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31화] 춤추어라 청룡도 2
산채 뒤에는 제법 아담한 마구간이 있었다. 마구간에는 노인의 말 한 필이 이미 여물을 먹고 있었는데, 한 구석엔 호밀 쭉정이와 호밀대가 잔뜩 쌓여있었고, 호밀 낱알도 커다란 목책 안에 그득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의 지붕도 호밀대로 만들어졌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호밀 농사를 많이 짓나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우는 두 필의 말에다 커다란 털가죽을 씌워놓고는 여물을 주었다. 말들은 너무 지치고 굶주렸던 판이라 여물을 아주 게걸스레 먹어대기 시작했다. 바우와 은비도 똑 같이 시장기를 느꼈다. 바우는 말없이 앞장서서 노인의 방문 앞에 이르러 문을 열었다.
“추울 텐데 어서들 들어오시오.”
“노인장, 아침부터 공연히 성가시게 해서 송구합니다.”
“죄송하긴……. 어서 이리로 올라앉으시오. 불이나 쬐면서 이야길 나눕시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노인장도 고구려 사람인가요? 라고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화로 앞에서 몸을 녹였다. 몸이 좀 녹으니, 이번엔 몹시 배가 고팠다.
“노인장, 죄송합니다만, 먹을 것 좀 있습니까?”
바우가 하는 수 없이 그리 묻자, 노인이 깜박했다고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허어, 내 정신 좀 보게. 젊은이들이 시장하다고 그랬던 것을……”
노인은 뜻밖에도 커다란 목기에다 잘 구운 고기를 담아 들어왔다.
“엇! 이게 뭡니까?”
“하하, 노루라오. 며칠 전 올가미에 걸려들었던 놈이지. 너무 맛이 좋아서 아껴 먹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소. 자아, 더덕으로 술을 담아놓은 게 있는데, 가져 올 테니 우선 고기나 맘껏 드시오.”
“와아! 뜻밖에 호강 하는가 봅니다.”
두 사람은 곧장 고기에 달려들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인이 술을 가지고 오자 그것까지 한 잔 씩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노인장 덕택에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장도?”
“그렇소. 나도 실은 고구려 사람이라오. 안시성에서 벼슬을 하다가 추방되어 이 산중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오.”
노인은 두 젊은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아, 노인장도 우리나라 사람이군요. 어쩐지 말이 잘 통하더라.”
“하아, 이쪽 젊은이는 남장여인이고…….”
은비가 깜짝 놀라자 노인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경계하지 마시오. 나는 이제 국적도 없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인 것을……”
노인이 한숨 섞인 말을 하자, 계은비와 바우는 비로소 노인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따뜻한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계은비는 반짝 눈을 떴고, 뜨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바로 옆에서 바우가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인과 이야기하다 그만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이 무슨 일이야…….아이 창피…….’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벌써 저문 모양이었다. 산중의 겨울해가 너무 짧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피곤하여 깊이 잠들어버렸던 탓인지, 해가 이미 서산마루로 넘어가고 있었다. 은비는 다시 눈을 감았다. 고국의 집에서 맛보던 그런 저녁무렵의 포근함이 찾아온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바우를 흔들어보았다. 바우는 꿍~ 하고 일어날 것 같다가 다시 잠든 것 같았다.
“길손들! 그만 자고 일어나 식사 하시오!”
노인이 부엌에서 방문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녜에~”
계은비가 흔들 때는 꿈쩍도 않던 바우가 얼떨결에 대답하였다. 그리고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엷은 햇살이 창가에 닿는 것을 보고 부랴부랴 눈을 비비며 툴툴거렸다.
“벌써 해가 떴나?”
어디서 고기 굽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자, 바우는 얼른 몸을 일으키고 후닥닥 밖으로 뛰어나가려다 벌렁 나자빠졌다. 계은비의 다리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어이쿠 아씨! 아씨가 왜? 나랑 같이……?”
날이 날마다 장막 앞에서 보초 서던 습관 때문에 착각 한 거였다.
“바우! 정신 차려요! 여기가 거긴 줄 아나 봐?”
계은비가 쓴 웃음을 지었고, 이 모양을 지켜보던 노인도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젊은이, 지금은 아침이 아니고 저녁이오.”
“예에?”
“허허허허…… 아침부터 잤으니 이젠 저녁 먹어야지. 자아, 상이나 좀 받아요.”
호밀 죽과 고기 구이를 망연히 내려다보며, 바우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몹시 민망한 것이었다.
노인이 직접 농사지었다는 호밀과 노인이 사냥했다는 산짐승으로 식사를 끝내고서, 바우와 은비는 당나라로 가게 된 사연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이 늙은이도 고국의 일을 한시반시 잊을 수가 없었다오. 우리 연개소문 장군이 당나라 이정의 계략으로 그 진영에 인질로 잡혀있던 일, 그 후 당나라 황제의 어명으로 지금 태원 이궁 별전에 감금되어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 다 듣고 있었다오.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드려야 할 텐데, 참 안타깝소.”
바우와 계 낭자는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할아버지, 우리가 서방님을 구해서 가게 되면 할아버지도 함께 모시고 가도록 할게요.”
“하지만 이 늙은이가 어찌……”
계 낭자의 말에 노인은 잠시 목이 메었다. 그는 한참이나 허공을 주시했다.
“노인장, 우리 서방님은 동부총관의 자제분이십니다. 웬만한 일은 문제없사오니 안심하십시오.”
바우가 괜히 들떠서 노인을 부추겼다.
“하긴, 내 고향엔 처자식과 일가붙이들이 살고 있지요……. 고향에 환생해볼까.”
“정말 그렇네요. 고향에 가실 수만 있다면 그건 참 환생하시는 거네요.”
긴긴 겨울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왔다. 아침식사를 끝낸 세 사람은 부랴부랴 떠날 채비를 했다. 마침 날씨도 겨울답지 않게 화창하였다.
“이 산채의 북녘 등성 너머엔 이정 장군의 10만 대군이 진을 치고 있다오. 그러니 협곡만 골라서 가되, 아주 조심하여 빠져나가야 하오.”
“아, 그렇군요.”
그들은 각자의 말에 타서는 채찍을 높이 들었다.
“가자!”
“이랴, 이럇!”
“워! 워!”
세 사람은 험한 계곡을 타고 조심조심 달리기 시작했다. 묵묵히 말을 몰면서, 은비는 마음이 조급하였다.
‘한시바삐 서방님을 구출해야 할 텐데……’
그녀의 마음은 벌써부터 태원성 이궁 별전의 연개소문에게 가 있었다.
‘아! 얼마나 고독하실까……’
은비는 이정이 진을 치고 있다는 산을 빠져나오자마자 다급하게 채찍질을 했다. 두 사람도 마찬가지로 매우 다급하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10여일 만에야 태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우선 별전 근처의 조그마한 집 한 채를 구했다. 연개소문이 돌궐을 떠날 때에 계은비와 바우에게 많은 보물과 은자를 주고 갔기 때문에 집을 구하는 일은 물론 장사꾼으로 행세할 밑천까지도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연개소문이 감금된 별전은 옛날부터 반역 죄인들을 감금하는 장소였다. 별전 자체가 원체 견고한데다 그 주변에다 어림군의 많은 군관들을 식객으로 가장시켜 배치해놓았다. 당장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지만, 노인이 어느 날 궁중에 드나드는 방물장수 할머니를 사귀어서는 그녀를 계 낭자와 친하게 지내도록 해주었는데, 그렇게 하는 데만도 여러 날이 소비되었다. 방물장수 할머니는 혼자서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과수댁으로, 돈이 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억척 여인이었다. 추운 겨울도 아랑곳없이 동분서주, 연개소문과 닿는 길을 뚫으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계획조차 명확하게 세우질 못하고서 훌쩍 겨울이 지났다. 그리고 먼 산에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는 봄이 돌아왔다. 계은비는 안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연개소문이 갇힌 별전의 높은 담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별전 기와가 온통 노을에 잠겨 타는 듯이 붉었지만, 그녀의 심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선 언제나처럼 주루룩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방물장수 할멈이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왔다.
“아씨, 거기 앉아 뭘 하슈?”
“아이구, 할멈! 어서 올라오시오.”
은비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할멈을 방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찬장에서 빈과(사과)를 세 개 내어놓으며 권했다.
“아이구, 이 봄에 빈과라니. 저장을 아주 잘했나 보구려.”
“아니예요. 오늘 저자에 나갔다가 사온 거랍니다. 할멈, 가지고 가셔서 잡수세요.”
“아이구, 이것을 하루에 한 개씩만 먹으면 만병통치라는데, 이 귀한 것을…… 늘 이렇게 신세를 져서 어떡하우?”
노파는 계은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울었구려. 왜 울었수?”
은비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마루 위의 새장을 가리켰다. 늘 보이던 새가 보이질 않고 빈 새장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아씨, 내 예쁜 새를 구해다 드릴께. 너무 서운해 하지 마우.”
“할멈, 그게 아니라……”
“아니 그럼 왜 우셨단 말이우?”
은비는 말없이 창밖을 가리켰다. 별전의 높은 돌담이었다.
“좀 생각해보세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먼 고구려에서 잡혀왔다는 장수가 바로 저 별전에 갇혀있다고, 할멈이 전에 말씀해주셨잖아요?”
“그렇지. 바로 연개소문이라고 하는 장수지요.”
은비는 푹 한숨을 쉬었다.
“날이 날마다 저 높다란 담 안에 갇혀있는 사람이나 또 우리 새장에 갇혀있던 새나 다를 바가 없질 않겠어요?”
“아이유, 아씨!”
노파는 손으로 무릎을 치며 호들갑을 피웠다.
“아씨는 참 마음도 비단결이네. 쯧쯧…… 그래서 저 새장의 새를 놓아준 거유?”
은비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파의 주름진 손을 꼭 잡고 말했다.
“할멈, 고구려 장수인지 그 사람, 인물이 천하에 으뜸간다고 하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이우?”
“그렇고말고요. 그건, 여기 이 태원성의 애들까지도 다 아는 사실입죠.”
“할멈, 그 장수를 어디 멀찍이서라도 한 번만 볼 수 없을까요?”
“글쎄요……” “소문엔 그 장수가 칼춤도 잘 춘다던데요?” 노파는 갑자기 깊은 생각에 빠지는 성싶더니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씨, 좋은 수가 있수. 이번 4월초파일에 화암사(華岩寺) 연등놀이에 공주마마께서도 참관하신대요. 그 때에 공주를 즐겁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그 장수가 나와서 칼춤을 추게 하면 어떨까요? 그리만 된다면 이 할멈이 아씨를 모시고 가보기로 합죠.” “……....”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계은비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아서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그저 멍하니 노파의 얼굴만 응시했다.
“아씨, 왜 아무 말이 없으신 거유?”
“할멈두 참, 하늘의 별을 따는 게 쉽겠다. 어떻게 그래, 공주마마를 움직여서 그 장수를 본단 말이우?”
“아씨, 두고 보시우. 이래뵈두 이 할멈이 꽤 쓸 만하다우. 마당발이란 말이지……. 내일 궁중에 들어가면 꼭 성사되도록 해보이겠수.”
“아이구 할멈, 정말 자신 있으시단 말씀이에요?”
노파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담했다. 그럴듯하였다.
“암, 자신 있고 말고요.”
은비는 쌩긋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패물과 은자를 꺼내어 할멈에게 건넸다.
“할멈, 이 패물은 갖고 계시다가 그 일에 필요하면 쓰세요. 요행히 일이 성사되어서 우리가 연등놀이에 가게 되면 내 좋은 옷감과 은자를 서운치 않게 듬뿍 드리리다.”
할멈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리고 곧장 낭자가 주는 폐물들을 주섬주섬 허리춤에 고이 간직하였다.
“아씨, 이토록 값진 보옥을 많이 주셔서……”
할멈은 파리한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계은비에게 결심을 다졌다.
“내 한 번, 아씨를 깜짝 놀라게 할 테니 두고 보시우!”
“아유, 할멈 덕분에 좋은 구경 하게 생겼네요. 기대합니다.”
“암, 여부가 있겠수? 자아, 아씨, 이제 나는 그만 가요!”
할멈이 바삐 자리를 드는데, 은비는 할멈에게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난 할멈만 믿수……”
“아, 녜에~ 걱정 붙들어 매슈!”
폐물과 은자를 많이 얻은 할멈은 어서 빨리 집에 돌아가서 헤아려보고 싶은 마음에 사뭇 급했다. 그래서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아까 낭자가 준 빈과는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계 낭자가 그것을 집어 할멈에게 쥐어주었다.
“할멈, 빈과는 두고 가시려우? 이것도 갖고 가셔서 두 아드님과 하나 씩 잡수세요.”
“아이구 아씨, 밤낮으로 아씨 신세만 지고 있구려.”
대문을 나서자마자 종종걸음 치는 할멈을 눈으로 전송하며, 계 낭자는 기도 하듯 두 손을 모았다.
‘부디, 성사시켜 주시우. 할멈만 믿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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