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30화] 춤추어라 청룡도 1
두런두런 말소리가 가늘게 들려오는 것이, 연개소문은 아니었다. 이상한 예감에 끌리면서 바우는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어스름한 달밤이라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 탄 군관 한 명과 5~6명의 병사들이 무슨 말을 두런두런 주고받고 있었다. 바우는 살금살금 기어서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악 한 군관의 덜미를 잡으려는 찰나였다. 뒤에서 별안간 창대로 바우를 후려쳤다.
“으윽!”
바우가 비틀거리는 한편으로 공격해온 병사를 힘껏 걷어차자, 그 병사는 배를 움켜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놈, 꼼짝 마라!”
“움직이면 즉시 찌르겠다!”
다른 병사들이 일제히 바우의 가슴에 창을 들이댔다. 무기를 갖지 않은 바우는 이 궁지를 도저히 모면할 길이 없었다.
“웬 놈들이냐?”
“시끄럽다! 여봐라, 저 놈의 입을 틀어막고 오랏줄로 단단히 묶어라!”
“예에!”
군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바우의 사지를 꽁꽁 묶었다. 그리고 수건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히히히히…… 이놈아! 네 장막에 있는 색시는 내가 데려가겠다.”
바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배율치명 휘하의 군관으로, 자주 장막엘 찾아왔던 자였다. 바우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놈! 이 흉악한 도둑놈아!”
바우는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을 뒹굴며 소리쳤다.
입이 수건에 막혀 소리가 잘 나오질 않았지만, 쩌렁쩌렁 울릴 만큼 목소리가 컸다.
“이놈! 네놈은 배율 장군의 부하! 네 어찌 우리 장군님의 은혜를 못 갚을망정, 그래, 이토록 배은망덕하게 군단 말이야!”
“해해해해……. 우린 그런 말 모른다 해. 아가리 닥치고 있어라 해!”
바우를 묶어놓고도 안심이 안 된 군관은 부하 병졸을 돌아보며 또 명령했다.
“야! 너희들, 이놈을 잘 지켜보고 있어. 알겠나?”
“녜~”
군관은 눈알을 희번덕이며 털모자를 잔뜩 젖혀 썼다. 그리고 창을 꼬나든 채 유유하게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첫 방이 바우의 방, 텅 비어있는 장막 안은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과 등잔불만이 너울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다음 방은 연개소문이 유하던 방을 슬쩍 열어보았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이상하군…… 색시는 어디 있지?’
그는 아까 저녁 때 그 골방이 생각났다.
‘옳지! 그곳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골방으로 다가간 그는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방은 깨끗이 비어있고 싸늘함만 흘러나왔다. 군관은 다시 연개소문이 쓰던 방 앞에 이르러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하! 그럼 그렇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군관은 침상 옆에 있는 붉은 비단 장막을 들추었다. 등잔불에 비친 사람. 남장은 하였지만 분명 목욕하던 그 여인이었다.
“해해해해! 여기 있음 못 찾을 줄 알았쩌? 네가 색시지, 그렇지?”
계은비는 새파랗게 질렸다.
“무엇이? 네놈은?”
군관이 장창을 비껴들고 서서히 접근해오고 있었다. 그는 히죽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색시, 당신 우리 말 잘 들으면 바우, 안 죽어. 지금 밖에 살아있어. 히히히히…….”
창끝이 가슴을 정확하게 겨누고 있어서 그녀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뒤로 한 발 한 발 물러나기 시작하자, 놈도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방 안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 그림자를 따라 등잔불도 호흡을 같이 하여 일렁이며 춤을 추었다. 이윽고 군관이 흉측하게 웃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으려는 찰나였다.
“가까이 오면 찌르겠어!”
계은비의 앙칼진 목소리가 쨍하니 방 안을 울렸다. 그녀의 손에는 비수가 쥐어 있었다. 호신용 칼을 뽑아든 것이었다.
“으하하하하!”
군관이 큰 소리로 웃어젖히더니 창대를 들어 그녀의 칼 잡은 손을 가볍게 후려쳤다. 비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손을 벗어났고, 촌각의 여유도 없이 놈이 덤벼들었다. 놈은 여인을 와락 껴안자마자 그대로 함께 쓰러졌다. 마구 악을 쓰며 반항했지만, 반항할수록 놈의 욕정만 자극하는 꼴이었다. 놈은 여인을 찍어 누르곤 더운 입김을 훅훅 내뿜으며 입을 맞추려 들었고, 여인이 세차게 돌이질 치자 정색하고 여인의 옷섶을 들추고 위로 죽 올린 다음 허겁지겁 여인의 젖가슴에다 머리를 처박아 왔다. 여인이 이제 또 그 머리통을 힘껏 밀어버리자, 놈은 이번엔 한 손으로 여인의 가슴을 우악스레 누른 채 한손으론 여인의 바지를 끌러 죽 내렸다. 마구 터져 나오는 여인의 흐느낌을 배경삼아서, 그는 여인의 말랑말랑한 속살을 음미했다. 그리고 온 몸을 감싸는 황홀감에 도취된 채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 색시 맞잖아……. 남자라면 이게 있어야지”
여인의 은밀한 숲으로 손가락을 들이밀려던 놈이 잠깐 손을 뗐다.
자기의 사타구니 사이에서 잔뜩 독이 올라있는 무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이었다.
“아!”
그녀는 가벼운 탄성을 지르며 손을 쭉 뻗쳤다. 조금 전 창대에 맞아 떨어졌던 비수가 그녀의 손에 잡힌 거였다. 그녀가 칼을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놈도 자기 무기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여인의 몸에 찔러 넣으려 하는 순간, 여인이 먼저 놈의 옆구리에 칼을 힘껏 찔러 넣었고, 거세게 비트는 동시에 사납게 뺐다.
“으윽!”
자기의 거창한 무기로 일보 전진하려던 놈이 반보 전진도 못해보고 곧장 여인의 배 위에 뻗어버린 거였다.
날렵하게 몸을 빼낸 여인, 아니 계은비는 꿈틀거리는 그의 목에 다시 비수를 꽂았다가 도로 뺐다. 칼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고, 놈에게서도 피가 낭자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몇 번 꿈틀거리던 놈의 몸이 이윽고 뻣뻣이 굳었다. 그녀는 엉엉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재빨리 옷을 입었고 칼을 든 채로 서둘러 뛰어갔다. 문에서 숨을 죽이며 바깥을 살펴보니 대여섯 명의 졸개들이 꽁꽁 묶인 바우를 둘러싸고 망을 보는 중이었다.
‘이왕 시작된 살인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은비는 비수를 거머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살금살금 다가갔고, 마치 춤이라도 추듯이 푹! 푹! 칼질을 해댔다. 처음 졸개 한 명의 목덜미를 푹 찌르고 빼고, 두 번째 졸개가 놀라서 돌아보는 순간에 곧바로 푹 찌르고 빼고, 그리고 뭐야? 하고 돌아보는 세 번째 졸개를 푹 찌르려는 찰나였다.
“아씨!”
바우가 알아채고 소리 친 거였다. 그 바람에 세 번째 졸개는 물론,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가 일제히 장창을 세우고 엉거주춤 섰다. 달아나야 하나 대응해야 하나 하고 누군가의 명령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허수아비들!”
은비는 잽싸게 세 번째 놈의 장창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숨 쉴 사이도 없이 몸을 날렸다.
“아씨! 나 좀 풀어주오!”
아무래도 여자 혼자는 역부족이란 생각을 한 바우의 외침이었다. 아직 세 명이 남았고, 낌새를 알아챈 병사들이 더 많이 우루루 달려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은비는 세 명의 졸개들을 한 손에 든 장창으로 견제하는 한편 한손으로는 바우를 묶고 있던 오랏줄을 풀었다.
“호오! 귀신 같네!”
그런 감탄사와 함께 오랏줄을 털고 일어난 바우는 옆에 쓰러진 졸개의 장창을 집어 들었다. 계 낭자가가 세 놈과 상대하느라 고투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술을 익혔다고는 하나 계 낭자는 어디까지나 아녀자였다. 한 동안 미친듯이 날뛴 그녀는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덜퍼덕 주저앉고만 싶은 다리를 간신히 세워서, 그녀는 자꾸만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때였다.
“에잇!”
한 졸개가 앞으로 폭 고꾸라졌다. 바우가 그놈의 등짝에다 냅다 장창을 꽂은 것이었다. 남은 두 놈이 불시의 배후공격에 아연실색하는데, 바우는 장창 쥔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힘이 빠져가던 계 낭자도 가세했다.
“에잇!”
“악!”
“얍!”
“으윽!”
너머지 두 놈이 길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흰 눈 위에 선혈이 낭자하였다.
그것은 은은히 비치는 달빛을 받아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겨우 한 숨 돌린 바우와 은비는 서로 마주보며 무수한 마음속 말을 주고받았다.
“아씨, 놈들이 눈치 채기 전에 어서 달아납시다.”
둘은 후닥닥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서둘러 행장을 꾸렸다. 다행히 이곳저곳의 보초병들도 모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바우와 남장여인 은비는 조심조심 말을 몰고 나와 말에다 재갈을 물린 다음 무사히 진영을 빠져나왔다.
둘은 백평산을 서남쪽으로 두고 치달려 밤새도록 말을 몰았다. 벼락같이 들이닥치는 눈보라 길을 말은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덧 백평산 자락을 벗어나자, 눈앞에 광막한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서남쪽이요! 전에 서방님이 말해줬어요.”
그들은 서남방이 어느 쪽인가를 가늠하여 무조건 달려갔다. 대평원에서 이는 눈보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냈다. 강한 바람은 뽀얀 눈가루를 날리며 수없이 앞을 가로막곤 하였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고 나면 여기저기 새로운 눈 무덤이 생겨났고, 말의 네 발굽이 눈 속에 푹푹 빠지는 통에 달리는 속도가 자꾸만 늦어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그들은 쉴 새 없이 달리고 달렸다.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고, 천신만고 끝에 달리고 달리니 이번엔 첩첩 산중이 앞을 막았다. 해는 이미 저만치서 떠오르고 있었다.
울울창창한 송림 사이를 헤치며 계속 말을 달리는 두 사람의 이마에선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침이 되자 눈보라도 뜸해졌지만, 산 계곡을 타고 불어치는 북풍이 발기발기 살을 찢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땀이 말라붙었고, 손과 발이 얼얼해왔다.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 산, 산, 첩첩 산중을 계속 달리다 보니 말도 사람도 추위와 허기에 시달렸다. 달리는지 걷는지 서있는지조차 자각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더 이상 말을 달릴 기력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고, 그저 말 등 위에서 말이 가는대로 몸을 맡긴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말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아, 큰일이다. 어디 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바우는 길게 탄식하며 계 낭자를 돌아보았다. 계 낭자도 파리해진 입술로 바우를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순간, 그녀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인가다!”
“엇! 어디요? 아…… 인가 맞습니다. 초가입니다.”
얼마 멀지 않은 곳 산마루에 초가 한 채가 조그맣게 보였다.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씨, 내가 먼저 가봅죠.”
바우는 기운을 내어 말을 몰았다. 품 속에 든 호신용 비수를 슬쩍 확인하면서, 여차하면 재빨리 몸을 움직일 각오를 하고서 자꾸만 얼어오는 발을 움직였다.
비탈길을 몇 차례 오르내리고 나서 바우는 드디어 산채 앞에 이르렀다. 자그마한 산채 주위에는 지난밤에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여보시오!”
두세 번 목청껏 불렀으나 안에선 반응이 없었다. 어느새 뒤 따라 온 계 낭자도 옆에 서 있었다.
“주인장 계시오?”
바우는 더 큰 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그러자 한참 만에 안에서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거 누구요?”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바우는 공손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나던 길손입니다. 좀 쉬어 갈 순 없는지요?”
“쉬어 가겠다고? 그런데, 말이 서툴군. 어느 나라 사람들이오?”
바우는 잠시 망설였다가 돌궐어 대신에 고구려 말을 했다.
“사실 고구려 사람입니다. 좀 부탁합니다.”
그제야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검은 털옷을 입은 노인이 밖으로 나와 사립문을 열더니 고구려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고구려 사람이라니 반갑구려. 그런데 대체 무슨 일로 여길 찾아오셨소?”
“예, 우리 두 사람은 당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요기나 좀 하고 쉬어 갈까하여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사정을 좀 봐주실 수 있는지요?”
노인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훑어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올라오시오. 바로 이 뒤에 마구간이 있으니 말은 그리로 갖다 매고…….”
“노인장, 정말 고맙습니다.”
“날씨가 몹시 추우니 인사는 그만하고 얼른 말이나 갖다 매고 방으로 올라오시오.”
노인은 두 손을 털옷 깊숙이 넣으며 턱으로 마구간을 가리키고는 방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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