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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연개소문전 -북국에 핀 열꽃 7(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0. 18. 22:45

 

​연개소문 이야기 [28화] 북국에 핀 열꽃 7

군례를 올린 군관이 조심스런 동작으로 장군의 앞에서 물러났다. 이정은 장막 안을 한 번 훑어보았다. 방안은 이미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잠시 후, 군관의 안내로 울지경덕이 유문정과 연개소문을 대동하고 장막 안으로 들어섰고, 울지경덕이 이정 앞으로 나서며 군례를 올렸다.


“장군님, 그동안 옥체 무량하시옵니까?”


“장군, 원로에 수고가 많았소. 나야 장막 안에 있는 몸, 장군이 어려운 일을 수행하기에 수고가 막중하였을 것이오.”


두 사람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연개소문과 유문정은 10여 걸음 뒤에서 안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울지경덕이 잠시 이정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하자, 이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귓속말을 끝내고 나자, 이정이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두 분 귀하신 장군님을 맞게 되니 큰 영광이옵니다. 어서 이리들 올라오시오.”


“장군님, 안녕하십니까? 소장은 돌궐의 유문정이라 하옵니다.”


“원로에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이다. 장군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아는 바이오.”


유문정은 이정의 환대에 적이 마음이 놓였다. 이정은 그런 유문정의 안색을 살피고 나서 연개소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장군의 높은 명성 역시 울지 장군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소이다. 이렇게 뵙게되니 무한한 영광이오.”


“소장 또한 장군의 높으신 명성을 익히 듣고 한번 만나 뵙기를 원하던 차에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이옵니다.”


“허허허허! 장군은 내 이미 늙었다고 나이대접으로 과찬하시는구려.”


따지고 보면 연개소문은 603년생이고 이정은 571년생이니 서른두 살 차이인 것이었다.


“아니옵니다. 소장이 귀진에 발을 들여놓고 구궁진(九宮陳)의 슬기로운 진법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장수가 한 번 지나오며 얼핏 보고서 이미 내 진세를 알아차리다니……


 


이정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사실 제갈공명의 특기인 팔괘진 · 육화진에는 능하였다. 그러나 구궁진*에는 그리 자신이 없는 편이었다. 지난날 육화진을 쳐놓고 자만하다가 하루아침에 백평산을 빼앗긴 경험은 떠올릴수록 쓰라렸다. 그래서 이번엔 돌궐과 고구려 두 장수를 사신이란 이름으로 초빙하여 기를 좀 죽여 볼까 싶었고, 여러 날을 고심한 끝에 이 구궁진을 형성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란 어린 녀석이 슬쩍 스치며 돌아보고도 단번에 알아차리다니, 그는 경악하였다. 두려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 듣기로는 고구려 장수들은 구궁진에 능하다 하였는데, 그것이 사실이오?”


연개소문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정의 구궁법은 능숙한 진법으로는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괜히 장담하여 상대를 자극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옵니다. 구궁진은 원래 힘든 진법이오라 우리 고구려 장수들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사옵니다.”


그때 군졸들이 쟁반에다 차를 받치고 들어왔다.
장막 안에는 사방이 활짝 열린 문으로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장군은 우리 울지경덕 장군이 안내해드릴 테니 국서를 가지시고 태원(太原)에 행행 중이신 황제폐하를 배알하고 오십시오.”


이정이 돌궐의 유문정 장군에게 정중히 말하자, 유문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연개소문 장군은 함께 안 가도 되는지요?”


“연 장군은 그동안 나랑 함께 우리 장막에서 좀 쉬시지요.”


“고맙습니다.”


말은 그리 했으나 영 껄끄러웠다. 유문정과 행동을 같이 해야만 그나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내색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환영연이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그들은 밤이 깊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어느 날, 울지경덕이 혼자 돌아왔다.


“유문정 장군은 어쩌고, 어째 혼자서 돌아오십니까?”


연개소문이 그리 묻자, 울지경덕이 품속에서 편지 하나를 끄집어냈다.


“장군, 일이 그렇게 되었소이다. 유 장군은 태원성에서 우리 황제폐하를 배알한 후 돌궐 본국에서 급히 돌아오라는 분부를 받고 장군을 못 뵙고 돌아갔소이다.”


“아니?”


연개소문은 급히 봉함을 뜯어 틀림없는 유문정의 글씨임을 확인했다.


“장군은 너무 상심 마오.”


이정이 느닷없이 연개소문을 위로했다.


“하하하…… 상심이라뇨?”


연개소문은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장군께서는 이 연개소문을 절대로 고이 돌려보낼 순 없으시겠지요?”


그러자 이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연개소문의 지혜에 그는 완전히 압도당하였다.


“장군, 염려 마십시오. 저는 귀국에 올 때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왔습니다. 돌궐에 버렸던 목숨인데, 어찌 귀국에선들 버리지 못하겠습니까?”


나지막하나마 굳센 신념이 깃든 연개소문의 목소리에 이정의 등줄기에선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군……”


더 이상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젊고 패기 있는 연개소문의 맑은 눈동자가 상대방의 가슴 속을 모조리 꿰뚫어보는 것만 같아서 부끄럽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는 마십시오. 도리에 벗어난 죽음을 강요한다면, 이 연개소문,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정의 머릿속에 언뜻 한 글귀가 떠올랐다.



삼군의 군사는 생포하여 부릴 수 있으나
(三軍之師可奪使也 삼군지사가탈사지)

필부의 뜻은 가히 잡아 부릴 수 없다.
(匹夫之志可奪使也 사부지지가탈사지)




“장군을 해하려는 것은 아니오만, 장군을 돌궐에 두고는 내가 돌궐군을 공략하려는 뜻을 이룰 수가 없으니……


 


연개소문은 말끝을 흐리는 이정을 쏘아보았다.


“장군께서 돌궐을 공략한 다음에는 또 어느 나라를 도모할 것이옵니까?”


두 사람의 머릿속에 똑 같은 이름 ‘고구려’가 떠올랐다.


“그때는 이미 이정의 나이가 허락하질 않을 것이오. 제갈량이 아무리 애태우며 여러 차례 출사를 했으나 그 나이가 허락하질 않아서 천하 대업을 이룩하지 못했던 것 아니겠소?”


이정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장군, 이제 그만 우리 진지나 구경해봅시다.”


“장군님께서 안내해주신다면야……”


“물론이지요.”


이정은 연개소문을 안내하면서 깊은 상념에 빠졌다.
천하의 명장이라는 명분으로 태종의 총애를 받는다고 스스로 자부해온 이정은 맥이 빠졌다. 연개소문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니 이건 마치, 떠오르는 태양과 지는 태양을 한 자리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비상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10만 대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연개소문이었다. 이왕 생포한 바에야 진중에 붙잡아 놓고 한 번 마음을 돌려봄직도 하였다. 

 
‘그대가 애써준다면 돌궐은 물론이요 천하를 도모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라는 것을 이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개소문을 우선 진중으로 안내하여 사기부터 꺾어놓고 서서히 회유해볼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일이었다.
결국, 돌궐의 군사 사정도 알아내기 전에 오히려 당나라 대군의 형세만을 세세히 알려준 결과 밖에는 남는 것이 없었다.
이정은 또 다른 계략을 짜느라고 골머리를 썩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하늘엔 기러기 떼가 줄을 이어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울긋불긋 단풍든 장막 주변의 나무들과 소슬한 바람이 연개소문을 향수에 물들게 했다.
장막 뒤 비탈진 길을 오르내리며 가슴을 조여 오는 그리움을 달래느라 연개소문은 일쑤 길게 한숨지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에야 장막으로 들어온 그에게 군관 한 사람이 다가왔다.


“장군님, 오래 기다렸습니다.”


“어쩐 일인가?”


“예, 돌궐에서 사신이 다녀갔습니다. 본국에서 장군님께 귀국하시라는 훈령이 내렸다 하옵니다.”


“본국? 고구려에서?”


“예, 그렇다 하옵니다.”


연개소문은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장군님,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군관이 정중히 인사를 하자 연개소문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고맙다.”


군관이 물러간 후, 그는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구려에선 사실 연개소문을 귀양길이나 다름없이 돌궐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단신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돌궐에 가서 큰 공을 세우자, 당나라 사신 이대룡이 또 공작을 벌여 연개소문에게 본국 귀환령을 내리게 한 거였다. 그러나 돌궐이 아닌 당나라 진영에 포로처럼 잡혀있는 몸이라 귀환은 어림도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무료하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기 위해 산책이라도 할라치면 당직 군관이 어김없이 따라와서 물었다.


“장군님, 어디를 가십니까?”


연개소문이 대답도 없이 그대로 걸어가면 군관은 금세 종종걸음으로 뒤따라 와선 단단히 다짐 받아갔다.


“장군님,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럴 때마다 연개소문의 머릿속으로 우리에 갇힌 호랑이의 울부짖음이 스쳐가곤 하였다. 왈칵 치미는 울화를 억누르며, 그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언제부턴지 낙엽이 흔전만전하게 쌓여 있었고, 계곡을 흐르는 냇물에 손을 담그자, 벌써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온 몸에 전해졌다.


‘가을도 깊어가는구나……’


차가운 물에 푸르르 얼굴을 씻고 풀밭에서 낙엽을 베고 누웠더니 단풍나무 사이로 푸른 하늘이 조그맣게 열렸고,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운 얼굴들이 구름같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말소리가 들렸다.


“장군님, 도총관 장군님께서 찾으십니다.”


“엉?”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장막에 도착해보니,이정이 울지경덕을 대동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장군, 오래 못 만났구려.”


“그동안 장군님께선 안녕하셨습니까?”


“아, 장군. 오랜만이오.”


옆에서 울지경덕이 인사했다.


“오, 울지 장군께서도 오셨습니다그려. 반갑소.”


그러나 마음은 반대였다. 정체 모를 먹구름이 자신을 뒤덮을 것만 같은 예감이 그를 짓누른 것이었다.
한참 만에 이정이 입을 열었다.


“연 장군.”


“예에?”


“연 장군께서는 태원에 행행하신 폐하를 배알하고 오셔야 하겠소이다.”


“제가 귀국의 황제폐하를?”


“그렇소이다!”


“하기야, 지금 이렇게 귀국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이니 황제폐하를 한 번 쯤은 배알하옵는 것이 도리이겠습니다만……”


다가올 운명을 회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당히 부딪치리라…….’


“장군을 번거롭게 해서 안됐소이다만, 금상폐하께옵서 장군을 친히 인견하시겠다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황공한 일입니다.”


“연 장군의 안내는 소장이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연개소문이 순순히 승낙하자 옆에 있던 울지 경덕이 익살을 부렸다.


“감사합니다. 이왕 떠날 판이면 지금 당장 서두르지요.”


“예, 좋도록 합시다.”


개소문은 무장해제를 하고 예복을 챙겨 입은 후에 울지경덕과 함께 무장기병의 옹위를 받으며 태원을 향해 떠났다.


“장군님, 오랫동안 신세 많이 지고 갑니다.”


“연 장군, 잘 다녀오시오.”


돌아서는 연개소문의 모습을, 이정은 언제까지나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운 인재이나 적국의 장수…… 안타까운 일이다.’


이정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 연개소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내 눈으로 전송하였다.


울지 장군과 연개소문, 두 사람이 이정의 진영에서 수천 리 떨어진 태원성(太原城)에 도착한 것은 길 떠난 지 20여일이 된 한낮이었다.


태원성은 당나라를 일으킨 왕가와는 깊은 인연을 가진 고장이었다. 당나라 천하 3백여년의 기초를 이룩한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수나라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유지해온 호족의 후예였다. 따라서 그의 집은 언제나 많은 호걸 식객으로 붐비기 일쑤였다.
이연이 돌궐과 접경이 된 태원 땅 유수가 되면서부터 이곳은 이씨 가의 본거지처럼 되었던 곳이었다. 이연은 이 땅을 근거지로 하여 차츰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 말하자면 태원은 당나라의 요람인 셈이었고, 바로 이곳에서 이미 당나라가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 삼국지를 읽었으면 제갈공명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벽대전을 통해 조조의 백만대군을 섬멸시킨 최고의 계략가로 그의 신출귀몰한 귀책은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지금도 동남풍이 부는 방향으로 백만 대군을 향해 쏟아져 가던 불화살을 상상하면 짜릿하기만 하다. 이런 제갈공명의 탁월한 지략과 귀신같은 병법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두보의 시 “제갈량의 공적은 삼국에서 추앙받았고, 그의 높은 명성은 팔진도로 이루었다. 강물은 흘러가도 돌은 그 자리에 남으니 오나라를 정복하지 못한 한만 남았네.功蓋三分國, 名存八陣圖. 江流石不轉, 遺恨失呑吳.”에서 팔진도는 제갈공명이 완성한 군사 배치 방법이라고 전해진다. 한 번 갇히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진영을 구축하게 되는 진법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팔진도는 소설 상의 허구이지만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굉장히 기묘한 진법이다. 이 팔진도는 실은 ‘낙서’의 원리를 이용해 만든 전술용 진법이다. 
팔진도는 가운데에 장수가 있는 중앙에 군사를 두고, 동서남북과 북동, 북서, 남동, 남서 방향에 여덟 개의 예하 부대를 배치하는 방법이다. 이같이 하나의 공간을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각각의 구역을 궁(宮)이라 부른다. 그래서 팔진도를 중궁을 포함하여 ‘구궁진’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