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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이야기 [39화] 모략과 책략 3(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1. 15. 21:55

 

이야기 [39화] 모략과 책략 3 ​


연개소문이 떠난 후, 그녀는 뒤뜰에 돌탑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룻밤도 빠짐없이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지아비의 무사귀국을 빌었다.
그러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험악하기만 했다.
연개소문이 돌궐에 간 후 당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죽었다느니, 또는 실명(失明)을 했다느니,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소문들만이 그녀의 불안에 부채질을 했다.


‘속담에 새 사람이 들어와서 3년은 무사해야 된다는데…….’


그녀에겐 자신이 지나온 세월이 악몽 같이만 느껴졌다.
그런 한편 단 하룻밤, 지아비가 돌궐로 떠나기 전의 단 하룻밤이 언제나 그녀를 위로했다.
가만히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자, 온 몸에서 뜨거움이 물결쳤다.
그녀는 문득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가만가만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바락바락 악을 쓰고 싶도록 외로워 진저리를 치고 있는데, 밖으로 나갔던 계집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계집종이 그녀 옆에 살랑 앉으며 조용조용하게 말했다.


“아씨마님, 총관부에는 오늘부터 어림군 부장이 나와서 연장군님과 함께 관리하고 있다 하옵니다.”


그녀는 더욱더 엄습하는 불안감에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어림군 부장은 무슨 일로 나와 있다더냐? 공동 관리를 한단 말이냐?”


“아유 마님! 어리석은 쇤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 수 있사와요?”


“하기야, 딴은 그렇구나.”


그녀는 씁쓸히 웃음을 깨물었다.


“마님, 너무 상심 마시와요. 서방님께서 언제라도 돌아오시지 않겠어요?”


“……”


수련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먼 하늘에 길을 텄다.

수련은 천천히 뒤뜰을 거닐다가 한 고목 앞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슈웅!       


그녀는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화살 하나가 고목나무에 콱 박혀서는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화살촉은 쪽지 하나를 물고 있는 거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다가가 화살을 빼냈다. 그리고 종이쪽지를 재빨리 움켜쥐고 부리나케 방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사부님 신변에 무슨 일이?’


「……………….」


글을 다 읽고 난 수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한 걸음으로 정화수 한 그릇을 소중히 받쳐 들고 돌탑 위에 조심조심 얹었다.
나비가 사뿐히 내려앉듯이, 그녀는 양팔을 크게 벌려 큰절을 했다.

어림군의 군관을 안내하는 연비의 심정은 몹시 착잡했다.
연태조 대인이 와병중이고 연개소문이 출타 중이라 하여 이처럼 큰 수모와 곤욕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분통이 터졌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치솟는 울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수련은 시종의 전갈로 어림군들이 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실까지 들어오겠다고 하자 치를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미 어림군 아장과 연비가 내실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계집종이 새파랗게 질려 달려왔다.


“마님! 큰일 났사와요!”


“왜 이리 방정을 떠느냐!”


“연 장군님과 어림군의 장수가 뜰 앞에 와서 마님을 뵙겠다고 하와요.”


수련은 싸늘한 미소를 띠며 계집종에게 분부했다.


“얘야, 밖에서 방 안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방문들을 활짝, 활짝, 열어 놓거라.”


“예 마님!”


계집종이 방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소복단장 단정한 매무새로 그녀는 조용히 걸어 내실 밖의 마루로 나왔다. 그리고 연비에게 정색하고 물었다.



“장군께서는 총관부의 법도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면서 어찌 그리 하시오? 어찌, 내실에까지 외부 군관을 안내하시었소?”


연비가 필요 이상으로 절절 맸다.


“송구하옵니다. 총관부의 법도는 잘 알고 있사오나 어명이라 하니…….”


“그렇소이다, 어명이오!”


“남의 내실 들여다보라는 게 어명이오?”


수련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눈에서는 바지직, 불꽃이 튈 것만 같았다.

 
“서방님께서 돌궐에 사신으로 가시고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것은 임금께서도 다 아실 터인데, 어찌 그런 어명을 내리셨단 말씀이오? 대체 무슨 까닭으로 어명을 빙자하면서까지 내실을 수색하겠단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자아, 보시오! 훨쩍 열어두었으니 한 구석도 남기지 말고 다 보시오!”


어림군 아장은 그녀의 서슬에 당황하여 눈길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곤 머뭇머뭇 말했다.


“마님, 죄송합니다. 사실은 연개소문 장군의 스승 되시는 분이 내실에 계시다는 소문이 있어서 한 번 보려고 하는 것이옵니다.”


“여보시오,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남녀가 유별하거늘, 아무리 서방님의 사부이기로, 어떻게 아녀자만 있는 내실에 기거할 수 있다는 말이오?”


“…….”


내실 안은 이미 보아란 듯이 방문과 창문을 화들짝 열어놓았기에, 뜰아래 서 있는 어림군의 아장도 충분히 방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한참이나 무안한 기색으로 방안을 기웃거리던 아장이 쓱쓱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허리를 굽혔다.


“마님, 잘 보았습니다. 소장도 대감마님의 명이시라 어쩔 수 없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널리 용서하십시오.”


“언제는 어명이라 그러더니?”


그녀가 아장을 쏘아보자, 아장은 머쓱한 눈길로 뒤에 서 있는 군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긴 없다. 그만 돌아가자!”


수련은 돌아나가는 군관들의 뒷모습을 내내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풀썩 쓰러져 버렸다. 쓰러진 그녀의 귀에 아장이 지껄이던 말이 쟁쟁했다.


“연가의 총관부는 폐쇄하오. 어명이오!” 


수련은 살래살래 머리를 흔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시어머니의 삼년상은 어떻게 치를 것이며, 중병으로 자리에 누워계시는 시아버님은 또 어찌하는가. 만일 그 지경인 채로 서방님이 돌아오신다면....... 아아, 서방님이 서실 자리는 또 어딘가…….’


엎드린 채 흐느끼고 있는 그녀의 어깨가 심하게 들먹거리고 있었다.


“마님, 고정하시와요.”


계집종이 그녀를 부축하며 위로했다.


그녀는 한참 만에 방으로 들어갔고, 방에 들어서자 더 본격적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사님은 무사히 당나라로 가고 계실까? 정녕 서방님을 만나실 수 있을까……?’


​      

북녘 수구성(水口城) 압수(鴨水) 나루터 한편 기슭에서, 도복 차림에 방립을 젖힌 채인 웬 노인이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룻배를 타려고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부산한 풍경을 자아냈다.


이편 남쪽 기슭에서 저편으로 건너간 나룻배는 다시 북쪽 기슭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태우고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었고, 이쪽에서 배를 타려고 모여든 수 십 여명의 길손들은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삿대질을 하는 사공들의 팔뚝엔 불끈불끈 근육이 솟고 있었으나, 배는 마냥 느리기만 하였다. 나룻배는  팽팽히 돛을 펼치고도 압수 강에 뜬 채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 것만 같았다.


길손들은 여기저기 자갈밭에 앉은 채로 가끔씩 물수재비를 뜨며 끈기 있게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더위를 피하려고 풀잎으로 방립을 만들어 쓴 사람도 있었고, 말총으로 짠 귀인모를 단정히 쓴 사람도 있었다.


그들 인파와 조금 떨어진 나무그늘에 서 있던 도인은 자기가 타고 온 말고삐를 옆에 있는 나무 둥치에 잡아맸다. 그리고는 강변의 자갈밭을 서성이었다. 제쳤던 방립을 다시 푹 내리덮어 쓴 채인 그는 늙수그레하나 우람한 체격이 돋보였다. 바른손에 철지팡이를 든 모양새는 무술이 깊은 경지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도인이 문득 내리썼던 방립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얼굴이 햇빛에 드러났고, 은빛 긴 수염이 강바람에 하늘거렸다. 그의 눈이 강에 떠 있는 나룻배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강렬한 햇살이 강물에 반사되어 이중의 상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나룻배 안에 탄 사람들의 모습은 좀처럼 분간키 어려웠다. 그는 햇빛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한편 나룻배 안의 사람들을 샅샅이 훑다가는 한숨을 푹 내리쉬었다.


도인의 시선은 또다시 나룻배로 옮겨졌고, 그 동안 나룻배가 얼마쯤 가까이 와있었다. 아직도 사람들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까마득해보이던 배가 이젠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배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짐짝과 마필들의 모습도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배는 확연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뱃사공들이 번차례로 삿대를 물에 집어넣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내내 강물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사의 시야에도 나룻배의 선명한 모습이 들어왔다. 그 순간, 도인은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나룻배를 응시했다.


배가 가까이 오면 올수록 그의 시선은 배가 닿을 나루터에 못 박힌 듯이 움직이질 않았다.


나룻배가 점점 다가올수록 갑자기 물살이 세어지는지, 사공들은 배를 나루터에 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배는 드디어 강변에 돛을 걷고 닻줄을 내렸다.

 
배와 육지를 연결하는 널따란 부교가 설치되자, 배 안에 탔던 길손들이 부산스럽게 하선 하기 시작했다. 짐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짊어진 사람. 또 말을 모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부교를 건너자마자 제각기 빠른 걸음으로 뿔뿔이 흩어져 가고 있었다. 방립을 시원스레 제쳐버린 도인은 배에서 내리는 길손의 모습을 하나하나 뚫어지게 훑어보고 있었다.


도인의 눈에 점점 실망의 빛이 감돌고 있을 때, 배 안의 마지막 길손들이 내리려고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허탕이군……’


도인은 눈을 내리 깔았다가 다시 나루터를 응시했다. 그 순간, 노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눈을 나루터에 고정시킨 채, 그는 꼼짝을 안 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경악이 그의 눈에 가득 서렸다.
이윽고 도인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말을 끌고 나오는 네 사람의 모습이 도인을 울게 한 것이었다.


조심스레 부교를 건너고 있던 일행이 곧 강변에 내려섰다. 방립을 내려 쓴 도인은 묵묵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말을 타려던 젊은 사람은 누군가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방의 눈길이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도인도 문득 눌러쓰고 있던 방립을 한 손으로 제쳤다. 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팍 부딪쳤다. 젊은이의 표정이 경악과 환희로 마구 일그러졌다.


“사부님!”


“장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똑 같이 떨려나왔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어쩔 줄을 몰랐다. 옆에서 보고 있던 바우는 그가 문덕도사임을 알아차리고는 넙죽, 모랫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아시고 이곳까지…… 흑흑…….”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오냐, 바우 너도 장군을 모시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겠느냐? 그만 일어나거라.”


“사부님, 저보다 낭자께서…….”


바우는 뒤에서 이 모양을 바라보고 있는 남장여인 계 낭자를 가리켰다.
계 낭자는 도인이 낯설지가 않았다. 평소 들은 바가 있어서 그가 연개소문의 스승인 것을 단박에 알아차린 거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아무 말이 없으니 선뜻 나서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판이었다. 그 상황을 곧 알아차린 연개소문이 스승에게 계 낭자를 소개했다.


“사부님, 당나라에 갇혀있을 때에 이 계 낭자와 저 노인장과 바우, 세 사람의 힘이 아니었더라면 오늘 이렇게 사부님을 뵙지도 못할 것이옵니다. 꼼짝없이, 타국에서 고혼이 될 뻔 했지요.”


“그래, 고생이 막심했구나.”


문덕도사도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갇힌 데까지는 알고 있었다. 세세한 사연을 듣지 않더라도 알 것 같았다.
연개소문이 계 낭자에게 말했다.


“낭자, 나의 사부님이시오. 어서 인사 올리시오.”

“사부님의 말씀은 도련님께서 너무 많이 이야기해주셔서 소녀도 잘 알고 있사옵고…….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옵니다.”


“낭자께서 우리 장군을 모시고 만리타국에서 많은 수고를 했소이다.”


그녀를 훑어보는 도사의 눈이 은근히 번뜩였다.
옆에 서 있던 양 노인은 어느새 자갈밭에 넙죽이 엎드리며 절을 하고 있었다.


“사부님, 문안드리겠습니다.”


“아니, 이렇게까지……”


문덕도사는 얼른 양 노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