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27화] 북국에 핀 열꽃 6
쩌렁쩌렁 산을 때리며 울려 퍼지는 고함소리가 당나라 군사들을 더욱 혼비백산하게 했다. 그러나 이정은 풍부한 경험을 한 노장 답게 전군에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착실히 지휘하였다. 한쪽에선 싸우고, 한쪽에선 후퇴하고, 그렇게 반복하며 30여리를 후퇴하고 나자 더 이상 추격이 없었다. ‘내가 싸움터에 온 후 이토록 커다란 참패를 당하기는 이번이 처음이군……’
백평산을 점령하여 막사와 진세를 갖추느라 진두지휘하면서, 연개소문은 짐짓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내 계략이 들어맞아 대승을 이루긴 했지만, 이정은 명장이다. 언제 또 역습을 해올지 알 수 없다……’ 돌궐의 장수들이 워낙 이정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군세마저 미약한 돌궐 군이 백평산을 오래 점령하고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닐 거였다. “전하, 소장에게 군사 3천만 주신다면 적진의 후방을 협공할 수 있사옵니다. 기필코 백평산을 탈환할 각오입니다.” 지난번 연개소문의 신출귀몰한 용병술을 체험했던 힐리가한은 연개소문의 요청을 쾌히 받아들였다. 바로 그래서 연개소문은 육화진의 생구를 거쳐 중구(中口)로 빠져나와 공세를 취한 것이었고 그 견고한 육화진이 빛을 잃고 허무하게 무너졌던 것이었다. 백평산을 점령했다는 보고에 접한 힐리가한은 승전고를 높이 울리며 기뻐 어쩔 줄을 몰랐고, 그날부터 3일간을 두고 백평산 새 진영에서는 승리를 자축하는 큰 잔치가 베풀어졌다. 돌궐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연 장군! 후한의 제갈량이라고 일컫는 당나라의 명장 이정도 혼비백산 시켰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오?” “전하! 변변치 못한 소장을 이리도 과찬해주시오니 황공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장군, 너무 겸양 마오. 짐은 장군이 싸우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었소. 장군이 뒤에서 함성을 올리며 당나라 군 장막에 불을 질러 불길이 충천하자 이정이 당황하여 허둥지둥 달아나던 그 모습, 하아, 통쾌하오. 그리고 또 그뿐이겠소? 장군이 마상에서 장창을 휘두르며 당군을 추격 시살하던 날쌘 모습은 아직도 짐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소…… 아아, 눈에 선하구려.” “전하, 황공하옵니다. 오늘의 전공은 소장의 공이 아니오라, 정면에서 배율치명 장군과 유문정 장군이 당나라 대군을 적시에 공략하였기 때문이옵니다.” 그러자 뚱해있던 두 장군의 얼굴이 환해졌다. “장군, 지나친 겸양의 말씀이오…… 하긴, 정면에서 당나라 대군을 맞아 싸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배율치명이 멋쩍게 미소 지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에서 온 두 군관에게 미리 써놓은 편지를 지참시키고 고구려로 보낼 준비를 하였다. 힐리가한도 연개소문의 전공을 치하하는 글을 연태조에게 보내는 동시에 많은 예물을 곁들여 답례로 보냈다. 드디어 그들 두 군관은 백평산을 넘어 고구려를 향해 길을 떠났다. 백평산 밖에까지 후퇴하여 진을 친 당나라의 명장 이정은 울분과 치욕을 동시에 씹고 있었다. 그는 설욕의 그날을 위해 온갖 지략을 짜내는 데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바로 그래서 이정은 정양도 총관이 되었으며, 울지경덕(蔚遲敬德)은 좌군, 장보상(張寶相)은 우군을 삼고, 자신은 친히 중군을 인솔하여 침공, 백평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8월 어느 날,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있던 이정은 시종군관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장군님! 고구려에 가 있는 이대룡 사신으로부터 사람이 왔습니다.” “들라하라.” 젊은 청년이었다. “장군님, 소인 고구려 평양성 이대룡 대인의 서찰을 소지하고 문안드리옵니다.” “아, 그런가? 어서 보자.” 「…….」 ‘음…….’ 이정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놈이 바로 연개소문이었어?’ 이정은 가슴이 써늘하였다. ‘뜻밖의 강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자를 없애버려야지!’ 이정은 태종에게 상주하여 황제의 명의로 힐리가한에게 국서를 보내기로 계획하고 추진시켰다. 당나라 태종의 국서를 받아 읽은 돌궐 왕 힐리가한은 야릇한 웃음을 깨물었다. 「……. 돌궐이 지금 동과 서로 갈려서 골육상쟁을 계속함을 매우 안타까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주국인 힐리가한의 하해 같은 큰 덕으로 관용을 베푸시면 동·서 돌궐은 평화를 되찾을 것이니, 그리만 되면 당나라도 화친에 응하여 물러가겠습니다. 단, 친선을 추진함에는 조건이 있는 바, 수나라 양제의 황후 소씨(蘇氏)와 양제의 손(孫) 정도(貞道)가 돌궐에 망명 중이니 이를 돌려보내는 한편 장군 유문정과 고구려의 사신 연개소문을 친선사절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힐리가한의 마음이 흡족하지 않을 리 없었다. 친선의 조건들이란 것만 보아도 그렇다. 소 황후만 해도 본인이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자청했으니 별 문제 없고, 두 장군을 사절로 보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누가 가든지 가기는 가야 하는 거다. 헌데, 다 좋은데, 연개소문이라니!’ 마음이 찝찔하였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안위를 가지고 돌궐의 안위와 바꿀 수는 없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그는 유문정과 연개소문을 불렀다. “고구려 사신 연개소문은 들으오! 장군은 이제까지 짐을 위해 크나큰 공을 세워주었거니와, 이제 또 짐이 장군에게 청이 있으니 들어주시기 바라오.” “전하, 어명을 받들겠나이다.” “고맙소, 장군. 지금 당나라에서 사신과 국서가 도착하였는데, 우리 돌궐에 화친을 제의하였구려. 이에 장군께 그 중재사신이 되어 달라 부탁하는 거요. 유문정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짐을 위해 한 번 더 수고해주기를 바라는 바이오.” ‘이미 인질이 되어있는 몸……’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그것이 함정인 줄을 피부로 느꼈지만, 연개소문은 수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당나라는 한 번 가보고 싶은 나라이기도 했다. “전하, 분부 봉행하겠사옵니다.” “장군, 진정 고맙구려.” “과분하신 성려, 망극하옵니다.” 힐리가한은 유문정에게 분부했다. “경은 고구려 사신 연개소문 장군을 모시고 돌궐 사신의 신분으로 당나라를 다녀오도록 하오. 사신 출발의 모든 의식과 절차는 따로 준비하리니 지체 없이 떠나도록 하오.” “마마, 소신 어명 봉행하겠나이다.” 연개소문은 마음이 착잡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의 실정을 배워오려던 것은 고구려에서부터 품어온 생각이었다. 스승 을지문덕의 언질이 있기도 했었다.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한다면 그는 연개소문이 아닐 거였다. 그러나 바우와 계은비가 마음에 걸렸다. 장막에 돌아온 연개소문은 바우와 계은비를 불러놓고 차분히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필시 당나라 측의 함정일 거지만, 괜찮다. 내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걱정이구나. 돌궐엔 같이 왔지만 당나라엔 같이 갈 수 없는 형편이니 신경이 쓰인다. 모쪼록, 두 사람은 내가 일러 준 대로 처신하고 행동하여, 추호도 실수가 없도록 해라.” “예, 장군님…….” 바우는 초조하고 슬픈 낯빛으로 막막히 연개소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낭자, 울지 마오. 부디 침착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기 바라오.” “장군님, 부디 귀체 보중하시옵고…….” 그녀의 말끝이 울음소리에 삼켜져 버렸다. 북국의 여름은 8월 중순인데도 기온이 급강하하여 아침저녁이면 흡사 늦가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부터 까치가 울고 가는 걸 보니 오늘은 기쁜 소식이 오려나 보다.” “장군님, 아마도 기다리시는 돌궐의 사신이 오늘 오려는 모양입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의 이정은 입가에 은은한 웃음을 흘렸다. “글쎄다……” 그는 산기슭으로 눈을 돌렸다. 발아래 능선의 계곡을 끼고 동서로 뻗쳐나간 계곡의 좌우편에는 10만대군이 주둔한 장막이 질서정연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아래는 광대무변한 대평원이 질펀하게 깔려 있었고, 계곡의 진영과 넓은 광야에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능선에서 대군의 장막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던 명장 이정은 바른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여봐라, 급히 내려가 사신을 맞이할 차비를 하도록 하라!” 옆에 서 있던 군관이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자, 이정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장막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간단한 차림의 평복을 벗고 청색 바탕에 붉은 선이 쳐진 화려한 총관복으로 갈아입었다. “장군님, 돌궐에 갔던 울지경덕 장군께서 돌궐 사신을 대동하고 와서 지금 장막 밖에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아뢰오!” 당직군관이 장막 안으로 들어오며 보고한 것이었다. “알았다. 어서 이리로 안내하라.” “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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