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15화]음모에 걸려들기 [6] 영류태왕 뒤에 시립해있던 소익환이 발을 한 발짝 앞으로 디디며 조심스레, 짐짓 얌전스레 상주하기 시작했다. “성상마마, 소신의 의견을 잠시 아뢰겠나이다. 황공하오나, 만조백관들이 모두 돌궐파병을 반대하는 마당에 오직 연태조 총관만이 옳다고 하였사옵니다. 이런 판이니, 다른 사람이 사신으로 간다고 하면 연 총관은 필시 이를 믿지 못할 것으로 사료되옵나이다. 뿐만 아니오라, 연 총관은 너무 나이가 많사와, 사신으로 가라고 함은 심히 부당하와서 ……그러하오니 마마, 연 총관의 자제 연개소문을 보내 돌궐의 자세한 실정을 알아보게 하는 것이 어떠하올지, 감히 아뢰옵나이다.”
‘이럴 수가……. 문덕도사의 말이 딱 맞아떨어진 것 아닌가…….’
“마마, 황공하옵나이다. 미거한 소신의 가아(家兒 : 남에게 자기의 아들을 낮추어 일컫는 말)에게 사신의 중책을 맡기시오니……” “허허허허! 경이 쾌히 수락하니 짐의 마음도 한결 흡족하오. 어서 날짜를 택하여 출발할 준비를 서두르도록 하오!” “분부 한 치 어김없이 받들겠사옵니다. 하오나 성상마마!” 연태조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아뢰었다. “마마, 소신의 가아는 혼사를 앞에 두고 있사옵니다. 한 달간의 말미라도 주시옵기를 바라나이다.” “경이 알아서 하오. 그러나 명심할 것은, 국사는 사사로운 일에 앞서는 법이니, 그 기한이 절대로 한 달을 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오.” “황공하여이다, 성상마마. 소신, 대명을 어김없이 봉행하겠나이다.” 비로소 만족한 웃음을 용안 가득히 실은 영류왕은 즉시에 황문시랑을 불러들였다. “경은 지체 없이 시행하라. 연 총관의 자제 연개소문이 한 달 후에 돌궐 사신으로 갈 수 있도록 그 절차를 착오 없이 이행하라.” “예이~ 소신 대명을 받자와 어김 없이 봉행하겠나이다.” 영류태왕은 연태조와 소익환을 번갈아보며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천근 무거운 마음으로 어전을 물러나온 연태조는 대전 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들을 찾아 걸음을 떼었다. 생각이 오락가락하여 착잡해진 심경으로 아들이 있을 곳에 당도해보니, 그런데 아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 거였다.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을 누르며 두리번거리던 그는 문득 소나무 숲 근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썩하는 것을 목격했다. “어느 놈이 무엄하게도 대전 앞에서 저리 소란을 피우는고?” 연태조는 혼잣말을 하며 그쪽으로 말을 달리다가 갑자기 섬뜩하였다. 어림군의 군사 30여명이 피를 흘리며 여기저기 꼬꾸라져 있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달려가자, 그곳에는 또, 어림군 60명 가량이 단 한 사람을 포위하고 싸우는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도대체 누구야?’ 연태조는 좀 더 가까이 말을 몰았다. 그리고 젊은이의 바로 옆으로 다가가려 하는데, 등 뒤에서 성급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더니 금방 연태조 옆에 와서 섰다. 어림군 총관 소익환이었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의 숨결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식식거렸다. “아니, 소 총관, 대전 바로 앞에서 이 어인 까닭이오?” “뭐라고요? 그걸 몰라 묻소이까?” “무슨 말씀이시오?” “허허, 대감의 자제분이 저 모양인 것을, 정 모르신단 말씀이오?” “흡……. 우리 개소문이?” 화들짝 놀란 연태조는 황급히 말을 몰아 젊은이의 바로 앞으로 갔다. 과연 개소문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연태조의 노한 목소리가 쩌렁! 솔숲을 울렸다. “아버님, 송구합니다. 저 어리석은 군사들이 공연히 시비를 걸어선 창칼을 들고 마구 휘두르기에 할 수 없이 그만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그랬더라도 여긴 대전 앞이 아니냐? 참았어야지!” “송구하옵니다. 아버님, 그러나 대전 앞에서 먼저 일을 벌인 쪽은 어림군 쪽. 대전 앞이니 가만히 당하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옆에 있는 소익환의 눈치를 살피니 그는 연개소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중이었다. “개소문아! 소익환 총관님이시다. 인사 올려라!” 부친의 뜻을 감지한 연개소문이 재빨리 무릎을 꿇고 너부죽이 큰절을 올렸다. “대감께 인사 올립니다. 소인 아직 미거하와서 대감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제 본의가 아니었사오니, 부디 용서해주시길 청하옵니다.” 오히려 기선을 제압당한 꼴이 된 소익환 총관. 그는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을 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어, 일당백이로군!’ 양각도에서 톡톡히 당했던 일을 떠올리자 치가 떨렸지만, 따지고 들면 번번이 이쪽 잘못이었다. 소익환은 짐짓 점잖은 목소리로 연개소문을 타일렀다. “연 총관 대감과 나는 대대로 맺어온 교분이 두텁다네. 서로가 대왕마마를 모시는 중신된 처지이지. 그런데 우리 군관과 그대가 맞붙어 충돌해서야,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 않나? 허허허!” 연태조도 따라 웃었다. 그의 비위를 맞춰야 할 순간인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쉽게 간파한 연개소문은 소익환에게 다시 배례를 올렸다. “소 총관 대감, 앞으로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없도록 각별히 조심하겠사옵니다.” 연개소문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니 소익환은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할 명분이 서질 않았다. “소 대감, 아직 철없는 가아가 저지른 일이니 부디 용서하시오.” “너무 심려 마시오. 이왕 저질러진 일이고, 상황은 끝난데다 다친 자는 있으나 죽은 자는 없으니 말이오.” 간신히 일을 무마시킨 연태조는 가뿐하게 말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연개소문도 가뿐한 몸짓으로 말에 올라 아버지와 나란히 말을 몰았다. ◇◇◇ 연태조가 아들 개소문과 함께 집에 돌아왔더니 뜻밖에도 반가운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문덕도사였다. 연태조는 도사를 보자마자 내내 궁금했던 점을 캐물었다. “도인! 우리 개소문이 돌궐 사신으로 가게 될 것을 어찌 아셨소이까?” “……” 문덕도사는 그저 싱긋이 웃어주고만 있었다. “사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연개소문이 도사에게 정중히 인사 올리자, 도사가 엉뚱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하, 오늘 두 번째 보는 것 아니던가?” “아 참! 잠깐 뵈었지요…… 눈 깜짝할 새 스쳐 가시는 바람에 그것이 꿈인 줄 알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연태조에게 동조를 구했다. “10년 세월…… 그 동안 이 늙은이의 마음은 하루도 개소문을 떠난 날이 없었소이다. 허니, 구중궁궐에서 일어날 일인들, 그게 개소문과 관계된 일인데 어찌 모를 리가 있겠소이까?” 연태조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마음이 친 아비의 마음과 추호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내 이미 늙었소이다만, 대고구려의 기상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북을 치고 남을 사수하라는 방책을 고수, 주장해왔소이다. 얼마 전에 어전의 대회의가 열렸었는데, 나는 모든 조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돌궐파병을 주장했었소. 금상마마께서도 지금 한때의 화평이 영원한 평화로 이어질 줄로 아시는 것 같았소이다. 그런데 오늘 돌연 입궐 분부를 받자와……” 잠시 말을 끊은 연태조의 가슴속에선 온갖 회포가 들끓었다. “마마께오선 이 늙은 신하의 아들 개소문을 돌궐 사신으로 보내라는 지엄하신 대명을 내리셨소……. 도무지 내키지 않았지만 도인의 귀띔도 있었고 하여……” 연태조는 물끄러미 문덕도사를 바라보았다. “잘 알고 있소이다. 간악한 무리들이 저들의 지위와 권세를 굳게 다지려고 개소문을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음모를 꾸민 겁니다. 그러나 연 대인! 이것이 개소문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라고 생각하사이다.” “그러나 아비 된 마음에 어찌 아들을 사지에 즐겨 보내리오?” 연태조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지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좋은 수련장이외다. 큰 인물이 되려면 돌궐이나 당나라에 한번쯤 들어가 천하대세를 통찰해봄이 필연이니까요.” 연태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날 명장이었던 문덕도사, 아니 을지문덕 장군도 생사를 가름 할 수 없는 적진에 목숨을 내놓고 뛰어들었던 장본인. 연태조는 한없는 존경의 눈으로 도사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사부님 말씀이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소자도 돌궐이나 당나라에 들어가 한번 천하 대세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하기야, 그 무예를 보아도 어떤 곳이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능히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들임을 연태조는 알아차렸다. 더욱이, 개소문이 돌궐에 가지 않으려고 한다해도 아니 갈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지엄한 태왕의 어명인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문덕도사가 들먹인 ‘전화위복’이란 말이 연신 되풀이되고 있었다. 연개소문이 돌궐 사신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이 집안에 알려지자, 연태조 댁의 식구들은 온통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안방에서 하염없이 아들의 앞날을 생각하고 있던 연태조의 부인은 불현듯 시비를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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