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46화] 천리장성을 쌓아라 3
“하여간 너를 독립시킬 생각이니, 그리 알고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도록 하라. 조만간에 안에서 무슨 연락이 있을 것이야.” “예에, 대감마님…….”
바우는 꾸벅 절을 하고는 달아나듯 종종걸음 쳐서 물러났다. 서녘 하늘에는 노을이 짙게 깔려 있었다. 행랑채로 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은 바우는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독립을 시킨다? 무슨 계획이실까?’ 연개소문이 평소 바우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아끼고 사랑했던 것은 바우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장가를 들라니, 독립시키겠다니, 한편으론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어리둥절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툇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처마 끝으로 흰 구름이 둥 둥 떠가고 있었다. ‘혹시 구월이랑 맺어주시려고?’ 바우는 구월의 가느다란 허리와 볼록한 젖가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때, 안채 쪽에서 구월이가 종종걸음으로 나오고 있었다. 바우는 자기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구월아! 어딜 그리 바삐 가누?” “흥, 남이야!” 구월은 헤죽이 웃고 있는 바우에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아, 고것 참!” “뭐라굿?”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바우가 그저 웃기만 하자, 구월이 퉁명스레 종알거렸다. “이봐! 안방마님께서 들어오라셔!” “뭐? 안방마님께서?” “그래, 이 멍충아!” “아니 저게?……. 허허헛!” 구월은 말을 마치자마자 잽싸게 몸을 날려 안채로 뛰어 들어갔다. 바우는 또 한 번 히죽이 웃었다. 팡파짐한 구월이의 엉덩이가 삐죽빼죽 움직이는 것이 여간 탐스럽질 않았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안채를 향해 걸었다.
‘안방 마님이 갑자기 무슨 심부름을 시키시려고 그러나……’ 안채에 들어서니 먼저 들어온 구월이 안방 마님 앞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거였다. “마님, 소인을 부르셨사옵니까?” “불렀으니까 왔지 않느냐?” “허허, 마님도 대감마님하고 똑 같은 농을 하십니까요?” “호호호호, 부창부수(夫唱婦隨) 아니겠느냐? 게 앉게나.” 수련의 말씨가 전과는 다른 것이어서, 바우는 짚히는 바가 있었다. 아무 소리 없이 안방마님 앞에 꿇어앉았다. 왠지 몸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대감마님의 분부이시니 잘 듣게.” “예, 마님.” “부창부수라, 지아비 주장에 아내가 따르는 것이 부부 화합에 좋은 일이라…… 이제 곧 날을 잡아서 구월이와 바우 자네를 성가(成家)시키려고 하네. ” “마님……” 바우는 넙죽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어렴풋하게 그리 생각이 들긴 하였으나, 정작 그 말을 확실히 듣고 보니 마치 구름 위에 오른듯이 어질어질하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구월을 훔쳐보았다. 구월 또한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떤가? 구월이가 맘에 안 든다면 내, 딴 자리를 알아봄세. ” “아이고 마님, 딴 자리라뇨?” 바우는 고개를 더욱 떨구며 재차 말했다. “마님의 분부를 받자올 따름이옵죠.” “아닐쎄, 무조건 따르기만 해서야 쓰겠나. 인륜지 대사인데……” “무조건이라굽쇼? 아, 아니옵니다.” “그럼, 구월이가 맘에 든다는 그 말이렷다?” “예, 마님.” ‘걸맞은 부부가 되겠구나?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라……’ 수련은 힐끗 구월에게 눈길을 돌리며 바시시 웃어주었다. “알았네. 물러가게나.” “예에, 마님.” 벌떡 일어난 바우는 달아나듯이 방을 빠져나갔다. 안채 중문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새처럼 가벼웠다. 바깥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얼마 후, 구월과 바우의 결혼식이 간략하게 치러졌다. 행랑채 뒤에 자그마하게 신접살림을 차린 거였다. 무술로 단련된 바우의 믿음직한 모습에, 구월은 그저 황홀하였다. “자아, 이제부턴 우리 두 사람은 부부란 말이지. 어, 갑자기 피곤하네…… 잠이나 잘까?” 선하품을 늘어지게 한 바우는 한쪽 옆에 깔려있는 이부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이, 임자두?” “임자? 허허, 내가 자기 임자여?” “하여간, 어째 그리 눈치가 없수?” “응? 뭐? 내가 뭐가 눈치 없다고 그러는 거요?” 바우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등잔불이 졸고 있는 듯이 깜박여댔다. “임자 혼자서 벌렁 드러누워 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그러는 거야요?” “뭐? 아하! 나 좀 봐.” 바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구월의 곁에 바짝 다가갔다. “미안, 미안, 내가 깜박했었구려.” 그는 무안한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부랴부랴 그녀의 옷을 벗겼다.
밤은 고즈넉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우악스레 껴안는 바우의 체중에, 구월은 심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강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죽을 것만 같은 아픔은 점차 강렬한 쾌감으로 변하며 온 몸이 나른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바우가 격렬해질수록 구월은 더더욱 극으로 치닫는 황홀경을 헤매고 있었다.
◇◇◇
영류태왕 23년(640년) 2월 초순이었다. 태왕은 급히 조신들을 대조전으로 소집하였다. 장성 수축을 시작한지 10년 째 접어드는 동안에 북공책을 주장하던 중신들이 내내 머리를 숙인 상태로 있었고, 그래서 왕은 당나라와 지속적인 화평을 염원하여 장성 수축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당나라와의 화평을 더욱 공고히 할 대책만을 모색하고 있었다. 태왕은 당나라가 고구려의 장성 수축을 빌미 삼은 일련의 도전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까지 쌓아온 화평수교를 깨뜨릴까봐 전전긍긍하였다. 10여 년간을 별 사고 없이 지내왔지만, 그래도 영류태왕으로선 도시 안심이 되질 않았다. 확고하고도 믿음이 가는 방법을 찾아 당나라와의 우호를 증진하고 싶었다. 영류태왕은 당나라 태종이 학문을 좋아하고 뛰어난 영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태자 환권(桓權)을 당나라에 특사로 파견하자고 결정했다. 고구려가 장성을 수축함은 당나라에 대한 적개심에서가 아니라고 해명하려는 속셈의 발로였다. 모름지기, 당나라가 고구려를 의심하지 않고 계속 우호 선린의 관계를 유지케 하려고 결심한 것이었다.
대조전에는 태왕의 부름을 받고 창황히 입궐하는 조신들로 사뭇 북적거렸다. 연개소문도 부랴부랴 외팔 외눈을 각별히 점검한 후에 조복으로 갈아입고 입궁. 대조전에 들어섰다. 북풍이 몰아치는 차가운 날씨였지만, 대조전 안은 군데군데에 피워놓은 화톳불로 인해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영류태왕이 전내를 돌아보고 차분히 옥음을 굴렸다. “짐이 오늘 경등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오. 태자를 당나라에 보내어 우리의 종실 자제들과 함께 학문을 닦게 함이 어떨까 싶어 경들에게 그 의견을 묻고자 하는 것이오. 태자와 중신의 자제들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냄으로써, 두 나라의 선린관계가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오. 따라서, 당나라의 학문을 배워 옴은 장차 고구려의 발전에 기여함이 클 것인즉, 이는 누대에 연면히 이어온 대고구려의 종묘사직을 더욱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 바이라, 짐은 이를 위해 전력하려 하오.” 연개소문은 아찔하였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가? 일국의 태자를 적국이나 다름없는 당나라에 보내겠다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어처구니없이 갇혀 죽음만 기다리고 있던 시절이 떠올라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아직 싸운 바도 없거니와 진 바도 없다. 이 판국에 나라의 지존한 태자를 보내다니.....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노리는 저들의 입에다 태자를, 그것도 중신들의 자식들까지 뽑아서 보내겠다고? 이 어리석은 고건무…….’ 그때 왕 앞으로 썩 나서는 신하가 있었다. 도원수부의 오졸(烏拙 : 고구려 후기 직제의 이품 가량 되는 벼슬. 평양으로 천도한 후 지방부족의 세력을 중앙에 집중시켜 국가의 관직을 정비할 때 제정된 관직) 고정의였다. “성상마마, 신이 생각하옵건대,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처사이온 줄 아옵니다. 대저 일국의 태자는 다음 대를 이을 지존의 몸이옵니다. 항상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호전적인 당나라에 우리 태자마마를 특사로 파견하시옴은 스스로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어가는 것과 같사옵니다. 삼가 성의(聖意)를 거두시기를 바라나이다. 만일 태자마마께옵서 저들의 술책에 빠져 어떤 화라도 입으신다면, 이는 천추만대에 오점을 남기시는 일이옵고, 이 나라 만민의 수치를 남기시는 일이오니……. 이 어찌 합당하신 처사라 하오리까?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고정의의 목소리는 격정에 차서 사뭇 떨려나왔다. 태왕이 그를 노려보았다. “경은 어찌하여 이 태평성대에 환란만을 생각하오? 짐은 천하 만민의 안락과 화평을 위해 당나라와의 화친을 도모하여 왔거니와, 더욱 더 큰 유대를 갖고자 태자를 입당(入唐)시키려 하는 것이오. 비록 수나라와 우리가 혈투를 벌인 적은 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고, 지금 당나라 또한 짐과 같은 맘으로 화평을 원하고 있소. 그래서 이제까지 선린 우호의 정을 맺어온 바이오. 짐은, 피 흘리는 전쟁과 적대행위를 청산하고 공존하는 화평과 우호 선린을 찾으려는 것이니, 경은 다시 재론치 마오.” 영류태왕의 의지는 단호하였다. ‘누가 진실로 평화를 거절할 것인가?’ 연개소문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몸에다 친친 감아놓은 팔의 붕대를 확 풀어버리고만 싶었다. 당나라의 음험한 속셈을 간파하지 못하고서 저들의 농간에 속고 있는 소위 태왕의 처사가 마냥 답답하였다. “성상마마~” 소익환이 앞으로 나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마마의 지극하신 성려 지당하옵신 줄 아룁니다. 천하 만민의 안위를 근심하심이 만민의 어버이이신 마마의 하해 같으신 성려라 사료되옵니다. 태자마마를 당나라에 파견하시어 더욱 깊은 천하대세를 익히게 하심은 차대에 이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지극히 타당하옵신 분부이신 줄로 아룁니다. 혹여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당나라라 할지라도 태자마마께옵서 당나라에 가심으로써 우리 성상마마의 진의를 깨닫고 진정으로 우리와의 선린 관계를 지속할 것이라 사료되는 바, 이보다 더 천하 만민을 위한 복락이 어디에 있겠사옵니까?” 비로소 영류태왕의 용안이 펴지고 있었다. 태왕은 다시 막리지 민의겸에게 눈길을 돌렸다. “경은 어찌 생각하는지 기탄없이 말해보오.” “성상마마, 신은 오로지 성상마마의 성의(聖意)를 받들어 시행할 따름이옵니다.” 민의겸의 흰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자신의 머리로는 도시 사태파악이 안 되었다. 그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영류태왕은 그러한 민의겸의 모습을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경은 태자의 입당에 관한 모든 절차와 의식을 지체 없이 준비하도록 하오. 아울러 짐은 태자의 일행으로서 귀족 제경(諸卿)의 자제를 함께 당나라 국학에 보내려 하니, 경들은 짐의 뜻을 새겨, 한 치의 차질도 없도록 하오. 경은 이 뜻을 지체 없이 전국 방백 수령에게 알려서 시급히 시행토록 하오.” “성상마마, 지엄하신 분부, 결단코 봉행하겠나이다.” 그제야 영류태왕은 용안에 활짝 웃음꽃을 피우며 옥좌를 비우고 내전으로 들었다.주영숙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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