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16화]음모에 걸려들기 [7]
“구월아!” 이즈음 그녀의 머릿속엔 아들 개소문이 돌궐로 떠나기 전에 혼사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만이 꽉 들어차 있었다. 연비 장군님이 떠난 지도 20일이 넘었으니 아마 곧 당도하실 거예요.” 연개소문과 공하란의 혼사는 두 집안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히 치러졌다. “흡, 그대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다가 신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화란이인 줄 아셨소이까?” 공 대인의 큰딸 수련이었다. “어찌 된 일이오? 화란 낭자는 어디 가고, 어떻게?” 자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킨 신랑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서방님!” 수련은 너무나 애절한 눈길로 연개소문의 옷자락을 잡았다. “소녀, 아무 것도 모르옵니다. 그저, 연 대인께서 소녀를 자부로 삼으신다는 친서를 보내셨다고, 그래서 이렇게 온 것뿐이옵니다.” ‘중대한 착오! 아아, 셋째딸이라고 명시하지 않으셨구나. 이 일을, 아아, 이 일을……’ 신랑은 힘없이 주저앉으며 수련을 흔들었다. “그대의 아우……. 화란 낭자는 지금 어디 있소? 온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를 왔으니 지금 집에 있는 거요?”
“달포 전쯤, 유모랑 함께 어디로 사라졌사옵니다.” “무슨 소리요? 왜 사라졌단 말이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모르는 일이오라…….”
연개소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화란과 혼례를 올린 줄 알았는데 화란의 큰언니라니! 그렇다고 신방을 뛰쳐나갈 수도 없는 일. 그는 재빨리 결정했다. “잘 알았소. 자초지종은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처형! 나는 첫날밤부터 처형과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잘 수는 없소. 아니, 앞으로도 내내 그럴 것이오.” “흑, 흑, 흑…… 서방님, 소녀가 첫날밤부터 소박을 맞아야 하나요?”
“아니오. 소박이라니! 그대는 어디까지나 나의 처형이기 때문이오. 서러워 마시오. 나의 아내.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집을 나갔다는 것인지 알 순 없지만, 필시 깊은 사연이 있을 듯싶소. 처형! 혹여 나의 아내가 돌아왔을 때 들어앉을 자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니겠소? 나는 단지, 아내를 기다리겠다는 것 뿐이오. 단단히 약속한 것이었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혼사를 서둘렀던 것인데…… 유감이구려. 하지만 이 일은 절대로 양가 부모님들은 몰라야 하오. 안 그래도 10년만에 나타나서 또 다시 먼 타국으로 떠나게 된 불효가 막중한데, 여기에다 내가 아내로 원한 사람은 처형이 아니라 처형의 아우였다는 사실을 새삼 아시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오. 당신들의 며느리, 사위가 뒤바뀐 것을 아시면 그 얼마나 상심하시겠소? 며칠 후에 돌궐로 떠나게 되어있으니, 처형과는 정 붙일 새도 없겠구려. 오히려 잘된 일이오.”
꿈속에서나마 화란을 품고 뒹굴었을 뿐이었다. 드디어 신랑이 돌궐 사신으로 떠날 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늙은 연태조의 뒤를 이어 동부 총관부를 상속할 혈통이 끊기는 셈이었다. 동부 총관부가 폐문의 위기에 처하게 됨은 불 보듯 빤한 이치였다. 연태조에게 동조하여 북공책을 주장하던 조신들은 기를 펴지 못할 것이었으며, 반면에 당나라와 화친하자는 파가 득세하여 큰소리를 치게 될 것이었다. 멀리 하기 시작했다. ◇◇◇ 장안 번화한 거리를 빠져 서문으로 나서면 남해포(南海浦)로 가는 큰길이 뻗쳐있었다. 그 서문 안 네거리에 당나라의 공관이 있었고, 공관 맞은편 골목으로 쑥 들어서서 좌우편에는 만물상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만물상 거리를 북쪽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청루골이 나오고, 입구에 <경일관(慶一館)>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청루골에 들어가는 한량들이 이곳에 들러 두어 잔 술에 얼근해진 후 청루에 오르거나, 청루에서 화선을 끼고 놀아나던 한량들이 들러 한 잔 씩 마시고 가기 때문이었다. 경일관 드높은 대문 안에는 아직 초저녁인데도 술꾼들이 숱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멍석이 깔려있었는데, 손님들이 멍석 위에 자유자재로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속에선 오색 물고기들이 한들한들 꼬리치며 헤엄 치고 있었다. 항라 치마와 세모시 치마저고리를 입고 늘어서 있었다. 못 주변에 늘어서 있던 아리따운 화선들이 치마를 걷어올리고 소매를 둥둥 걷어올린 뒤에 맑은 못에 들어가서 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고기는 금방 잡히질 않기 마련이었다. 화선들의 몸매가 더욱 매혹적으로 드러났다. 흰 팔과 팽팽하게 뻗은 다리의 고혹적인 싱싱함이 게슴츠레한 술꾼들의 눈에 흡사 인어 같이 보였다. 봉긋한 가슴은 살짝 누르기만 해도 빵 터질 것만 같이 탄력 있었고, 그 몸이 물속에서 헤엄칠 때마다 술꾼들은 탄성을 올렸다. 그래서 당연히 물고기를 잡아달라는 소리가 경쟁하듯 아우성을 쳤다. 못 주위에 환하게 밝혀놓은 청등홍등이 그녀들의 인어 같은 모습을 더욱 선정적이게 했다. 못을 중심으로 한 드넓은 뜰 여기저기에는 목판 술상들이 놓여 있었고, 그 술상을 중심으로 술꾼들은 끼리끼리 둘러앉아 있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슬금슬금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밤의 장막을 등에 업고 주막 문을 들어서는 한 사내가 있었다. 뚱뚱한 몸집에 작달막한 키, 그리고 머리가 홀딱 벗겨진 중년 사내였다. 제법 당나라산 능라로 엷은 여름옷을 해 입은 품이 돈푼께나 있어보였다. “아이고, 이 주인 나리, 오래간만이에요. 어서어서 오시와요.” “아니 이 색씨야, 술도 마시기 전에 취했나? 아, 그래, 엊저녁에도 봐 놓고 오늘 또 오랜만이야?” “아따 나리도,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 아닌감유.” 계집은 새초롬한 눈으로 사내를 흘겨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사내는 덥석 계집의 허리를 껴안으며 껄껄 웃었다. “허허허허…….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호호호호호……. 그럼요.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옵죠.”
“허어, 약방에 감초라더니, 어느 술집을 가나 자네가 있구만!” 그는 술을 받아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서 술을 받아 마신 사내는 아예 멍석 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이소룡이라는 이 사내는 원래 만물상 주인으로서, 당나라 사신 이대룡을 알게 된 뒤로부터는 사신과 형님 아우 해가면서 당나라에서 수입되는 비단을 취급하여 돈께나 모은 사람이었다. 그가 당나라 사신과 가깝다는 사실은, 장안에서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그를 가까이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래서 그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어있는 것이었다. 연태조 대감의 아들 연개소문에게 돌궐사신의 대명이 내려졌다면서…….”
돌궐 사신으로 가는 건 섶을 지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꼴이란 걸 모르신단 말씀이오?” 그의 입에서 침이 튀는 것을 필두로, 여기저기서 제가끔 입방아를 찧어대기 시작했다. “연태조도 이젠 망했군. 그 아들 녀석이 어디 가서 검술께나 배워왔으면 왔지, 아니 그래, 대왕마마를 모시는 어림군의 군관을 함부로 때려 뉘였으니 제깟 놈이 배겨낼 수 있어?” “아따 이 사람아! 그것 때문만은 아녀! 연태조가 주책없이 고집을 피웠다네!” “무슨 고집을?” “당나라를 치자고 말일세!” “아무리!” “정말이라니까!” “그럼 큰일이지! 이젠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하이.” “그러게 말일세! 싸울라면 연태조인지 뭔지 자기 혼자 나가서 싸우라지 그래.” 슬그머니 이소룡이라는 자가 나섰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선 어림군의 소익환 대감이 큰 인물이여. 아 그래, 총관부 군관 수십 명이 연개소문에게 맞아서 초죽음이 되었는데도 전혀 보복을 안 했다고 그러더군. 보복은커녕 오히려 그 불한당 같은 연개소문을 사신으로까지 천거하였으니, 그 배포가 얼마나 큰가 이 말이여!” “허허허허. 이 주인 나리의 말씀이 옳소!” “암. 정답이여!” 그들은 제각기 지껄이며 여러 순배의 술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다. 춤추는 이는 워낙 취해서 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대다가 그만 이소룡의 뻗친 다리에 걸려 쿠다다당! 술상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 통에 안주 찌꺼기가 이소룡의 얼굴을 덮쳤다. 그는 자기 얼굴에 붙은 파전을 푸우, 푸우, 불어내며 춤추던 취객에게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이 우라질 놈아! 술을 처먹었으면 좀 고이 앉아있지 이게 무슨 꼴이야, 엉?” 그러자 젊은 취객이 비실비실 몸을 일으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자아! 이제 그만 일어납시다. 이 주인 나리, 얼른 가서 놈을 해치워야 하지 않겠소? 히히히~ 이 주먹이 울고 있소이다.”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해치운다는 말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비밀스런 일이긴 하나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던 다른 술꾼이 그의 입을 자기 손으로 팍 덮어 막았다. “야, 야, 네 꼴에 누굴 해치운다고 큰소리야! 지금 곧바로 느네 집으로나 달려가서 네놈 계집이나 후딱 해치워라 이놈아!” 그러자 그 옆에 옆엣 술꾼들이 한꺼번에 우루루 몸을 일으키곤 어정어정 따라 나갔다. 한 구석에서 혼자 술상을 받아놓고 있었던 사내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는 굵은 삼베옷의 도복에다 커다란 방립을 썼는데, 도포자락에서 은자 한 닢을 꺼내 술집 주인에게 주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
'소설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新연개소문전 - 탈출의 묘수 2(글쓴이-蘭亭주영숙) (0) | 2017.10.06 |
---|---|
新연개소문전 - 탈출의 묘수 1(글쓴이-蘭亭주영숙) (0) | 2017.10.06 |
新연개소문전 -음모에 걸려들기6 (글쓴이-蘭亭주영숙) (0) | 2017.10.02 |
新연개소문전 -음모에 걸려들기5 (글쓴이-蘭亭주영숙) (0) | 2017.10.01 |
新연개소문전 -음모에 걸려들기4 (글쓴이-蘭亭주영숙) (0) | 2017.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