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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연개소문전 -춤추어라 청룡도 3(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0. 24. 22:29

 


연개소문 이야기 [31화] 춤추어라 청룡도 3


 

한편 바우는 노인과 함께 날마다 연개소문이 갇혀있는 별전 주위를 배회하면서 호시탐탐 틈을 엿보았으나, 어림군 군관들이 득시글거리며 삼엄한 경계를 하는 통에 섣불리 손을 써볼 재간이 없었다.


“제 생각으론 지금 현재로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사월초파일 연등놀이에 서방님께서 나오시게만 하면, 그렇게만 된다면 어떻게 해보는 도리 밖에…….”


바우와 노인은 은비의 말에 솔깃하였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런데 어떻게 서방님을 그날 그 연등놀이에 나오시게 한다는 말씀이오?”


“방물장수 할머니를 믿는 수밖에 없지요. 자신 있다고 큰소리 치고 가셨거든요. 그러니……. 서방님이 그날 나오실 경우를 대비해서, 반드시 탈출시킬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해요. 만일 실패하면 모두 죽을 각오로……”


“하기야, 현재로는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으니, 그럽시다. 그날 연개소문 장군이 연등놀이에 나오시게만 된다면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탈출시켜야 하오. 단 한 번의 기회일 것 같소.”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그리고 부차적인 계획을 세세히 의논했다. 세 사람은 밤이 늦도록 연개소문 구출작전을 짜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사월초파일의 화암사 연등놀이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 해는 이미 기울어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태원성 이궁에 비쳐들자, 내전 넓은 후원에 만발한 기화요초들도 더욱 미태를 자랑하는 듯했다. 이리저리 후원에 깔린 잔디밭 길을 사뿐사뿐 거니는 궁녀들의 날렵한 모습이 마치 꽃 사이를 넘나드는 나비와도 같이 아름다웠다.
장미꽃 만발한 울타리 곁에서 상궁 둘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슨 말인가를 소곤거리고 있었다. 두 여인의 작은 입술들이 움직일 때마다 근처의 꽃들이 화답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주마마께선 이번 연등놀이에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을 꼭 보시겠다고 저리 성화시니…….”


“하기는 그 장수, 천하의 쾌남아라고 소문이 자자합디다만……”


“호호호호, 바로 그래서 우리 공주님이 반하신 게죠.”


“글쎄요?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 공주마마께선 너무 마음씨가 고운 게 탈이잖아요? 내전의 새란 새는 모두 새장 문을 열고 놓아준 거 보면 알조지.”


“호호호호! 우리 공주마마, 그러시다가 고구려 연개소문 장수도 놓아주시면 어떡하죠?”


그때 내전 나인이 그들에게 가까이 와서 전갈했다.


“조 상궁님, 공주마마께오서 곧 대령하옵시라는 분부이십니다.”


“오냐, 내 곧 공주마마를 뵈러 가겠다고 여쭈어라.”


조 상궁은 이 상궁과의 작별이 아쉬운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비 같이 가볍게 몸을 돌리며 이 상궁에게 고개를 까딱 하였다.


“이 상궁, 잘 가오.”


그녀는 작별의 인사를 마치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내전 공주의 처소로 향했다.
공주는 커다란 체경 앞에 앉아서 한창 몸치장을 하고 있었다.


“공주마마, 조 상궁 대령이요.”


“조 상궁은 이리 올라오라!”


“황공하옵니다.”


조 상궁은 조용히 공주가 앉아있는 뒤로 다가갔다. 큰 체경에 비친 공주의 아리따운 모습이 시야에 정면으로 들어왔다. 조 상궁의 모습도 거울에 비쳤다. 상궁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공주마마.”


공주도 돌아앉아 이야기할 생각을 않고 거울에 비친대로 상궁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공주는 체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조 상궁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상궁이 활짝 핀 꽃이라면 이 몸은 아직 피어나지 않은 수줍은 꽃봉오리구려.”


“공주마마의 고상하시고 미려하신 용모야 어찌 꽃봉오리에만 비할 수 있겠사옵니까?”


찬사를 보내주는 조 상궁의 말에 공주는 체경 속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계란형의 티 없이 맑은 얼굴, 새까만 눈썹, 커다랗고 서글서글한 눈매, 가지런한 이, 도톰한 입술, 윤기 자르르 흐르는 머리카락, 그 모두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용모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공주는 체경 속에 비친 자신의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지금 세상에서 쾌남아라고 부르는 고구려의 장수, 연개소문 앞에 한 번 나서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조 상궁!”


“예에, 공주마마!”


“별전에 감금해둔 고구려의 연개소문 장수가 그렇게도 쾌남아라지?”


“예에, 그러하옵니다.”


“화암사 연등놀이에 연개소문을 참석케 해달라고 마마께 상주했지만 마마께서는 어제 군사를 이끌고 사냥 길을 나섰으니 이를 어쩌면 좋지?”


공주는 안타까운 듯 그 해말간 미간을 찌푸렸다.
조 상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아뢰었다.


“공주마마, 좋은 수가 있사옵니다.”


“좋은 수라니? 어서 말해 보오.”


공주는 흑요석빛깔의 눈동자를 굴리며 조 상궁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조 상궁은 새삼스레 이쪽저쪽을 돌아보고 나서 공주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더니 공주의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소곤거렸다. 공주의 얼굴이 금세 피어나며, 꽃송이 같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궁의 말이 옳아. 내 반드시 그리 할 테야. 꼭…… 연개소문을 만나볼 테야.”


“공주마마 부디 그리 되길 바라나이다. 근데 그 장수, 칼춤이 천하일품이라 하옵니다.”


“오 그래? 그런데, 누가 그 사람의 칼춤을 구경한 바 있다고 해요?”


“돌궐에서 칼춤으로 날렸다고 하는 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정말일 게다. 상궁은 어서 고개보 상서를 부르라.”


“공주마마, 분부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조 상궁이 물러간 후, 공주는 체경을 들여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꼭 불러내리라……. 그래서 나를 보여주리라.’


공주의 마음에 불이 붙고 있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오호, 이 나라의 공주님보다 예쁜 이는 아직 못 봤다구?……. 그이도 그리 생각하겠지?”

잠시 후, 조 상궁이 고 상서를 대동하고 내전으로 들어왔다. 하늘하늘한 주렴 너머로  고개보가 궐하에 부복했다.


“공주마마, 상서 고개보 대령이오!”


“어서 오오. 이 몸이 한 가지 청이 있어 불렀소이다.”


“마마, 하명하사이다.”


“다름이 아니라, 별전에 감금되어 있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화암사 연등놀이에 참여하게 할 수는 없는지?”


“공주마마!”


고 상서가 더욱 조아렸다.


“그 연개소문은 매우 위험한 인물로, 폐하의 어명 없이는 소신으로선 절대로 불가한 줄 아뢰오.”


“나도 알고 있소.”


“…….”

“내 이미 어마마마께 말씀 올린 일이니, 상서는 너무 괘념치 마시오. 다만, 조 상궁과 상의하여 화암사 연등놀이에 차질이 없도록 잘 배려해주시기 바라오.”


조 상궁이 고 상서에게 뭐라 뭐라 귓속말을 하자, 긴장으로 굳어졌던 고 상서의 표정이 차츰 밝아지고 있었다.


“내 하는 수 없이 공주마마 분부대로 시행할 것이나, 공주마마께서는 우림영에 분부하사 연개소문의 신병만은 책임지시도록 선처하시오.”


그렇게 다짐한 고개보가 총총히 내전을 빠져나갔다.


그날 늦은 저녁에 조 상궁 처소에 방물장수 노파가 찾아왔다.


“상궁마마, 늙은이가 또 왔습니다요.”


노파가 살살 눈웃음을 치며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어서 오시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소.”


“아이구,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거유?”


“바로 그 일 때문에 기다렸다오.”


조 상궁은 노파를 보고 환히 웃었다.

◇◇◇

노파는 오늘따라 더 수선스러웠다.
계은비는 손에 쥐었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나서 등잔에 불을 붙였다. 노파의 주름진 얼굴과 한 떨기 들국화같이 애련한 계은비의 모습이 불빛에 드러났다.

“아유, 내 아씨가 기다릴 것 같아서 어서 빨리 기쁜 소식을 드린다는 게 그만 늦었네요.”

할멈은 너스레를 떨며 은비의 눈치를 살폈다.

“할멈, 정말 수고가 많으셨어요.”

“아이, 수고랄 거야 뭐 있수? 그저 아씨를 너무 애타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할 뿐이지요.”

할멈은 계 낭자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귓속말을 했다. 그녀의 얼굴에선 기쁨보다는 오히려 긴장감이 감돌았다.

할멈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눈치로 은비를 주시하자, 은비는 알았다는 듯이 준비해뒀던 은자를 한 줌 꺼내었다.

“이것 넣어두세요.”

“아이구, 이거 미안해서 어떡허우? 허구헌 날 이렇게 신세만 지니……”

계은비의 백옥같이 흰 손에 한 줌 쥐어진 은자들이 불빛에 반짝거리자, 할멈은 더욱 황홀해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할멈의 손이 어느새 은자를 받아 허리춤에 넣고 있었다.

며칠 후, 연등놀이 전날 찾아온 방물장수에게, 계은비는 조용히 부탁했다.

“할멈, 내일 연등놀이에 함께 갔으면 좋겠는데, 우리 집이 비게 되니 어떡해요? 미안하지만 봐주시는 김에 우리 집 좀 봐주시어요.”

“이 늙은 것이 구경은 무슨 구경…… 아씨나 어서 맘 놓고 다녀오시우. 만약 밤이 늦으면 이 댁에서 그냥 자면 되잖수?”

“아, 그러세요. 제가 늦으면 이불 펴고 주무세요. 고마워요, 할멈.”

그날 밤, 계은비는 할멈에게 편지를 한 통 써 놓았다.

「할머니, 혹여 제가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게 되면 이 집의 재산을 전부 처분하여 할머니께서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계은비는 편지를 할멈이 덮을 이불에 끼워두고서야 잠을 청했다.

드디어 사월초파일. 태원성 주변 곳곳에서 모여든 인파로 온 성안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의 연등놀이는 당나라의 사직과 태국안민(泰國安民)을 위해 축원한다 하였다. 전국의 고승과 명승들을 비롯하여 온갖 아부 아첨배들이 당나라 조정에 잘 보이려고 무수한 금은보화를 가지고 몰려들었다.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별의별 구경거리도 다 모였다.

한 곳에는 요술구경이 벌어져 있었다.

요술쟁이는 대야에 씻은 손을 하얀 수건으로 깔끔히 닦고서 얼굴을 똑바로 들었다. 이쪽저쪽 돌아보면서 손바닥을 딱딱 치며 이리저리 뒤집어 구경꾼들에게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증명’을 해보였다. 그런 뒤에 왼손 엄지와 검지를 모아서 환약이나 만드는 듯 아니면 이나 벼룩을 잡듯 비벼대더니, 거기서 자그마한 물체가 생겨나 꼬물거렸다.
겨우 좁쌀 크기이던 그것이 연거푸 비벼대자 녹두알만해지고 차차 앵두만 해지다가 다시 빈랑 열매가 되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달걀이 되었다. 그 달걀을 두 손바닥으로 재빨리 비벼 굴리자 점점 더 둥글고 커지며 누르스름한 거위 알이 되고, 그 다음엔 별안간 수박이 나타났다. 떡하니 가슴을 벌린 채로 무릎을 꿇고 수박을 더 빨리 비비며 마치 장구라도 끌어안듯 했다가, 그 팔뚝 아프겠다 싶을 즈음 동작을 멈췄다.

탁자 위에 놓인 물체는, 둥글고 노랗고, 크기는 동이만하여 다섯 말 들이는 되어 보였다. 손으로는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무거워 보이니 매우 단단할 테고, 그렇다고 돌이나 쇠는 아닐 테고, 나무나 가죽, 흙은 더더욱 아닐 테고, 하여간 둥글둥글하다. 게다가 냄새도 향기도 없는 저 물건은 이름이 뭘까? 혹 제공(《산해경》에 나오는 귀신새의 이름으로, 눈도 코도 없이 누런빛의 주머니 같이 생겼다)인가? 이윽고 요술쟁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다시 손뼉을 딱딱 치면서 사방을 둘러보고는 다시 그 물체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하는데, 그가 살살 굴려가며 따뜻하게 쓰다듬자, 물체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번엔 손으로 가볍게 치자 물거품처럼 줄어드는성싶더니 마침내 사라졌다.
아니다, 손바닥에 놓일 만큼 작아졌다가, 집게손가락으로 집어서 비비어 한 번 톡 튀기자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요술쟁이가 사람을 시켜 종이 몇 권을 켜왔다. 종이를 큰 물통에 집어넣고 손으로 빨래하듯 저으니 종이가 풀어지고 흐물흐물해져서 마치 흙을 물속에 넣은 모양새다. 이사람 저사람 불러다가 종이가 물과 섞여버렸음을 일일이 확인시키기에 ‘한심하구먼.’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술쟁이는 손뼉을 딱 치고 쓰윽 웃은 뒤에 두 소매를 둥둥 걷어 올렸다. 두 손으로 물통에서 종이를 건져내는데, 마치 누에고치에서 실이 뽑혀 나오는 듯하였다. 하지만 종이가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데 이은 흔적은 없었다. 분명히 물에 풀어졌던 종이였는데, 누가 언제 풀로 발랐는지, 띠로 둔갑한 종이가 수백발이나 되었다. 그걸 땅바닥에 풀어놓으니 바람에 들썩거리기까지 하는 게 분명 처음의 그 종이였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투어 통속을 들여다보았다. 통속의 물은 너무 맑고 깨끗하였다.
찌꺼기 하나 안 뜨는 것이, 방금 길어온 물과 같았다. (연암박지원의 환희기, 20가지 요숙구경 도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