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37화] 모략과 책략 1
그는 산 위의 큰 돌 10여개를 산 아래로 굴렸다.
큰 돌을 굴러 내리는 소리가 온 계곡을 진동했다.
이때를 이용하여 그는 날쌔게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주인을 기다리던 비호가 앞발을 번쩍 들고 반겼다. 그는 잽싸게 애마에 올라타서 말했다.
“비호야! 내 목숨은 오직 너한테 달렸다!”
비호는 앞발을 높이 들며 한번 울부짖고는 전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달리는 길엔 큰 돌과 바위들, 때로는 나뭇가지들이 턱턱 앞을 가려서, 무척 험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미 훈련이 되어있었다. 예전에 문덕도사에게서 무예를 닦을 때에 주로 계곡을 달리는 수련을 쌓았던 것이다. 물을 막거나 하는 수공(水攻)만 없으면 계곡과 계곡 사이를 숨어 달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며 맹훈련을 했었다. 그는 오로지 애마 비호에게 몸을 맡긴 채 계속 계곡을 달렸다.
이 무렵, 잠시 사기가 떨어졌던 당나라군은 대열을 재수습하여 총공격령을 내렸다. 적장 고태위가 죽자 조장구가 대신 나선 거였다. 무인지경인 괘산 상봉을 일거에 돌진 점령한 조장구는 개선장군이나 된 듯 기고만장해서 사면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연개소문과 그 일당은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이쪽저쪽에서 술렁이는 군졸들의 함성만이 귀가 따갑게 들려올 뿐이었다. 산정에다 아예 장막을 친 조장구는 수천의 군사를 동원하여 괘산 전역을 수색하게 하였다. 얼마 후, 군관 한 명이 웬 헌옷들을 들고 왔다.
“장군님, 이 옷들은 연개소문 일당이 벗어놓고 간 것 같은데요?”
“이것들이 어디에 있더냐?”
“예에, 저 칡덩굴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을 찾아내질 못했습니다.”
“……?”
바로 그때였다. 시종군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좀 보십시오! 저거, 연개소문 아닙니까?”
“무엇이라고?”
조장구는 돌연 군관이 가리키는 곳을 주시했다. 저 멀리 요하나루터에는 연개소문 일당 네 명이 나룻배에 오르고 있는 모습이 그의 시야에 감살감실 들어왔다.
“아! 저놈들이 어느새……”
괘산에 모인 수천의 시선이 속수무책으로 요하의 나룻배만을 주시했다. 해는 어느새 서녘으로 기울고 있었다. 조장구는 분통이 터졌다.
“야! 이놈! 연개소문아!”
그와 동시에, 수색전을 벌이고 있던 군졸들도 모두 한 목소리로 고함 질렀다.
“야! 이놈! 연개소문아!”
“이리 와서 포박을 받아라!”
“이리 와서 포박을 받아라!”
마치 산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룻배에 오른 연개소문은 사공 두 사람이 번차례로 물에 집어넣는 삿대를 주시하다 말고 손을 흔들었다. 괘산 마루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주었다.
적장 조장구는 이를 득득 갈았다.
“엥이이~ 다 틀렸다. 요하를 건너면 고구려 땅이니……”
그는 미친 듯이 발을 탕탕 굴렀다.
네 사람을 태운 나룻배는 무사히 요하를 건너 고구려 땅에 무사히 상륙했다. 바우가 몸을 날렵하게 놀려서 배에서 네 필의 말을 끌어내리는 동안, 연개소문은 또다시 요하 건너 괘산을 바라보았다.
“하하하하! 자승자박이구나! 쯧쯧쯔……”
생사의 기로를 빠져나온 사람답지 않게 호탕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 계은비는 그저 감격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바우는 연개소문의 등에 붙은 먼지와 가시들을 툭툭 털어주었다.
“차암, 서방님은 겁도 없으십니까?”
“저까짓 놈들에게 겁을 집어먹어서야 어떻게 고구려의 대장군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저놈들은 수천 명이고, 서방님은 단신이셨잖습니까? 저희들은 간이 콩알만 해졌어요.”
계 낭자는 너무도 엄청나게 큰 연개소문의 태도에 입을 다문 채 그저 부신 눈으로 보고만 있었다.
묵묵히 있던 양 노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과연 귀인께서는 문자 그대로 만부부당의 큰 재목이십니다.”
“하하하하, 노인장께서는 별말씀을 다 하시오. 옛날 을지문덕 장군께서는 백만 대군을 목전에 두고도 단신으로 적진을 종횡무진 누볐었는데, 오늘 저까짓 수천 명의 졸개들 쯤이야 거기에 비할 수 있소이까?”
연개소문의 가슴에 느닷없는 그리움이 뭉클 차올랐다.
‘사부님…….’
어느덧 날이 저물어서 요하에는 저녁놀이 빨갛게 잠기고 있었다.
“여러분, 그동안 고생들 많았소.”
그들은 석양을 등지고 요동을 가로질러 압수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에서 초가을 햇살이 깨작깨작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이따금씩 서늘한 강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한낮의 무더운 열기는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양각도가 멀지 않은 이 패강 위에는 여기저기 놀잇배가 한가로이 떠 있었고, 그 중 가장 크고 호화로운 놀잇배가 닻을 내린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뱃머리에 서서 서녘의 일몰을 보고 있던 군관이 자그마한 배에 타고 있는 나졸에게 수작을 걸었다.
“십인장(十人長), 우리 소 대감께선 벌써 행차하신다는 전갈이 있었는데, 당나라 사신 대감은 왜 소식이 없소?”
십인장이라 불린 텁석부리 사나이는 일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아, 군관 나리, 좀 전에 연락이 왔는뎁쇼, 곧들 오신다는 전갈이옵니다.”
“그래?”
“저, 그런데 나리!”
무엇을 생각했는지, 텁석부리가 주위를 한 번 살펴본 후에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느냐?”
“저어, 저어……”
군관은 버럭 화를 냈다.
“야 이놈아! 말을 하려면 딱 부러지게 할 것이지, 그래, 저어가 뭐야? 노라도 저어?”
“헤헤헤헤…… 나리도 참…… 이건 비밀인데……”
“허 참! 비밀이라니? 네놈이 누구 궁금증 나서 꼴까닥 넘어지라고 그러는 것이야? 이놈아! 어서 말 못해?”
“군관 나리, 실은…… 연개소문 말이외다.”
“녀석 참, 웬 초장이 그리 길어? 누가 연개소문 모르는 사람도 있어? 어서 비밀이나 말해봐!”
“나리, 연개소문이 돌궐에 있습니까? 당나라에 있습니까?”
“아따 녀석! 귀때기가 보배로구나. 연개소문이 돌궐에 있든 당나라에 있든, 그까짓 게 무슨 비밀인 게야?”
군관의 핀잔에 텁석부리는 쓰윽 뒤통수를 긁었다.
“하지만 나리, 평양성에서는 지금 그 어디를 가나 연개소문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요.”
“그거야 나도 안다. 왜, 연개소문이 당나라와 싸우다가 결국 포로로 잡혔다는 소문 말이지?”
“예에, 예에, 바로 그 소문 말입니다요.”
“하하하하! 연개소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나나 네놈이나 소문 듣고 알기는 마찬가지 아니냐. 낸들 더 아는 게 있는 줄 알았더냐?”
군관이 가가대소했다. 텁석부리는 군관을 벙하니 바라보면서 그래도 못내 석연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군관 나리야 밤낮 소 총관 대감마님을 뫼시고 계신데, 설마 모르실라구요.”
그때, 텁석부리 옆에 서 있던 다른 나졸이 별안간 고함을 질렀다.
“우리 소 대감마님과 당나라 사신께서 지금에야 행차시오!”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강변 모래펄로 쏠렸다.
도도하게 얼굴을 들고, 어림군 총관 소익환이 쌍두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또 한편 그 옆을 따르던 으리으리한 사인교에선 당나라 사신 이대룡이 거만한 태도로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끌어안을 듯이 인사를 나누고는 작은 배에 올라 유흥선으로 옮겨 탔다. 여러 군관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일면 술상을 내오고 일면 호위하느라 각기 자리를 잡아 서며 바삐 서둘렀다. 비단장막 안에서 준비하고 있던 두 명의 무용수가 거문고 반주자와 나와 인사를 하는데, 두 무용수의 얼굴에서 연지곤지가 반짝였다. 그들이 곧 춤판을 벌이는데, 당나라 시인 이백이 읊었다는 “깃털모양 금장식의 절풍모를 쓰고, 흰빛 무용신을 신은 채 망설망설하다가, 이내 팔을 휘저으며 훨훨 춤을 추는 너, 새처럼 나래 펼치며 요동에서 날아왔구나”라는 시(詩)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춤이었다.
“허허허! 강바람이 제법 서늘하구려. 이 대인, 한 잔 하시오.”
두 사람은 뺨에 살살 닿는 강바람을 즐기면서 대작을 시작했다. 초가을 오후의 잔잔한 강물은 반짝반짝, 저마다 실눈을 뜨지 않고는 바라볼 수조차 없는 ‘볕꽃’을 피워대고 있었다.
멀리 동녘으로는 모란봉 · 청류벽과 능라도 사이로 보이는 구제궁 청기와가 오후의 햇살을 받고 불그스레한 빛을 뿜어냈다.
이대룡은 커다란 은잔에 술을 가득 부어 소익환에게 권하며 입을 열었다.
“대감, 일전에도 말씀 올렸습니다만, 연개소문은 이미 우리나라에 인질로 연금되어 있으니 그 생사야 이 사람 손에 달려있는 거 아니겠소이까?”
“그렇지만 이 대인, 우린 아직 그 후의 형편을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가 원체 신출귀몰한 위인이라 마음이 놓이질 않는구려.”
“대감께서 염려하시는 점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연개소문보다 용맹한 장수가 수두룩하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도 태원 이궁에 감금되면 날아다니는 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어있소이다.”
소익환이 사뭇 근심어린 얼굴을 하자, 이대룡이 단호한 어조로 장담한 거였다. 강바람에 유흥선이 흔들거렸다. 소익환은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쭉 들이켜고서 이대룡에게 술잔을 돌렸다.
“이 대인, 만일 귀국에서 연개소문을 방면하게 된다면, 그제는 어떡하실 작정이시오?”
“허허, 대감도 별 걱정을 다 하시는구려. 우리 금상폐하께옵서 친히 어명을 내려 가둔 것인데, 그 어느 반역자가 감히 그 자를 석방한단 말씀이오?”
“하오나……”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제야 소익환은 느긋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감만 믿겠소이다.”
이대룡도 웃으며 받았다.
“대감, 우리 사이에 믿고 안 믿고가 무슨 소용이겠소이까? 그러니 무엇보다도 먼저 동부총관을 완전히 대감의 손아귀에 넣는 것이 급선무외다.”
“그거야 연태조는 이제 늙어서 노환으로 명이 경각에 달려 있겠다, 아들 연개소문은 또 이 대인의 손에 달려있으니, 이만하면 일은 다 이루어진 거나 다름없잖소. 조급할 게 무어 있을까만…….”
“허어 참, 대감은 만사 그렇게 속단하시니 큰일이란 말이오.”
소익환이 들었던 술잔을 놓으며 불안한 표정을 했다.
“큰일이라뇨?”
이대룡은 못마땅한 얼굴로 소익환을 쏘아보았다.
“동부 총관부에 있는 연개소문의 스승인지 도사인지 그 괴물 노인 있잖소이까?”
“있지요.”
“그 노인이 바로 두통거리외다.”
“허허허허! 이 대인도 참, 그까짓 흉물 하날 뭘 그리 걱정하시오?”
“아니외다. 소 대감께서는 잘 모르시니 그저 흉물이라 밀쳐 두시지만, 사실 그 늙은이는 큰 괴물이외다.”
이대룡은 소익환의 귀에 대고 한참동안 소곤거렸다. 그제야 소익환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소익환이 고개를 들고 이대룡을 바라보았다.
“허나 이 대인, 추호도 걱정 마시오. 내일은 내 날쌘 군관 한 30명 보내드리리다.”
“허허허, 소 대감께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야 무엇이 걱정이겠소?”
이대룡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잠시 회상에 빠졌다.
이대룡은 그때 모종의 문벌에 대한 계략으로 중요한 일에 착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일에 착수하여 일을 성취하려고만 하면 일쑤 복면 괴한이 나타나서 일을 방해하기, 아니면 심복 부하를 살해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하기를 수십 번, 그 복면괴한의 정체를 알기 위해 무수한 시일을 두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기어이 알아낸 노인의 정체가 바로 연개소문의 스승 문덕도사라는 것이다. 그 후, 노인을 처치하려고 여러 번 뒤를 쫓았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그렇게 행방을 몰라 동분서주하다가 지난밤에야 그의 거처를 알아냈고, 알아낸 김에 화끈하게 쳐들어가 사로잡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 빨리 그 노인을 처치하고 싶었지만, 이대룡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결국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하여 소익환을 선동한 것이었다. 그 괴 노인이 소익환의 뒤를 쫓는 것 또한 이대룡 자신이 여러 번 막기는 막았으나, 도저히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더라는 점을 강조하고, 소익환의 도움이 절실하다며 언구럭을 떨었다. 그래서 결국 어렵지 않게 병력 30여명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소 대감, 감사하오!”
“아니, 무슨 말씀이오? 내가 오히려 이 대인께 감사해야 할 일이외다.”
두 사람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해는 이미 서산에 반쯤 걸려 있었고, 강물은 노을에 비쳐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놀잇배는 석양을 한껏 받으며 강물 위에 뒤뚱뒤뚱 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