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45화] 천리장성을 쌓아라 2 “모든 것 경에게 맡기노니, 문무제신들과 협의하여 옳은 방도를 품의토록 하오.” 그러고 태왕은 이내 내전으로 들었다. 만조백관들은 국왕을 배웅한 뒤 각각 대조전을 나섰다. 연개소문은 을지만수와 함께 막리지 민의겸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감, 대감의 손에 국운이 달려있소이다. 소장은 이미 불구의 몸이오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신세이지만, 대감께서는 만조백관을 거느리시고 성상마마를 받들어 종묘사직을 지켜야 할 지중한 몸이시오. 대감께 고구려의 종묘사직이 달렸으니 천추의 한을 남기시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소장은 이제 공명을 세울 길이 없소이다만, 대감은 더욱 튼튼히 이 나라 사직을 지키시어 공명을 천추만대에 남기시어야 합니다.” 민의겸은 연개소문의 진의가 무엇인지 계산하느라고 멍하니 연개소문의 외눈을 바라보았다. 그때 연개소문의 눈에는 이슬이 반짝였고, 민의겸이 무안하여 얼른 그의 눈을 피했다. 그러자 을지만수가 나섰다. “당나라와의 화평을 깨뜨리지 않고도 우리의 국방을 튼튼히 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소이다. 민 대감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오늘밤 대감을 찾아뵈오리다.” “…….” 민의겸은 어떤 생각에 잠긴 채 고개만 끄덕였다. “하오면 밤에 뵈옵겠습니다.” “안녕히들 가시오.” 연개소문은 대조전을 나오며 을지만수에게 넌지시 물었다. “을지 총관, 저녁에 소장의 집에 좀 들러주시겠소이까?” “그러지요. 민 대감을 만나러 가는 길에 먼저 들르리다.” 귀가한 연개소문은 내실 후원의 초당에서 스승 문덕도사와 마주 앉아 오늘 일을 상세히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했다. “사부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날 저녁, 해가 기울었을 무렵에 을지만수가 찾아왔다. “을지 장군, 소장의 사부님이옵니다.” 을지만수도 연개소문의 스승에 대한 소문은 이미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소인 인사드립니다. 존명은 일찍이 들어 사모하고 있었사옵니다.” “허허, 이 노부를 너무 부끄럽게 마시오.” 문덕도사가 유쾌하게 웃으며 자리를 뜨자, 연개소문은 을지만수에게 술잔을 권하며 입을 열었다. “을지 장군, 나라가 위기에 놓일수록 신하된 자가 마땅히 보국의 결의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당나라는 호시탐탐 고구려를 넘보는데, 우리 조정은 무사안일을 좇으며 평화의 단꿈만을 꾸고 있는 형편입니다그려.” 연개소문의 찌를 듯한 외눈이 을지만수의 얼굴을 응시했다. ‘오호, 나보다 훨씬 젊은 장군의 의기에 내 동화되는구려……. 장군이 비록 불구자가 되었으나 오직 장군만이 난세를 헤쳐 나갈 그릇인 것을 내 알고 있소.’ 연개소문의 비범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우리가 뜻을 함께 하여 보국 대도를 취함에 무엇이 거리낄 것이 있으리오. 지성이면 하늘도 움직이는 법…… 장군의 뜻이 곧 소장의 뜻이오.” 연개소문은 자기 한 손으로 을지장군의 손을 꼭 잡았다. “을지 장군, 고맙소이다.” “허허허허……. 정신만 차린다면 호랑이 굴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을…….” “장군, 나라가 있어야만 신하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민 대감께 말씀 잘하시기 바랍니다.” 연개소문의 말투가 짐짓 은근하였다. “걱정 마오. 막리지 대감도 고구려의 중신이오. 민 대감인들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으리오.” 땅거미가 내리고 날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을지만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영류태왕이 시한을 정하여 조정의 중론을 품의하도록 명한 조례가 있기 전날 밤, 막리지 민의겸은 은밀히 어림군 총관 소익환을 사저로 불렀다. “소 총관, 내 생각으론 이번 장성 수축 건은 그대로 품의하여 통과시키는 것이 옳을 듯하오. 이번 이 일은 다행히 연개소문의 입에서 먼저 나왔은즉, 만에 하나 이 일로 당나라와의 화평에 금이 가서 불미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그 책임을 연개소문에게 물으면 될 것이오. 아무리 불구의 몸이지만 금상께도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는 연개소문 아니겠소? 이 기회에 연개소문을 잡읍시다.” “제거하자, 그 말씀이오?” “그러하오. 흐흐, 흐흐, 말하자면, 놈은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셈이오. 다시없는 좋은 기회 아니겠소?” 사실 소익환도 당나라 사신 장손사의 행동이 무척 도전적인 행위임을 잘 알고 있어서 내심 불안하던 판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연개소문의 건의에 손을 들어줄 수도 없었고, 혹여 이 일이 당나라의 비위를 건드려 자초지란(自超之亂)을 겪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싶어서, 그의 얼굴이 몹시 환해졌다. “국론에 영합하는 명분도 서게 되고, 연개소문 일파를 제거할 구실도 생기고....... 거 참, 좋은 기회구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고.......” 쿵짝이 척척 들어맞은 두 중신은 술잔을 거푸거푸 돌렸다. “모든 공은 우리의 것!” “모든 허물은 연개소문의 것!” 다음날, 예정대로 어전회의가 열렸다. “신 막리지 민의겸, 조정 중신들을 대표하여 삼가 성상마마께 아뢰옵니다. 분부하신 장성 수축문제를 여러 조신과 함께 상의한 바, 이는 동부총관 연개소문의 상주하온 바대로 시행함이 좋으리라는 중론이옵니다. 하오나, 신이 생각하옵건대, 이제까지 화평으로 맺어진 당나라와의 우의가 깨어지지 않도록 조처하심이 지당하신 줄 아뢰옵니다.” 연개소문이 분연히 일어서서 영류태왕께 부복 배례했다. “성상마마, 국가의 종묘사직이 성상마마의 대에 이르러 위협받고 흔들림이 없도록 신 연개소문 충심으로 아룁니다. 당나라는 호시탐탐 고구려를 엿보고 있사오니, 이때에 성상마마의 단호한 결의를 보이심이 연면히 이어온 대고구려의 종묘사직을 능히 보전하옵시는 지름길인 줄로 아옵니다.” 영류태왕은 잠시 막리지 민의겸의 얼굴을 응시했다. 민의겸이 머리를 조아리자, 영류태왕은 다시 전내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용안이 굳어졌다. “경등의 의견이 모두 종묘사직의 보전을 위한 지극한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인 줄로 아오. 짐은 경등의 품의를 받아 장성 축조를 윤허하노니 이를 시행함에 차질이 없도록 바라오.” “황공하여이다!” 어명은 고구려 전국의 지방 방백 수령과 산성에 추상같이 내려졌다. 장성축조 사업이 시작된 지 2년이 훌쩍 넘어 633년, 꽃피는 봄도 다 지나서 성큼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개소문보다 두 살 연상인 수련은 안채 넓은 방에 비스듬히 앉아서 뜰에 만발한 모란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가 저 모란꽃처럼 함박웃음을 지녔으면 좋겠구나……. 아, 아니야, 이왕이면 우리 대감처럼 멋들어진 장군감이어야지…… 아이고, 아파라……. 얘야, 세게도 차는구나.’ 아기가 뱃속에서 툭툭 해대는 발길질에 그녀는 깜짝 깜짝 놀라면서도 저도 모르게 행복감에 젖었다. 기분 좋은 아픔에 젖어들었다. “마님, 누우시겠어요? 자리 깔아드릴까요?” “아니다. 괜찮아.” 그녀는 맑은 눈으로 몸종 구월을 바라보았다. 원래 시어머니의 몸종이었던 구월은 수련보다 세 살이 위였지만 아직 처녀였다. 그래서인지 구월은 이름 그대로 구절초 같은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마치 물 오른 버들처럼, 구월의 몸은 한층 보들보들 싱싱해보였다. “구월아, 너도 시집가고 싶겠지?” 문득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이 마님두…….” 구월은 금세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까지 빨갰다. “싫진 않은 모양이야……. 헉!” 짓궂게 한 마디 하던 수련이 배를 어루만졌다. 아기가 또다시 발길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어디까지나 마님과 함께 있을 거옵니다.” “호호호,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네 얼굴에 다 씌어있어. 나 시집보내 주시와요……. 그렇게 말이다.” “아이 싫어요, 마님……” “싫긴……. 아, 아악!” 수련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고, 구월이 놀라서 달려들었다. “마님, 마님, 왜 그러세요?” “배가…… 배가 아파…….” 첫 진통이 온 것이었다. 수련은 냅다 구월의 손을 뿌리치곤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 예에! 마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얼른 갑니다.” 자정이 되어서도 아직 진통 중이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썰물처럼 밀려갔다가 밀물처럼 엄습하던 진통이 이젠 점점 속도를 빨리하고 있었다. 수련은 이미 초죽음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힘을 다 모으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옆에서 돕는 산파 할멈도 계속 수련의 배를 쓸어주며 진땀을 비 내리듯 쏟고 있었다. “마님, 힘을…….” 할멈의 목소리가 가물가물 멀어진다 싶은 순간, 수련은 갑자기 하복부가 달아나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기절하였다. “으앙!” 가물가물한 그녀의 의식으로, 아기의 울음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마님, 아드님이옵니다!” 할멈의 부르짖음도 아련히 들려왔다.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 맞는 아침. ‘아, 이토록 성스러운 아침은 처음이다. 그래, 이제 시작하는 거야.’ 그녀의 머릿속으로 문득 동생 하란의 모습이 스치고 갔지만,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대감…….” 여전히 외눈 외팔이의 남편이지만, 수련은 그가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허어……. 그놈 참, 코도 오뚝하고 눈도 큼지막하고, 잘 생겼구나.” “대감을 닮았나 봅니다.” “사내답게 생겼으니 아이 이름을 남생(男生)이라 합시다.” 내외는 서로 정겨운 눈길을 교차시켰다. ◇◇◇ 남생이 태어난 지 5년째의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불렀으니까 왔지.” “히히, 대감마님도…….” 연개소문이 힐끗 바우를 보며 알 수 없는 웃음을 깨물었다. “너도 장가가야지?” “장가라굽쇼? 거기가 어딘데요?” 바우가 괜히 큰소리로 되물었다. “허허, 꽤나 좋아하는군. 진작 장가를 보내줘야 하는 건데,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요! 장가라니…….” 바우는 아주 무안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약간만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슬며시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허허허허……. 장가가기 싫으냐?” 그리곤 딱 멈추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주영숙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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