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47화] 천리장성을 쌓아라 4
후원 초당에 앉아 스승 문덕도사에게 비분강개에 찬 심경을 토로하고 있던 연개소문에게 고정의가 찾아왔다. 바우의 안내로 들어온 고정의를, 연개소문은 사랑채에서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고 장군!” “대감, 별안간 찾아뵈어서 죄송하오.” “아니올시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도원수부의 오졸 고정의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였다. 그의 얼굴에 분노의 그림자마저 어른거리고 있었다. “고 장군, 오늘은 참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이 나라가 당나라의 속국이 아니어든, 어찌 태자마마를 적국이나 다름없는 당나라로 보내시겠다는 것인지, 성상마마의 어의를 짐작할 수가 없구려.” “이는 필시 당나라 측의 간교에 넘어간 까닭일 거요. 당나라가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계속 우리를 넘보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 아니겠소? 그래서 천리장성을 쌓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오.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아는 이치인 것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태왕께서는 당나라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정녕 믿으신 건지…… 태자마마의 입당이야말로 저들 입장에서 볼 때에 넝쿨 째 떨어진 호박인 셈이 아니겠소? 저들은 필시 태자를 볼모로 삼아 야욕을 채우려 들 것이오. 태자마마의 신변에 변이라도 생긴다면, 그야말로 대고구려의 수치가 될 것이오. 만백성에게 파급되는 실망의 척도가 어느 정도가 될지, 예상하기도조차 두렵소.” “그 판국에, 귀족의 자제 수십 명을 더불어 그쪽 국학에 보내신다 하시니…… 이 나라의 앞날이 심히 걱정되는구려.” “비약하자면 나라의 기둥뿌리를 빼다 바치는 격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허허, 신하된 도리로 그 말만은 꾹꾹 눌러 참았소이다.” “잘 하셨소이다…… 어쨌거나 친부가 친자를 적지로 보내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 아니겠소이까?” “하긴 그렇소만, 이상하게도 ‘제 무덤을 제가 판다’는 속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구려.” ◇◇◇ 어린 태자가 부왕 앞에 부복 배례하였다. “태자는 들으라. 멀리 당나라에 들어가서 천하의 정세를 살피고 당나라와의 화평우의에 공헌한다면 이는 곧 고구려의 안위를 도모하는 일이니라. 태자는 나라의 위업을 추호도 실추함이 없도록 하라.” “아바마마, 소자, 아바마마의 분부, 가슴 깊이 새기어, 추호도 그르침이 없도록 근행하겠나이다. 그동안,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성체 보중하시옵소서.” 왕후는 붉어진 눈시울을 누르며 태자 환권의 모습을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태자가 국서를 배수하고 부왕에게 재배하자, 태자와 함께 할 귀족의 자제들 또한 태자의 뒤에 도열하여 국왕께 재배했다. “그대들은 모두 내일의 이 나라 종묘사직을 지켜야 할 고구려의 동량지재(棟梁之材)이니 그 본을 망각함 없이 일로정진(一路挺進)하여 학업을 닦고, 대고구려의 사표(師表)가 되어 장차 태자를 도우라. 당나라는 학문을 좋아하고 문물이 번성했느니라. 또한 문화가 찬연한 나라이니, 대고구려의 긍지를 추호도 더럽힘이 없도록 하라.” “예이~” 태자와 귀족의 자제들은 모두 일어나 마지막 하직의 배례를 올렸다. 이듬해 가을, 당태종은 고구려 태자의 입당에 대한 답례로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에 파견하였다. 고구려의 지경에 들어선 그는, 이르는 성읍마다 관수(官守)들에게 화려한 당나라 비단과 금은보옥을 아낌없이 뿌렸다. 그러면서 은근히 지방 방백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신성·개모·요동·백암·건안·안시·오골·서안평·박작 등의 여러 성을 유유히 돌아서야 평양성에 이르렀다. 영류태왕은 당나라 사신 진대덕을 영빈관에 머물게 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고는 그를 접견하기 위한 날을 받아 택일하고 그 준비를 성대히 진행하였다. 영류태왕은 일찌감치 대조전에 납시어 진대덕을 기다렸다. 대조전 앞에 이른 진대덕은 황문시랑의 정중한 안내로 전내에 들어섰다. “당나라 사신 진대덕, 성상마마를 배알하러 대령한 줄로 아뢰오!” 황문시랑이 아뢰는 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전내를 울렸다. “당나라 사신을 이리 가까이 들라 하라.” 황문시랑이 진대덕을 안내하여 용상 가까이 대령했다. 진대덕이 고구려 태왕 앞에 부복 배례하였다. “당나라 사신, 직방낭중 진대덕, 삼가 고구려태왕마마께 국서를 올리옵니다.” “짐은 양국의 화평과 우의를 위해 멀리 험난한 길을 온 사신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오!” “황공하옵니다. 거년(去年지난해) 고구려국 태자마마의 내조(來朝)에 답하여, 대당 천자께옵서는 양국의 화평을 기리기 위해 외신으로 하여금 우리 황제폐하의 너그러우신 뜻을 전하도록 하였사옵니다. 고구려국의 무궁한 발전과 국왕마마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옵니다.” “귀국 황제께서 각별한 배려를 해주시어 짐은 진정 흡족하오.” 영류태왕의 만족해하는 모습을 슬쩍 훔쳐본 진대덕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속으로 웃었다. ‘조아릴수록 속은 더욱 깊이 포장되는 법이지……. 암, 그렇고말고.’ 대조전을 물러나오면서, 진대덕은 통쾌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마구 박장대소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누르느라, 그는 죽을 것만 같았다. 모든 일이 너무나 쉽게 풀려가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기실 진대덕이 이번에 내조한 것은 명분상으로는 고구려국 태자의 내조에 답한다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달랐다.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고구려의 국왕이 그토록 쉽게 전국 순유의 윤허를 내려주시다니, 그로서는 이보다 더한 행운이 없었다. 이번 일만 잘 성사되면 직방낭중이란 보잘 것 없는 벼슬에서 일약 상서* 벼슬을 받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진대덕은 고구려 천하를 자기 맘대로 종횡무진 누비며 내정 탐지에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여러 달을 두고 각 성을 주유하던 진대덕은 2월 초에 요동성에 이르렀다. 하늘하늘한 능라로 지은 여름옷을 입고 떠났던 진대덕은 어느새 겨울 털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달리는 가마 안에서, 진대덕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대감마님, 무슨 분부라도 계시오니까?” “여기가 어디냐?” “안시성이옵니다.” “안시성이라?” “그러하옵니다. 저 성문 밖에는 선우돌(鮮于突) 성주를 위시한 많은 관헌들이 대감마님을 영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허허, 그러냐? 너는 시종들에게 일러라. 이곳 성주와 관원들에게 선물들을 즉각 준비하라 일러라.” “예, 대감마님, 그것은 벌써 준비되었사옵니다.” 진대덕은 자못 만족하여 다시 가마 문을 닫았다. “사신께서 우리 안시성에까지 행차해주시니 영광이로소이다.” 진대덕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아니오. 보잘것없는 사신을 이처럼 환대해주시니 되려 황공할 따름이외다.” 그 후 진대덕이 안시성을 맘껏 누비며 그 허실을 염탐했음은 두말 할 나위없었다. ◇◇◇ 어스름한 저녁 무렵, 을지만수가 연개소문을 찾아왔다. “대감, 그 동안 안녕하셨소이까?” “을지 장군, 어서 오시오.” 연개소문이 권한 자리에 앉은 을지만수는 얼굴에 심각한 빛을 담고 있었다. “나라 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성상마마의 총명이 심히 어려워지시어, 저들 당나라의 진의조차도 헤아리지 못하시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소이다.” “옳으신 말씀이오. 작년에는 태자마마를 당나라에 보내시는 변이 있더니, 이번엔 당나라 사신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가진 진대덕이란 희대의 첩자가 우리나라의 허실을 낱낱이 캐어가도록 내버려두다니…… 아니, 오히려 협조하고 후대하였으니…… 이제는 고구려의 향방이 어디인지를 점칠 수도 없소이다.” 연개소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갔다. “곪기 전에 수술을 해야지요.” “수술?” “그렇소. 대수술을 해야 하오. 이러다간 대고구려의 연면한 종묘사직이 위태롭소이다.” “……” “지금, 뜻있는 조신들이 모두 하나같이 종묘사직을 근심하고 있소이다.” 을지만수의 목소리가 연개소문의 귀를 따갑게 때렸다. “을지 장군, 장군의 말씀이 정녕 옳소이다. 허나......” “연 장군, 장군께서만 앞에 나서주신다면 내 몸을 버려서라도 종묘사직을 위해 진충보국하리다.” “나라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위험 속에 몰아넣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서야 어찌 국록을 먹는 중신이라 하겠소이까? 이러한 반역의 무리를 몰아내는 대 거사를 이끌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장군 뿐이라 믿소이다.” “고마운 말씀이오이다. 허나, 나는 외팔이에 외눈이외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나를 믿겠소이까?” “아무리 그래도 연 장군은 여전히 만부부당의 사나이인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하기야, 나라의 중신된 자가 어찌 나라의 앞길을 모른다 하겠소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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