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

新연개소문전 -북국에 핀 열꽃 8(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0. 20. 05:07

 

연개소문 이야기 [29화] 북국에 핀 열꽃 8


 

그 후 천하가 이씨에게 돌아온 후에도 이씨 일족은 이 지방에 머물러 있었다.
고조 이연의 아들 태종이 천하의 실권을 잡은 후에도 그랬다. 돌궐평정을 위해 이곳을 본거지로 하여 많은 군사들을 동원했었다.
태종은 이정을 돌궐에 출정시키고 나서 두 번이나 패했다는 비보에 접하자, 친히 2만의 기병을 이끌고 이곳 태원에 행행하여 본가에 머물러 있는 중이었다.
이곳 태원에서, 이정이 벌인 협상으로 돌궐에서 인도 받은 양제의 소 황후와 그 손자를 장안으로 보낸 후, 다시 고구려의 사신 연개소문을 불러들인 거였다.

태종이 유하고 있는 태원의 본가는 태원성 동쪽산 아래 자리 잡은 웅대한 이궁(離宮)이었다. 이궁 주위에는 수많은 기병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고, 정문에는 수문장이 짐짓 위세를 부리며 은근히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정양도 총관부 울지경덕 장군 입궐이오!”

수문 병사가 외치자 금세 수문장의 답이 나왔다.

“궐문을 열어라!”

굳게 닫혔던 궐문이 천천히 열렸다. 수문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선 행렬 가운데를 지나 울지경덕은 연개소문을 대동하고 이궁 내전을 향해 들어갔다.
내전 넓은 전내에는 많은 아리따운 시녀들이 시립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외전에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태종이 내전에 납시고,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먼저, 울지경덕만이 내전으로 들어가서 궐하에 부복하고 아뢰었다.

“폐하! 소장 울지경덕, 고구려 사신으로 돌궐에 출사 중인 연개소문을 대동하와 배알하고자 하옵니다.”

“흠, 울지 경, 수고 많았소.”

“폐하! 황공하옵니다. 여기 이것은 이정 장군께서 폐하께 올리는 상주문이옵니다.”


울지경덕이 조심스레 보따리 하나를 받들어 올리자, 옆에 시립하고 있던 시녀들이 보따리를 조심스레 끌러서 작은 두루마리를 공손히 올렸다.
상주문을 다 읽고 난 태종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일더니 이윽고 입이 열렸다.


“경은 어서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이리 들라 하라.”


잠시 후, 연개소문이 상서(尙書) 고개보(高介甫)의 안내를 받아 내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개소문이 울지경덕의 옆에 이르러 부복하자, 고개보가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를 높였다.

“황상마마, 고구려 장군 연개소문, 궐하에 대령이오!”

부복하고 있던 연개소문은 슬쩍 태종을 훔쳐보았다. 건장한 풍채, 날카롭게 위로 찢어진 눈매, 넓적한 얼굴이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 고구려 연개소문, 문후 드리옵니다.”

“호오, 경이 고구려의 연개소문인가? 고개를 들라!”

“외신, 폐하의 용안을 우르러 뵈옵게 되니 황공하옵기 그지없사옵니다.”

태종의 눈이 연개소문의 부리부리한 눈과 마주쳤다. 눈과 눈 사이에 마치 빛살 다리가 생긴 것처럼 파바박, 빛이 튀었다.

 

‘흐음……. 내 일찍이 천하의 인재를 구하기 위해 온 나라 안의 숱한 남아들을 대해보았었다. 실상 나라 안에는 뛰어난 문무백관이 기라성같이 많기도 하다. 그러나 그 위인 됨이 저렇듯 준수한 이가 없었다. 저렇듯 대장부다운 장수는 처음이다…….’



빛살 다리에 일어난 불꽃은 아직도 사그라지질 않고 있었다. 잡힌 몸이나 다름없는 연개소문의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태종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드문 인재로다……’


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신상에 관한 일은 이정 장군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소.”

“황공하옵니다.”

“경은 울지경덕 장군과 함께 이궁 별전에 연개소문 장군의 숙소를 만들어주도록 하오.”


태종은 상서 고개보에게 분부했다.


“황상폐하, 분부 봉행하겠사옵나이다.”

“경은 고 상서를 따라가 당분간 편히 쉬도록 하오.”

“황은이 망극하여이다.”

태종은 뚜벅 뚜벅 고개보를 따라가는 연개소문의 당당한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호환(虎患)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더 자라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

태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고개보는 연개소문을 식객들이 머무는 바깥채와는 별도로 떨어져 있는 으슥한 안채로 인도했다. 말이 안채이지, 작고 아담한 별채인데다, 유난히 높은 담이 감옥을 연상시켰다.

“자, 그럼 편히 쉬십시오.”


고개보와 울지경덕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가둬놓고는 쉬라는 건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연개소문은 태연히 인사를 받았다.

“이처럼 특별대우를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군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하시라도 사동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예, 잘 알겠습니다.”

“자, 그러면 우린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고개보와 울지경덕은 연개소문만 남겨놓고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 대문 밖에 나가자마자 커다란 자물통으로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연개소문은 홀로 집 주위를 배회했다. 대문은 육중하게 밖으로 잠가졌고, 담은 만일 뛰어넘는다면 뼈도 못 추릴 만큼 높다랗고, 집 뒤에는 엎드려 드나들만한 쪽문이 있으나, 그것마저 앞뒤로 철통같이 잠가져 있는 거였다.
동자 하나가 시중을 들어주는가 하면 하루 세끼의 음식 역시 신기할 지경으로 시간 맞춰 들어왔으며, 때때로 식객들이 마치 감시라도 하는 양 대문의 틈새에 얼굴을 디밀고 엿보기도 했다.


꼼짝없이 붙들린 몸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안에서만 오락가락하거나 바깥이라곤 기껏 마당을 거니는 것이 그의 주 활동이었다.
연개소문은 새삼 이정의 진중에 있을 때가 훨씬 자유로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는 그래도 대자연의 경색을 맘껏 즐길 수가 있었어……’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에는 방안에 앉아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만이 고작 그가 할 수 있는 일과였다. 북풍이 문풍지를 사정없이 울릴 때면 화롯불을 쬐며 무료하게 앉아있는 그에게 유일한 말상대는 어린 동자뿐이었다.


“얘야, 너는 몇 살이냐?”


“열 살이어요.”


“음, 부모님은 다 계시냐?”


“모르겠어요.”


동자의 눈이 밑으로 내려 깔리며 촉촉하게 젖고 있었다.


“몰라? 그럼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겠구나?”


“고향이 뭐예요?”


“고향? 누구에게나 고향이란 것이 있단다. 고향이란, 즐겁고 그리운 추억이 담긴 곳이지. 모든 사람들은 그래서 고향을 잊지 못하는 거다.”


“그럼, 장군님 고향은 어디신데요?”


“고구려 평양성……. 멀고 먼 곳이란다.”


그는 먹먹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동자도 서글픈 얼굴로 연개소문을 올려다보았다.

방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추운 겨울도 어느덧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뜰로 뛰어나왔다.
뒷산 쪽을 바라보았다. 산 위에 아물거리는 아지랑이가 그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의 온 몸에 지열과도 같은 열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고, 뛰어오르면 어깻죽지에 날개가 돋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마음속에는 커다란 불덩이가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굳게 잠긴 대문을 노려보다가 도저히 흥분을 이기지 못하여 마당을 오락가락하였다.
동자도 연개소문을 따라 오락가락하며 안절부절못하였다.


“장군님, 대문이 밖으로 잠겨있어요.”


빤히 아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동자가 안쓰러워서 그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동자도 괴로운 표정을 하고서 그의 옆에 앉았다. 한 방에서 오래도록 같이 지냈으니 정이 들 대로 들었다.
동자가 제 나름대로 생각해낸 말로 위로했다.


“장군님, 조금만 더 참아보세요. 이 집에서 나갈 날이 곧 올 거예요.”  

 
연개소문은 팔베개를 하고서 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얘야, 내가 이 집에서 나가게 되는 날은 내 목이 달아나게 되는 날일 거야……. 그래도 지금 같아선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 같구나.”


그의 얼굴엔 서글픔이 일렁였다. 동자의 눈에서도 구슬같은 눈물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바우랑 계 낭자는 어찌 되었을까……’


계낭자의 우는 모습과 웃는 모습이 서로 엇갈리며 환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



연개소문이 태원 별궁에 연금된 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바우와 계은비 역시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고구려 사신의 시종이라고 대우도 받았으나, 막상 그 당사자가 돌궐을 떠난 후로는 그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잊히고 있었다.


연개소문과 함께 당나라에 갔던 유문정이 홀로 돌아오고 난 뒤로 두 사람은 더더욱 찬밥 신세가 되었다.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인질로 잡혔으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떠돌자, 계 낭자와 바우는 절망의 도가니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한 군관이 두 사람의 장막을 들추고 들어왔다. 동정을 살피기 위함인 모양이었는데,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았는데도 장막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바우도 어딜 가고 없는지, 조용한 장막 안에서는 이따금 짤랑 짤랑 물 끼얹는 소리만 들렸다. 군관은 호기심에 이끌려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한 구석에 칸막이가 있고, 물소리는 바로 거기서 나고 있었다. 군관은 가만히 문틈에다 눈을 갖다 댔다. 


‘헉!’


군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찌된 일이야? 내가 요물한테 홀린 건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가?’


그는 푸르르 머리를 흔들고는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꿈이 아닌데?’


그는 눈을 비비고서 다시 문틈에다 눈을 가져다 댔지만 틀림없었다. 방 안에서는 지금 한창 묘령의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녀린 목선, 볼록한 두 개의 젖가슴, 그녀가 물을 끼얹을 때마다 물이 춤추듯 찰람거리고 있었다.


‘아!’


군관은 자신의 입을 막았다. 온몸 구석구석에서 알 수 없는 힘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선 물건이 번쩍 머리를 들고는 바지를 뚫을듯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호흡조차도 어려워진 몸을, 그는 간신히 가누고 눈을 비벼 다시 방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마침 여인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는데, 그는 하마터면 큰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연개소문의 나이 어린 시종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째 계집년처럼 곱상하게 생겼다 했더니…… 거 참! 남장한 계집년이었다니!’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목욕을 끝마친 계은비는 옷을 입으려고 목욕통 속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


군관은 다시 또 정신이 아찔하였다.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린 전신의 곡선이 그의 눈을 사로잡아버렸다. 그 순간, 조용히 옷을 입고 있던 낭자가 군관이 들여다보고 있는 문구멍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의혹에 찬 눈초리로 구멍 근처를 응시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소리를 죽인 채 군관은 살금살금 장막을 빠져나갔다.
그의 가슴은 아직도 세차게 뛰고 있었다.


‘자, 이걸 어떡한다? 고자질해봤자 고양이한테 생선 주는 꼴일 거고, 에이 모르겠다. 오늘 밤, 내가 먼저 요절을 내고 보자.’


연신 군침을 삼키면서 자기 막사에 돌아간 군관은 여자를 덮칠 계획을 짜느라고 골이 다 지끈거렸다.


‘바우란 그 놈은 거추장스러우니 죽여 버려야겠군. 그래도……. 계집을 감쪽같이 납치하는 방법은 없을까? ……. 하여간 오늘 밤에 보자! 하아, 고것 참! 이건 하늘이 내게 준 선물이야.’ 


군관은 혼자 싱글벙글하며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산과 들에는 흰 눈이 뒤덮이고 매서운 북풍은 사정없이 불어치고 있었다.
계은비는 왠지 불안하였다. 저녁에 목욕하고 있을 때 아무래도 누군가가 훔쳐본 것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불안감을 털어버리기 위해 문간방에 있는 바우를 불러들여 연개소문의 방에 마주앉았다.


“서방님께서 당나라에 연금되어 계시다니, 우리 밖에 구해드릴 사람이 없지 않겠어?”


계 낭자가 비장한 결심을 한 듯 바우에게 말하자, 바우도 기운이 나서 대답했다.


“글쎄, 누가 아니랍니까. 아씨가 만약 장부였다면 우리 둘, 손을 척척 맞추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 텐데…… 나 혼자서는 엄두도 낼 수 없으니……”


계은비는 빤히 바우의 얼굴을 보았다. 바우가 한없이 미더웠다.


“바우, 내 비록 아녀자이긴 하나, 어려서부터 무예를 배웠어. 그까짓 돌궐이나 당나라 군관 몇 놈쯤이야 못 당할까? 바우와 내가 합심하여 이곳을 탈출하자. 어서 서방님을 구해드려야 하잖아? 응?”


계은비의 말에 바우는 제 귀를 의심하였다.


“아씨께서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길을 떠날 수 있겠소. 아씨가 말을 잘 달린다는 것은 지난번 백평산에서 올 때 봤으니 알고 있지만……”


그때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눈 위를 조심스레 내딛는 말발굽 소리가 조용한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우리 서방님께서 오시나?”


가만히 귀를 기울였더니, 말발굽 소리가 장막 바로 앞에 이르러 뚝 그쳤다.


“아씨, 무슨 일인지 나가보고 오겠습니다요. 여기 꼼짝 말고 계세요.”


막 뛰어나가려던 바우는 문 근처에서 멈칫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