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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이야기 [44화] 천리장성을 쌓아라 1(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2. 13. 04:06

 

연개소문 이야기 [44화] 천리장성을 쌓아라 1

 

태종은 전내에 도열해있는 기라성 같은 신하들의 모습을 믿음직스럽다는 듯 굽어보았다.
잠시 후 광주 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가 부복 배례하고 아뢰었다.


“소신 광주 사마 장손사, 삼가 폐하 어전에 아룁니다. 고구려는 그 산세가 험악하고 지형이 천연적 요새라고 들었사옵니다. 쉽게 넘볼 상대는 아니오라……. 먼저 저들의 의향을 떠보는 것이 가한 줄로 아옵니다. 하오니 먼저 사신을 보내 세세한 국정을 살피고, 과거 수나라 때에 죽은 장병의 원혼을 장사지낸다 빙자하여 10년 전 저들이 만든 경관(京觀)을 해체하고 다시 성대한 위령탑을 건조하여 저들의 동태를 살펴봄이 가한 줄로 아옵니다.”


“음…….”


“뿐만 아니오라, 민심은 그 나라의 국력이오니, 대 당나라의 위력을 보임으로써 저들의 사기를 꺾고, 또한 민심을 이간하여 불안을 조성하고 그 국력을 약화시킴이 첩경이온즉, 이 기회에 전 사신 이대룡의 비명횡사에 대하여도 아울러 문책하여 저들의 의기와 예봉을 하락시킴이 상책인 줄로 아뢰오.”


“그렇다면, 그 중책을 누구에게 맡김이 합당할꼬?”


장손사가 다시 아뢰었다.


“신 아직 미거하오나, 대명을 받잡고 신명을 다하여 거행할까 하옵니다.”


“기특하도다. 짐은 경에게 명하노니 고구려에 들어가 저들의 국정과 민정을 살피고, 짐의 권위를 동방에 뻗치도록 하라.”


“소신, 몸과 목숨을 다하여 폐하의 성은에 보답하겠나이다.”


장손사는 당태종의 어명을 받들어 사신의 위의를 갖추고 고구려로 떠났다.

당나라 사신 일행이 고구려 평양성에 도착한 것은 신묘년(631년) 정월 초순이었다.
영류태왕은 북문 밖에까지 행행하여 당나라 사신 장손사를 맞이했다.
형식적으로 영류태왕을 배알한 장손사는 아주 거만한 자세로 감히 고구려 태왕을 다그쳤다.


“당나라 사신 장손사, 삼가 고구려 국왕마마께 문후 올립니다. 아울러, 천자께서 국왕마마께 향하옵는 두터운 선린의 정을 전하옵는 바이옵니다. 귀국과 우리 당나라가 서로의 신의와 화평으로 선린우호의 정을 쌓았던 바, 이번 당나라 사신 이대룡의 비명횡사 건은 양국의 선린 우호에 자칫 금가게 할지도 모르는 사건이온데 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대조전에 빽빽하게 앉은 고구려의 문무백관은 하나같이 손에 땀을 쥐었다.
방자하기 짝이 없는 당나라 사신의 태도에 연개소문은 치솟는 울분을 지그시 눌렀다.
영류태왕은 잠시 입을 다물고 전내를 휘둘러보았다.


“당나라 사신은 들으오. 추운 일기에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을 줄 아오. 거번(去番 지난번) 우리 당나라 사신 이대룡의 죽음은 짐 또한 가슴 아파하는 바이오. 이는 고의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저 사고에 지나지 않은 일이니, 양국의 친선우호에 하등의 영향을 끼칠 바 없는 것으로 아오.”


“그러 하오면, 사신이 이번 귀국에 들른 차에 과거 수나라 때의 전몰장병에 대한 위령제를 거행하여 외로운 고혼을 달래고자 하오니, 본 사신의 사명에 윤허해주시어 양국의 선린우호를 표징(表徵)하여 주시옵소서.”


“짐은 온 나라 안 만민과 함께 사신의 사명에 추호도 그르침이 없도록 하리니 사신은 괘념치 마오.”


“황공하옵니다.”


“만조백관은 들으라. 당나라 사신을 예우함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조처 시행할 지어다.”


“예이~”


영류태왕은 큰 연회를 베풀어 사신을 환영했다.
며칠을 쉰 당나라 사신 장손사가 고구려 국내를 순유하기 위해 떠날 때, 영류태왕은 또 많은 금은보화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전국에 영을 내려 사신에게 편의와 환대를 다할 것을 명하였다. 

고구려 국왕의 환대를 받은 당나라 사신 장손사는 의기양양하게 고구려 순회의 길을 떠났다.
그는 과거 수나라와의 접전지였던 국경지대를 향해 모진 추위도 마다 않고 길을 재촉했다.
가는 곳곳마다 객관에서 고구려 방백 수령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는 도도한 태도로 민심과 국방의 허실을 탐색하며 북으로 향했다.


그들은 요하 하류 지방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과거에 고구려가 적국인 수나라 병사들의 전사자를 합장한 위령탑인 <경관>이 있었다. 장손사는 객관에 머물러 환영연에 모인 근처 읍 수령 방백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귀국의 <경관>을 둘러보니 좁고 초라하여 도저히 죽은 자를 위로 안돈치 못할 처지였소. 이토록 부실하게 조처하고도 양국의 친선 우호를 표방할 수 있겠소이까? 나는 이제 다시 위령제를 올려 외로운 고혼들을 위무코자 하니 협조를 바라오.”


장손사의 말은 협조를 요청하는 완곡한 청탁이 아니었다. 사뭇 강압적인 명령이었다. 
이곳의 태수는 오만한 당나라 사신의 태도에 울컥 울화가 치밀었지만 꾹 눌렀다.


“사신께서는 양국의 선린우호를 찾으십니다만, 나는 아직 과거 교전국이었던 적국의 전사자를 장사 지내주고 위령탑까지 세워준 사례를 알지 못합니다. 이는 오직 고구려가 귀국과 친선 화해의 대도를 걷기 위한 화평의 크나큰 징표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소이까?”


당나라 사신 장손사는 잠시 멍했다.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본 사신이 다시 위령제를 드리고 위령탑을 개축하는 것을 반대한단 말씀이오?”


“위령제를 지내심이야 그 무슨 반대를 하오리까? 다만 위령탑을 다시 지음이 오히려 양국의 화해를 깨뜨릴까 염려되어 하는 말이외다.”


“알겠소이다. 태수께서는 귀국 국왕마마의 어명마저 거역하실 심산이시구려.”


장손사의 힐문은 짐짓 정곡을 찔렀다. 이미 전국의 방백에까지 당나라 사신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는 지엄한 어명이 내려진지도 오래였다. 울분을 참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잘 알겠소이다. 기어이 하시겠다면 다시 품신하여 확연한 어명을 받으신 후에 시행토록 하시오.”


“허허허……. 태수께서는 본 사신의 말을 잘못 이해하신 모양이구려. 나는 본시 갈길이 바쁜 몸이오. 그러니 빨리 일을 서둘러야 하오.”


당나라 사신 장손사의 행동은 마치 자기나라의 자기 부하에게 하듯이 오만하고 무례하였다. 그러나 왕명이 지엄하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위령제는 요동 벌판의 강추위를 무릅쓰고 강행되었는데, 인근 성읍에서 많은 남녀가 징발 투입되었다.


첫날, 장손사는 술과 안주를 배열하고 거창한 위령제를 진행시켰다. 위령제가 끝나자, 그는 고구려에서 세운 <경관>을 맘대로 파기하기 시작했다. 위령탑을 허물고 수많은 남녀들을 혹사하며 무덤을 파헤친 것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땅은 좀체 파헤치기가 쉽질 않았다. 부역 나온 사람들의 손은 얼어터지고 강추위에 동상 걸리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관에서는 그들을 독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손사는 날마다 공사장에 나와 이리 해라, 저리 해라, 하면서 심한 간섭과 독촉을 했다. 그 행위는 따지고 보면 고구려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강행된 위령탑 공사는 바로 그해 정월 말에 거의 끝을 보았다. 
위령탑이 완공되자, 장손사는 다시 거창한 위령제를 올렸다. 그러고서야 장손사는 일행을 몰아 길을 재촉했다. 이번에 그는 국경지방을 따라 북행을 거듭하였다.

그 소식에 맞닥뜨린 연개소문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몇 날 며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만조백관들은 이미 대조전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연개소문은 조신들을 폭 넓게 접촉하여 많은 동조자들을 만들어두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구려의 자주적 기상이 해이해짐을 한탄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상감마마 납시오!”


영류태왕의 거둥을 알리는 소리가 대조전을 울려 퍼지고, 만좌는 숙연해졌다.
옥좌에 좌정한 영류태왕은 몹시 심기가 불편한 기색으로, 옥음이 약간 떨려 나왔다.


“경등은 짐의 말을 잘 들으오. 짐은 지난날 당나라 사신 장손사를 양국의 선린우호를 위해 융숭하게 예우했음은 경들도 이미 잘 아는 바라 믿소. 헌데, 양국의 우호와 화평을 좇는 짐의 뜻을, 당나라 사신은 우리의 <경관>을 자의로 파훼하여 새로운 위령탑을 세웠소. 그것이 짐에 대한 보답이라는 말인데, 과연 당나라의 뜻이 어디에 있는 건지, 그를 의논하여 대책을 강구함이 시급할 줄로 아오.”


잠시 후,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여는 한 신하가 있었다.


“신 동부 총관부 연개소문, 삼가 성상마마께 아뢰오. 본시 당나라는 우리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려왔고, 지금도 노리고 있는 줄로 아옵니다. 이번 당나라 사신의 오만한 행동은 그대로 우리 고구려에 대한 도전이옵니다. 마마께오서는 당나라의 속셈을 규찰(糾察)하시와 종묘사직을 보존하옵고, 억조창생(億兆蒼生)을 건지시와 자위적 조처를 하심이 가한 줄로 아옵니다.”


연개소문의 상주에 이어 총관 을지만수(乙支萬壽)가 찬성하는 상주를 올렸다.


“신 서부총관 을지만수 삼가 성상마마 어전에 아뢰옵니다. 방금 동부총관 연개소문의 주청은 시의에 합당한 줄 아룁니다.”


영류태왕이 연개소문에게 하문하였다.


“허면, 경은 그에 대한 대책이라도 있는가?”


“성상마마, 우리 고구려는 과거 수나라 제국과 싸워 물리친 위대한 전력이 있사옵니다. 만백성의 경각심을 돋우고 해이된 민심을 깨우치기 위해서라도 국경지방의 성채를 보수하옵고, 장성을 새로이 수축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함이 지당한 줄 아룁니다.”


영류태왕은 조용히 전내를 둘러보았다.


“짐이 화평을 위해 진력해온 바 있거늘, 이제 새삼스레 장성을 수축한다면 오히려 당나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결과를 빚는 게 아닐까 저어되오.”


‘또, 또?……  이런 비열한 겁쟁이…… .’


연개소문은 왈칵 성질이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눈가리개를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고르잡으며 정중히 설득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마마! 이는 마치 맹수 들끓는 깊은 산중에 어린 양떼를 비치함과 같이 지극히 위태로운 형편이옵니다. 맹수가 숫제 접근치 못하도록 튼튼한 방책을 해야 하옵니다. 이는 후일 태어날 어린 양을 지키는 대도(大道)이옵니다. 만일 맹수들과의 화평공존을 위해 양떼를 방치한다면, 언제 어느 떼 양떼가 맹수의 밥이 되는 돌발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사옵니다. 깊이 통촉하소서!”  

 
“…….”

한 순간, 영류태왕이 말을 잃어버렸다. 잠시 전내는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그 침묵을 깨뜨리고 어림군 총관 소익환이 배례하고 상주했다.


“성상마마, 신 어림군 총관 소익환 삼가 아룁니다. 신이 생각하옵건대, 당나라 사신 장손사의 행위는 해괴망측하오나, 그렇다고 하여 당장 장성을 수축한다 하오면 당나라의 신경을 건드리는 결과가 되오며, 또한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천하 만민에게 쓸데없는 기우를 일으켜 민심이 소란할까 저어되는 바이옵니다. 하오니, 이는 그리 간단하게 처리할 바가 못되옵고, 잠시 당나라의 귀추를 살펴봄이 가한 줄로 아뢰오!”

  
영류태왕은 길게 한숨지었다.


“막리지! 경의 생각은 어떠하오?”


민의겸이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신이 생각하옵건대, 이는 중대 사안이오니 잠시 시일의 여유를 가지고 문무백관의 의견을 종합하심이 가할 줄 아뢰나이다.” 


영류태왕은 민의겸의 상주를 듣고 나자, 그제야 찌푸렸던 용안을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