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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이야기 [42화] 모략과 책략 6(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1. 27. 21:19

 

연개소문 이야기 [42화] 모략과 책략 6






해는 이미 서산마루에 걸려 주춤주춤 땅거미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연개소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곧장 내실로 들어가서 문을 열었더니, 아내 수련과 계낭자가 마주앉아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였다.


“서방님.”


아내가 조용히 연개소문을 불렀다.


“이 사람을 따로 있게 할 필요 없이 집에 들어오도록 하시는 게 어떠실지?”


“부인의 고마운 뜻은 알겠으나, 아직 때가 아닌 것 같구려……. 편찮으신 아버님께 무어라 말씀 올리기도 그렇고……  염려 마오. 내 알아서 처리하리다.”


아내 수련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서방님 뜻대로 하시와요. 소첩은 언제나 서방님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계은비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낭자는 오늘 여기서 쉬어가오.”


연개소문은 더 앉아있기가 민망하여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모든 일, 부인만 믿겠소.”


아내 수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 낭자의 거취문제를 해결한 연개소문은 스승 문덕도사와 세상사를 의논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또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아버지 연태조의 병문안을 갔다. 그러나 연태조는 겨우 미음으로 연명할 뿐, 의식불명인 채로 병은 차도가 없었다. 약이란 약은 다 써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은인자중 기회만 엿보며 무료한 세월을 보내는 연개소문에게 단 한 가지 숨통 트일 일이라면 가끔 계은비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어느덧 가을도 가고 눈보라치는 겨울이 돌아왔다. 연개소문은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완전히 변장한 멀쩡한 모습으로 총관부를 빠져나가곤 했다. 이른바 밤이슬 밟는 재미가 연개소문에게 쏠쏠한 살맛을 찾아주었다.

계 낭자가 있는 곳은 구제궁에서 멀지 않은 동네였다.


“여봐라!”


그는 대문을 세차게 세 번 두드렸다.


“예에~”


하녀의 대답이 길게 들리더니 대문이 삐걱 열렸다.


“대감마님, 어서 오세요.”


“오냐, 잘 있었느냐?”


연개소문의 목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계 낭자가 쫓아 나오고 있었다.


“서방님!”  

 
나오는 낭자를 성큼 안으로 들이밀며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낭자를 덥석 안고 한 바퀴 빙글 돌리고서야 내려놓았다.


“몹시 가볍구려. 도통 밥을 먹지 않는 거요?”


‘서방님 기다리느라 밥알이 안 넘어 가요…… ’


계은비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활활 마음에서만 타오르던 불꽃이 은연 중 얼굴에 어리비치는 것이었다.
이윽고 수정 같은 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뵙고 싶었어요……. ”


“낭자, 나로 인해 고생이 많구려. 조금만 더 참으시오. 내, 낭자의 은혜를 갚을 날이 있으리다.”


“은혜라니요. 그런 말씀 하시면 오히려 서운하옵니다.”


“서운하다고?”


“예, 다시는 그런 말씀을 마시와요.”


계은비는 눈물을 삼키며 말끝을 흐렸다.


“알았소. 다시는 그런 말을 안 하리다.”


이따금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문풍지를 울렸다. 문 밖에서 하녀가 아뢰었다.


“술상 봐 왔사옵니다. 아씨.”


“오냐, 들어오너라.”


하녀가 조촐한 술상을 들여놓고 나갔다.


“서방님, 한기가 어리실 텐데 약주 한 잔 드사이다.”


계 낭자는 희고 고운 손으로 은주전자를 들어올렸다.


“허어, 그렇잖아도 목이 컬컬하던 참이었소.”


그는 얼굴 가득 웃으며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뜨거운 술기운이 쏴하니 내장을 훑었다.
계은비는 다소곳이 앉아 다시 술잔을 채웠고, 창밖에선 함박눈이 나릿나릿 뜰을 채우고 있었다.
어디서 개 짓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허허, 오늘 밤 운치가 그저 그만이구려.

소리 없이 눈 내리는 깊은 밤,

사랑하는 임과 함께 마시는 이 술맛을 그 어디다 비하랴…… 

허허……  내 초나라 굴원의 시를 조금 읊어보리다.”



해와 달은 천년을 비추는 거울이요
(日月千年鏡일월천년경)


강산은 만고의 병풍이라네
(江山萬古屛강산만고병)


동과 서는 해와 달이 드나드는 문이요
(東西日月門동서일월문)

남과 북은 기러기들의 길이라네
(南北鴻雁路남북홍안로)



“아유, 서방님. 그 다음은 소첩이 읊겠나이다.”



강산은 만고의 주인이요
(江山萬古主강산만고주)

사람은 백년의 손님이네
(人物百年賓인물백년빈)

세상일은 석 자 거문고에 실어 보내고
(世事琴三尺세사금삼척)

삶은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것
(生涯酒一盃생애주일배)

“낭자가 언제 굴원의 시를 다 외우고 있었다니, 내 참 무한히 기쁘구려.

둘도 없는 문우를 만난 기분이오.”


취기가 알맞게 오른 연개소문은 호탕하게 웃고 나서 와락 계은비의 허리를 안았다.


“아이, 서방님두…….”


너울너울 춤추는 촛불을 응시하던 연개소문이 또 시를 읊기 시작했다.



달은 우주의 촛불이고
(月爲宇宙燭월위우주촉)


바람은 산하를 두드리는 북이라네
(風作山河鼔풍작산하고)


달은 자루 없는 부채
(月爲無柄扇월위무병선)


별은 끈 끊어져 흩어진 구슬
(星作絶瓔珠성작절영주)



그렇게 시를 읊으며 술을 마시며, 두 사람은 날 새는 줄을 몰랐다.

◇◇◇

이듬해 봄이었다.
모란봉 너머로 아지랑이가 아물거리고, 얼었던 패강의 물도 녹아 푸른 물결이 끊임없이 출렁거렸다.
화들짝, 호들갑스레 피어 하느작거리는 화초를 바라보면서, 연개소문은 왠지 울적한 마음이 솟구쳤다. 해가 이미 동녘을 벗어나 있어서 밤이슬에 젖었던 풀잎들이 쨍하니 빛을 뿜었다.
사랑방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로 연개소문은 멍하니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간밤의 꿈이 심상찮았다. 길조인지 흉조인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간밤의 꿈을 되새겼다.


꽈르릉!

별안간 마른하늘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스쳤다.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뒤덮는가 싶더니 이내 굵다란 빗줄기가 마구잡이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방은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는데, 그 빗속에서, 그는 황야를 헤매며 집을 찾고 있었다. 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가 마악 집의 대문을 뛰어들어 사랑채 중문을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우지끈! 꽈광~

순식간이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큰사랑의 대들보가 내려앉는 거였다. 그렇게도 튼튼하던 큰사랑 대들보가 허물어지자, 그가 기거하던 작은사랑에 별안간 연기가 자욱하게 일더니 한 마리 커다란 용이 입으로 붉은 불을 토하면서 서서히 하늘로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등천하는 용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로 오르던 용의 꼬리가 한 번 꿈틀 하더니 멍하니 서 있는 그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으악!” 

그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한바탕의 꿈이었다.
머리가 띵하고 어질어질하였다.

벌떡 몸을 일으킨 연개소문은 부지런히 내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님께서 아무래도…… ”

아내 수련이 지아비를 보자마자 수심 어린 표정이더니 말을 끄집어내다 마는 거였다.
연개소문이 부리나케 큰사랑으로 달려갔더니, 시종 드는 하녀들이 몹시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연개소문을 맞이했다.
연태조는 완연히 의식을 잃은 채 가래 끓는 소리만이 요란하였다.
황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여봐라! 빨리 기별하라. 어서 의원을 오시라 하라!”

연개소문이 계집종에게 두서없이 소리치자, 계집종이 “예~” 하고서 황급히 뛰어나갔다. 연개소문은 가만히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옛날 그 좋던 풍채는 어딜 갔는지 피골이 상접하였다. 움푹 들어간 눈, 툭 불거진 광대뼈. 약간 벌어진 입으로는 연신 가래 끓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숨소리는 겨우 들릴 정도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였다.

‘의원은 왜 이리 더디 오나…….’

의원 부르러 간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는 조바심이 나서 견디기 어려웠다.
언제 소식을 들었는지 연비가 들어와 조용히 옆에 앉았다. 많은 군관들도 대청으로 몰려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의원은 어찌 이리 늦느냐?”

상노와 계집종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의원이 도착하였사옵니다.”

상노가 황급히 아뢰었다.

“어서 들라하라!”

바우가 씨근벌떡하며 의원을 안내하여 사랑채로 들어왔다.
연개소문은 찌푸렸던 얼굴을 펴며 의원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의원은 이마에 내솟은 땀을 닦을 사이도 없이 자리에 털퍼덕 앉았고, 앉자마자 뼈만 앙상한 연태조의 팔을 잡고 맥을 짚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의원의 얼굴로 쏠렸다. 의원의 콧잔등에 연신 땀방울이 맺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의원이 이윽고 병자의 팔을 놓더니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병자의 눈을 까뒤집었다가는 가만히 숨소리를 들었다.

“가망이 없습니다. 운명하실 시간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 환약을 잡수시게 하면 잠시 정신을 차리시게 될 것이옵니다. 이는 최후의 처방입니다.”

의원은 조그마한 가죽주머니에서 환약 한 덩이를 꺼내어 쪼개더니 그것을 병자의 입에 넣었다.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병자의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굳게 닫혔던 연태조의 눈꺼풀이 열렸다. 의원이 연개소문을 돌아보면서 조용히 일렀다.

“약기운이 돌았나 봅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얼른 하십시오.”

연태조는 눈동자를 살살 굴리며 주위를 쭉 훑어보다가 연개소문의 얼굴에서 딱 멈추어 움직일 줄 몰랐다. 그러더니 입이 움직거리기 시작했다. 연개소문은 얼른 아버지의 입에 귀를 갖다 댔다. 할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들을 말을 들어주는 것이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에 대한 도리일 것이었다. 그랬다.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유언을 들었다. 그 말이 어떤 말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듣기는 들었다.

“예, 아버님!”  

그 외마디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는 와락 엎드려 앙상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 밑바닥에서 풍랑을 몰고 와 해일 같이 솟구치는 울음이었다. 이윽고 연태조의 눈이 감겼다. 망막에 아들의 얼굴을 또렷이 새긴 채로, 훌쩍 숨을 거둔 것이었다.      
의원이 병자의 손을 힘없이 놓았다.

“운명하셨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난 연개소문은 자꾸만 허전해지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나라에서도 조문(弔問)과 함께 많은 은자를 내려주었고 장례도 무사히 치를 수가 있었지만, 이제는 습작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동부 총관부의 후임 계승권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서두르지 않았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도 한동안 총관부 외에는 문밖출입을 삼갔다. 물론 바깥엘 나가려면 좀더 완벽한 불구의 몸을 연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그는 군관들이 탐지해온 소익환 ·이대룡 일파의 동정에 대하여 예리한 촉수를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군관이 눈이 번쩍 뜨이는 정보를 들고 왔다.

“장군님, 어제 소익환 어림군 총관과 막리지 민의겸 대감이 국왕마마를 배알하옵고 동부 총관부 습작 문제를 주청하였사옵니다.”

“허허 그래? 잘 됐구나.”

연개소문의 눈이 새파란 빛을 발산했다.

소익환 일파가 국왕께 이렇게 보고했다.

“태왕마마, 연개소문에게 동부총관을 습작케 함은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그는 불구가 되어 돌아온 후로 성격이 더욱 광포해졌다 하옵니다. 그래서 모든 부민(府民)이 그의 습작을 결사반대하고 있사옵니다.”

영류태왕의 머리는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리 나쁜 편도 아니었다.
태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멀뚱한 표정으로 하문하였다.

“전일, 바로 경들 입으로 짐에게 뭐라고 했던가? 연개소문은 불구가 되어 일체 문밖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했잖은가? 짐이 아직 노망이 난 것도 아닌데, 그 말을 잊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차제에 부민들은 또 연개소문의 포악한 행동을 어찌 알고 결사반대한다는 말인고? 어디 앞뒤 말이 다른 까닭을 설명해 보시겠는가?……  흐음……. 짐은 국가의 중신이었던 연태조의 죽음을 생각해서라도 연개소문의 인물됨을 재점검해본 연후에 다시 결정하겠노라.”  

눈엣가시였던 연개소문이었다. 그러나 북공책은커녕 자기 가정 하나 다스릴 처지도 못 될 만큼 불구의 몸이 된 게 아닌가. 영류태왕은 연개소문에게 한없는 연민의 정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를 다시 한 번 만나보고 그가 정녕 보잘 것 없는 인물이란 게 확인되면 그냥 그 작위를 그대로 계승토록 하리라 마음먹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