌궐 동도로 향했다. 얼마를 걸었는지도 모르게 한참을 걸었다.


“아! 저기 좀 보시와요!”


수 백 평은 될 만한 널따란 호수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수심이 얼마나 되는지, 물은 검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도저히 그냥 건너갈 수는 없겠군.”


“동굴 안에 호수라니! 천혜의 요새 아닌가.”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세 사람은 털썩 호수 앞에 주저앉아버렸다.

 
‘헤어날 길이 없을까?’


연개소문은 사방을 휘둘러보았지만 주위가 어두컴컴하여 멀리까지는 볼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바우와 계 낭자는 허탈한 심정에 빠져 멍하니 호수의 수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제각기 넋을 놓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찌걱찌걱 노 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개소문은 귀가 번쩍 뜨였다. 소리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분명 배다!”


그의 목소리는 사뭇 떨려 나왔다.


“하이고, 서방님. 이 안에 배가 있다니요? 설마......?”


의아한 표정으로 상전을 멀뚱히 보던 바우의 귀에, 배의 노질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으아! 진짜네! 정말이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그들 모두는 일시에 숨을 훅 몰아쉬었다. 그리고 다시 호수의 수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앗! 저기 배가 옵니다.”


“어디요?”


“장군님, 저 맞은편 암벽 아래를 보시와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분명 배 한 척이 이쪽으로 향해 오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연개소문은 뛸 듯이 기뻤다. 그는 손나발을 만들어 입에다 붙이고 크게 소리쳤다.

 
“여보시오, 뱃사공!”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뱃사공은 점점 더 빠르게 배를 저어오고 있었다.

배는 호수의 수면을 짤박짤박 때렸다가 젓다가, 쿡 찔렀다가 휘저었다가 하면서 세 사람이 서 있는 바로 근처에 와서 멈췄다. 꽤 큰 배였다. 세 필의 말과 세 사람이 충분히 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되었다. 연개소문은 조급한 마음을 꾹 누르고 손짓을 하였다. 


“사공, 조금만 더 와주시오!”


그러나 사공은 약간 경계하는 몸짓으로 일행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는 후줄근한 검은 색깔의 옷차림을 한 노인으로써, 백발성성한 수염이 그 나이를 짐작케 했다. 하지만 노 젓는 동작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힘이 넘쳐 보였었다. 노인이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노인장, 죄송하지만 우리를 좀 건너다 주시겠소?”


사공은 도무지 말을 못 알아 듣겠는지 벙하니 보며 한 손을 입에 가져가 수화라도 시작하려는 것 같더니 포기하고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되오?”


그러자 뭔 소린지 구시렁거리는데, 거기서 돌궐 말이 툭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아하! 돌궐?”


재빨리 눈치 챈 연개소문은 능숙한 돌궐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노인장, 혹시 돌궐 사람이신가요?”


그제야 사공이 슬며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렇소. 나는 돌궐 사람이오. 그런데 당신네는 대관절 뉘시오?”


“우린 고구려 사람들인데, 돌궐에 사신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호, 그런가요? 귀하신 분들이네. 그런데 이 동굴은 어찌 알고 들어오신 거요?”


연개소문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사공은 반가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이 부랴부랴 배를 바싹 갖다 댔다. 세 사람은 천천히 말부터 배에 싣고 모두 올라서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배는 잔잔한 물결을 헤치며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어느덧 배가 반대편 암벽 쪽에 닿았을 때쯤, 갑자기 물소리가 요란해지며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물의 출구였다. 가파른 돌계단으로 된 물의 출구는 자연히 폭포를 이루며 낙하하고 있었는데, 물이 그리로 빠져서 요락수와 요수(압록)로 흘러들고 있었다.
물의 출구 바로 그 옆에 또 돌문이 있는 모양인지, 사공이 커다란 빗장 같은 것을 가져다가 돌을 밀어붙였다. 눈앞에 울창한 수풀이 노루꼬리만큼 남은 햇살을 쪼이고 있었다.


“하하! 바깥세상입니다!”


바우가 껑충껑충 뛰면서 좋아하였다.
배에서 내린 연개소문 일행은 사공의 안내로 무사히 굴 밖으로 몸을 뺐다.

요행히 돌궐 선봉군이 장악하고 있는 고장이었다.
굴 밖 능선에는 늙은 사공이 거처하는 초가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옆에는 기둥을 붉은 색으로 칠한 낡은 사당이 있었다.


‘이렇게 외진 곳에 사당이라니?’


너무 이상하여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 이 사당은 누구를 모신 곳이오?”


“예에! 고구려의 왕신을 모신 사당입죠. 그 누구건, 이 왕신께 축원을 올리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묻지 않은 말까지 주절거리는 노인의 얼굴에 알지 못할 자랑스러움이 반짝이고 있었다.


“고구려의 왕신이라니? 어느 왕인가요?”


“그야, 고구려 시조 동명왕신입죠.”


“아! 동명성왕!”


연개소문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감격한 표정으로 바우와 계 낭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아! 우리도 대왕님 앞에 정성들여 축원을 올립시다!”


세 사람이 숙연한 자세로 사당엘 들어섰고, 동편에 안치된 동명대왕상 앞에 엎드려 세 번 절을 하였다. 절을 마치고 난 연개소문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누가 이 사당을 세웠을까? 그것도, 이토록 인적도 드문 험준한 곳에다가……’


그는 동명대왕상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동명상 지석 밑에는 영락대왕(永樂大王=廣開土大王)이라는 연호와 구토(舊土옛땅)를 회복한 기념으로 지었다는 자세한 사유가 새겨져 있었다.
연개소문은 뛸 듯이 기뻤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용기와 조국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준, 영락대왕의 바로 그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아, 스승께서 온 열정을 쏟아 강조하시던 대고구려의 자주적 기상과, 아버님이 생명을 걸고 주장하시던 북벌(北伐)의 신앙이 바로 이곳에 살아있었다. 그렇다! 대고구려의 오늘을 있게 한 영락대왕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대왕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여 요하의 동서 천리를 우리의 땅으로 한 위대한 군왕이시다. 그러나 오늘은 과연 어떠한가!’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치를 떨었다.


‘영락대왕께서 평생의 사업으로 고심참담 이룩한 고구려의 대 영토가 오늘날에 와서 이토록 위협을 받고 있다니! 대왕의 영특하고 자주적이던 기상과 무예를 중시하던 정신이 이토록 퇴락할 수 있는가?…… 흐으…… 매국노! 당나라의 침략이 두려워 당나라와 화친을 맺어? 그것이 왕으로서의 진정한 태도인가? 천만에! 대고구려는 당나라 따위의 한족(漢族)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영락대왕은 한족의 무리를 조상의 땅에서 완전히 축출했고, 나의 스승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을 궤멸시켜 수나라를 중원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 기백, 그 기상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아, 안타깝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조용히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당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사당의 곳곳에는 말을 타고 종횡무진하며 적군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리던 영락대왕의 모습이 어려 있는 것만 같았다.
멀리 저녁노을이 사당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냐, 내 뼈가 부서져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땅에서 한족을 영원히 몰아내리라. 옛날의 영광을 다시 일으키고야 말리라.’


연개소문은 수없는 맹세를 하고 또 하였다. 한편으론 어쩌면 이 사당이 이토록 깨끗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노인을 돌아다보았다. 노인은 말없이 미소만 지어보이고 있었다.


“이 사당에 관해서 궁금한 점이 많으신 거 같소. 그 내력을 말해드리리다.”


노인은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



사당이 세워진 후 2백년이 지나는 동안, 이 사당에 대한 기억이 고구려인들에겐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당은 퇴락하고 이 일대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잊혔던 기암의 요새지에 돌궐 왕이 위(魏)나라 군사들에게 쫓겨 이곳에까지 오게 되었다. 그때 돌궐 왕은 현재의 이 사당 근처에다 장막을 쳤다.
그날 밤, 돌궐 왕은 위의(威儀)를 갖춘 한 노인을 만났다.


“그대가 이 지대를 유지하려면 이곳에다 나의 사당을 중건하라. 그리고 나의 석상을 다시 안치하라. 그러면 내 그대를 도와주리라. 부디, 이 말을 잊지 말라.”


말을 마치자마자 노인은 사라졌고, 돌궐왕은 노인을 부르다가 깨어났다.
꿈이었다.
하도 기이하여 부하를 시켜 장막 주위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샅샅이 조사하고 온 부하들이 왕께 보고하였다.


“대왕마마, 장막 부근에서 퇴락한 사당을 발견했사옵니다.”


왕은 급히 부하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