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

新연개소문전 - 탈출의 묘수 2(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0. 6. 23:02

 

 

연개소문 이야기 [18화] 탈출의 묘수 2 

연개소문의 말이 달리자, 전송하려는 총관부의 군관들이 모두 뒤따르기 시작했다.
일행은 어느새 현무문(玄武門)을 나서고 있었다.


“개소문아!”


이제껏 아무 말없이 따라오던 문덕도사였다. 그는 도포 안주머니에서 굵은 삼베 보자기로 싼 물건을 끄집어내서 연개소문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을 잘 지녔다가 회원진(懷遠鎭)을 지나서 명왕산(明旺山)에 이른 때에 펴보도록 하여라. 각별히 잊이 않도록 명심해라.” 


“예, 사부님 당부, 꼭 지키겠사옵니다.”


“그리고……. 도중에 객관에 들 때엔 반드시 인접 관아에 연락하고 들도록 하여라.”


“허나 객관에 머물지 못할 때에는 어떻게 하옵니까?”


“아니다. 반드시 객관에 머물도록 할지니라.”


“녜?”


“내 말을 기필코 명심하고 지켜라. 알겠느냐?”


“예. 잘 알겠사옵니다. 사부님…….”


“지나친 자신감은 때론 일을 그르치게 하기 쉬운 법.”


스승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연개소문도 스승의 눈을 보며 속엣말을 했다.


‘자객 몇이 따르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겁을 집어먹을 연개소문이 아니었다.

헌데 스승은 지나친 자신감은 극히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

두 사내가 북으로, 북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스승의 각별한 당부도 있고 하여 저녁이면 반드시 객관에 머물되 인접 관아에 연락을 취한 뒤에야 유숙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때로는 황량한 벌판을, 때로는 울창한 원시림이 하늘을 뒤덮은 산길을, 때로는 험한 물길을 가로질러서 쉴 새 없이 말을 달렸다. 연개소문은 이미 천문과 지리에 능통해있었다. 아무리 북녘으로 가는 길이지만 풍토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히 알고 있었다. 거리낄 것이 없었다.
돌궐로 들어가는 입구인 서부총관 관내는 지만수 장군이 있었고, 마침 그가 연태조와 같은 북공 남수파에 속해 있어서 많은 편의를 제공받을 수가 있었다.

어느덧 길 떠나고 열흘이 지나 물빛이 오리 머리빛깔을 닮아서 압수(鴨水)라고 한다는 압록강을 건넜다. 안원부(安遠府)와 남해부 해성(南海府海城=奉天)땅을 지나고 회원부 땅인 철령(鐵嶺)을 거쳐 부여(扶餘) 상경(上京)에 이르렀다. 옛날 단군성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그 자손들이 살던 부여의 역사가 아련한 환상으로 펼쳐지자, 연개소문의 가슴엔 만감이 교차하였다.


북국에도 이미 여름이 한창이어서, 돌이켜보니 마치 무더위를 등에 지고 북녘으로 날아든 철새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계속 말을 몰아 돌궐 입구 중립지대 백평산(白平山) 남쪽 대거리란 마을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대거리 마을은 고구려 · 돌궐 · 당나라 · 거란 등 여러 나라의 중립지대였다. 작은 마을이긴 해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잘 어우러져 사는 국경마을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돌궐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늘 외래 손님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 당나라 북변과 인접해있으며, 고구려의 서남쪽인 요서(遼西)의 고죽(孤竹)으로 달리는 큰 도로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 · 당나라 또는 돌궐 · 거란 등 여러 민족의 각축장이기도 한 무정부 지대인 것이었다. 이곳에서 30여리 북쪽에서는 대흥안령의 험준한 산들이 높이 솟아있었다. 고구려 마지막 방어선이기도 한 이 산을 넘어야만 비로소 돌궐 땅이었다.


바로 백평산이었다. 옛날 부여시대에는 부여 상경의 성주가 관활했었다. 그땐 이곳에 백평성이 있었으나, 지금은 수목 울창한 심심산중으로 변해버렸다. 따라서 맹수와 도적떼가 들끓기 때문에 이 산을 넘으려면 반드시 무리를 지어야 했고, 사람의 수효가 모자라면 며칠이고 주막에서 묵으며 동행자를 기다리는 것이 상례처럼 되어왔다.

그랬다. 이 험준한 산의 남녘 대거리 초입에는 주막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 주막들 중에 가장 큰 객관이 <계명관>으로써, 고구려 · 당나라 · 돌궐 등 세 나라 사람들이 합동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각 나라의 관원들이나 사절들이 이 지방을 지나게 되면 십중팔구 이곳에 묵어갔다.


객관 안채엔 이미 고구려에서 온 장정들이 열대여섯 명 묵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관원도 아니고 장사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을 통솔하는 사람은 ‘보개’라고 하는 당나라 군인이었다. 그는 당나라 사신 이대룡의 사주를 받았고, 이소룡의 안내로 지하요새에서 15명의 장정을  인계받았다. 바로, 연개소문이 평양성을 떠나기 3일 전에 먼저 떠난 자객들인 것이었다. 자객들은 평양성을 떠나 회원부를 거쳐 요수 상류인 백평산 남녘의 대거리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바로 이 객관에 스며들었고, 여장을 풀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실컷 자고 일어났다.


해는 벌써 서산에 기울어지고 대륙의 무더운 날씨는 푹푹 찌는 듯했다.
보개는 웃통을 훌떡 벗어던지고도 팔락팔락 부채질을 하며 객관의 하인을 불렀다. 잠시 후 열 살 남짓한 사내아이가 달려와서 두 손을 모으고 고구려 말로 물었다.


“손님, 부르셨습니까?”


보개는 두 눈을 부라리며 꽥 소리 질렀다.


“야! 이거 원 더워서 죽겠다, 해! 시원한 냉수 한 사발 가져와! 또, 주인 오라고 해!”


소년은 혼자서 뭔 소린지 구시렁거리다가 볼멘소리를 했다.


“손님께서는 고구려 말씀이 퍽 서투르신 거 같은데, 어느 나라 분이신가요?”


보개는 갑자기 당황한 얼굴을 했다가 금방 표정을 고치고 소년을 나무랐다.


“예끼 놈! 버릇없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건 네 녀석이 뭔 상관이야!”


“아이고, 그게 아니라요. 주인은 고구려, 당나라, 돌궐, 이렇게 세 분이 계신데, 어느 주인을 찾으시는가 그 말씀입니다요.”


“뭐야?…….”


보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찾아냈다.


“그럼, 당나라 주인을 좀 오라고 해.”


“아, 예에~”


소년은 대답을 길게 뽑으며 꾸벅 머리를 숙였다.
잠시 후, 이 무더위에 청색 당나라 복장에다 팔짱까지 껴서 두 손을 완전히 감춰버린, 깡마른 노인이 나타났다. 코밑에 수염을 쥐꼬리 같이 길게 늘어뜨린 그 노인을 보자, 그제야 보개는 주섬주섬 웃옷을 걸쳤다.


“댁이 주인이시오?”


“그렇소이다. 왜 부르셨는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이리 좀 올라오시오.”


보개가 걸터앉았던 문턱에서 물러나 앉으며 걸친 옷을 바로 입으려고 하자 늙은 주인이 팔짱 꼈던 손을 쑥 빼서 휘저으며 성큼 방으로 올라앉았다.


“아이고 괜찮아요. 그냥 계십시오.”


“나이 많은 주인장 앞에서 실례인 거 같아서요.”


“원 천만에 말씀! 하실 말씀이나 어서 하시지요.”


주인의 그 말에 보개는 아예 웃통을 벗어서 방구석에 쭉 밀어놓고는 자기 짐 꾸러미에서 은자를 한 줌 끄집어내어 주인에게 내밀었다.


“주인장, 우리 일행이 아마도 4, 5일은 귀관에서 묵어야 할 것 같소이다. 그동안 잘 좀 편의를 봐주시길 바라오.”


“아니 손님! 이렇게 많은 은자를…….?”


“하하하, 주인장, 이건 숙박료가 아니라 그저 용돈으로 드리는 것이니 받아 두시구려.”


그제야 주인의 입이 함박 만하게 벌어지더니 기다란 쥐꼬리 수염을 살짝살짝 비틀며 은근짜로 다가들었다. 


“무슨 부탁이 있는지, 언제든 말씀하시오. 내 모두 들어드리리다.”


주인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나가려하자, 보개는 그제야 본말을 끄집어냈다.


“여보 주인장! 사례는 톡톡히 할 테니, 대문 아랫방 하나만 더 빌려주오.”


“그건?…….”


나가려던 주인이 몸을 돌려 보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금방 입 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우리 고국 손님의 청탁인데……. 암요, 그 방에 들어있는 손님을 내보내고서라도 손님께 빌려드려야죠.”


그 방이 비어있다는 것을 번히 알고 있으면서도 주인은 그리 생색을 냈다.
보개는 일행 중 빠릿빠릿하게 생겨먹은 3명의 장정을 골랐다.


“너희들은 지금 저 대문 아랫방으로 옮겨가서 망을 보아라. 연개소문이 언제 나타나는지 눈 부릅뜨고 살피란 말이다. 알겠느냐?”


“예! 염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다음날 일찍 잠을 깬 보개는 급히 졸개 둘을 불렀다.


“너희들은 이 마을 초입에 있는 주막에 가서 대기하라. 거기서 죽치고 있다가, 연개소문 일행이 나타나거든 지체 없이 와서 알려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그래놓고 보개는 얼굴 가득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아무리 날고뛰고 솟구치는 놈이래도 내 손안에 들어왔다 하면 끝장인 거다.’


보개는 원래 무예가 뛰어난 자로써 한때는 병략가 이정(李靖 571~649년)장군을 따라 종군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당나라에서 사신 이대룡을 돕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된 자였다. 이대룡을 도와 고구려의 북공책을 저지하는데 그 일익을 담당해왔고, 이제는 마지막 임무로써 연개소문 암살에 나선 것이다. 또한 그는 수나라 당시부터 간첩활동을 해온 자로써 백제와 신라 사람들을 꼬드겨 고구려에 투입시키고는 온갖 흉계를 꾸며온 장본이기도 했다.

4일째 되던 날 오후,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때쯤이었다. 졸개 중에 마을 어귀에 가 있던 두 명 중 한 놈이 헐레벌떡 보개에게 뛰어왔다.


“옵니다. 와요!”


“오다니? 뭐가? 그놈이? 똑 바로 말해!”


보개는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는 졸개를 다그쳤다.


“아이쿠, 우리 손에 죽을 그놈 말입니다!”


“연개소문?”


그제야 보개의 눈이 빛을 발했다.


“예! 개소문!”


“몇 명이더냐?”


“단 두 놈입니다요!”


“뭐라고? 장난 하냐? 바른대로 말 못해?”


“진짜로 두 명이오!”


보개가 얼른 밖으로 나가보니 과연 둘이었다. 붉디붉은 저녁놀을 등지고서 두 필의 말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저것이야?”


“예! 맞습니다!”


“그래? 아우~~~~ 힘 빠진다. 수십 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오는 줄 알았더니……. 하여간! 너는 얼른 들어가서 동료들에게 만반의 태세를 갖추라고 일러라.”


졸개가 부랴부랴 자리를 뜨자, 보개는 객관에서 커다란 방갓을 하나 얻어 썼다. 그리고 객관을 빠져나가 멀찌감치 서서 연개소문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



연개소문은 바우와 함께 말을 달려 강을 건너고 회원진* 북방인 명왕산*을 지나 이윽고 중립지역에 이르렀다.


“오늘은 여기서 묵어가야겠다. 바우야, 적당한 객주집을 알아보고 오너라.”


연개소문이 시원한 나무 그늘에 땀을 식히며 바우에게 분부하자, 바우는 옙! 하고서 마을로 뛰어 내려갔다. 해는 이미 서산마루에 걸려있었다.


“저기 동네 어귀에 있는 객주 집에 아담한 방이 하나 있답니다.”


한참 후 바우가 돌아와서 보고했다.
객주집의 방들은 바우의 말대로 아담하고 정갈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기로 하자.”


연개소문은 주인을 불러 방을 지정받고는 여장을 풀었고, 벌렁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불현 듯이 몸을 일으켰다. 집에서 떠나올 때 스승이 건네준 보따리가 생각난 것이었다. 성미 급한 연개소문은 벌써부터 그것을 펴 보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중립지대에 도착하면 끌러보라는 스승의 당부 때문이었다.


‘여기가 명왕산 너머 하룻길이니 중립지대 아닌가. 그래. 뭔지를 보자!’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조심조심 보따리를 풀어보니 웬 두루마리가 들어있는 거였다.
그는 등잔불의 심지를 올리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개소문 보아라. 당나라 사신 이대룡과 어림군 총관 소익환은 순전히 북공책을 저지하기 위해 너를 돌궐로 보낸 것이다. 그들은 당나라 무관 보개라는 자와 만물상 주인 이가와 더불어 너를 없애려고 공모하였다. 보개라는 자가 장정들을 이끌고 너보다 먼저 중립지대인 대거리 계명관에 가서 너를 기다릴 것이다. 너는 계명관을 피하지 말고 유숙하되, 그들이 주는 음식을 주의하여라. 보개는 객주집 당나라 주인과 내통할 것이 빤하다. 네가 먹을 음식에 독을 타거나 네가 잘 때 죽이려 들 것이 분명하다. 그리 알고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마라. 그리고 자객들의 인상착의는 바우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주는 음식은 먹되, 진실로 먹지는 말 것이며, 잠은 자되, 진실로 잠들지는 말아라. 이를 명심하라」


-------------------------------






*회원진(懷遠鎭) : 중국 요령성(遼寧省)지역의 옛 지명. 614년(영양왕 25)에 수나라의 양제(煬帝)가 전날 고구려에 패한 것을 분히 여겨 다시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다. 양제는 회원진에 머무르면서 각 군을 지휘하였고, 수사총관(水師摠官) 래호아(來護兒)는 비사성(卑奢城)에서 고구려군을 쳐서 물리친 뒤 장차 평양으로 진군하려 하였다. 이에 고구려왕이 양제에게 항복을 청하고 전에 망명해온 중국인을 보내니 양제는 회원진에 머무른 지 6개월 만에 회군하였다. 보장왕 때에 당나라 장군 이세적(李世蹟)이 회원진에 나오는 것처럼 한 뒤에 북으로 고구려의 여러 성을 쳤다. 이로 미루어 회원진은 요하(遼河) 서편의 중요한 고구려의 군사요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삼국사기》

*명왕산(明王山) : 《대명일통지》를 보면 “명산(明山)이 복주위(復州衛)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원사(元史)》 지리지를 보면, “명왕산이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고구려왕의 아들을 동명(東明)이라고 하는데, 그 위에다 장사지냈다. 지역을 가지고 상고해보면 아마도 바로 이 산인 듯하다.” 하였다. 지금 복주의 동쪽에 있는 여러 산들 가운데에는 ‘명산’이 없다. 그리고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은 복주의 지역이 아니다.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요령성의 동경)요양부에 명왕산이 있다” 하였는바, 반드시 요양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이정(李靖·571~649년) : 중원이 혼란스러웠던 남북조 시기, 북방의 소수 유목민족들은 제각기 세력을 떨쳤다. 그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돌궐이었다. 돌궐은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몇 차례 전투 후에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린 당나라는 돌궐에 신하로서 복종하기로 맹세한다. 당나라로서는 치욕적인 굴욕이었다. 이런 상황을 역전시킨 것은 날씨였다. 6세기에는 자연재해가 잦았던 시기였다. 고기후학에서는 당시 화산폭발이나 소행성과의 충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기 상공에는 엄청난 먼지들이 베일을 만들어 태양 빛을 가렸다. 지구 기온은 낮아졌고 전염병들이 창궐했다.

돌궐 지역 가뭄·한파로 분쟁과 반란이 속출하는 상황을 틈타 당태종은 대장군 이정에게 돌궐정벌명령을 내렸다. 초원의 풀에 의지하던 돌궐은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힘이 크게 약화됐다. 모욕을 참아 가면서 기다려 오던 당나라에 기회가 온 것이다. 

 서기 626, 당태종은 위수 유역에서 돌궐의 힐리가한이 이끄는 20만 기병에 승리했다. 하지만, 돌궐 주력 세력에 큰 타격을 입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돌궐의 힐리가한도 당나라 군사들이 예상보다 우수한 데다 사기가 높은 것을 전투를 통해 알게 됐다.

두 나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당태종은 매년 힐리가한에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면서 백마를 제물로 한 맹약을 맺었다고 해 지금까지 백마지맹이라 불린다.

  이후 당태종은 돌궐로 인한 굴욕을 갚기 위해 대대적으로 군대를 양성했다. 식량을 비축하고 무기를 개선했으며 힘을 비축해 반격을 준비했다. 때마침 돌궐 지역에 가뭄과 강력한 한파가 몰아쳤다. 천재지변으로 살기가 어려워진 돌궐 내부에서는 분쟁과 반란이 속출했다.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서기 630년 정월, 당태종은 대장군 이정에게 돌궐 힐리가한의 군대를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이정은 원래 수나라 장수였으나 당나라 건국에 참여하면서 큰 공을 세웠다. 이정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그야말로 전설 속의 명장으로 등극했는데, 돌궐과의 전투는 그의 진가를 잘 보여준다. 

 정월의 북쪽 초원은 강한 바람과 추위와 눈으로 뒤덮인 황량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사는 돌궐족조차 기동하기 어려운 날씨였다. 이정은 돌궐이 이런 날씨에 감히 공격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점을 이용했다. 그는 용맹한 기병 3000명만을 이끌고 진격했다. 많은 병력은 기습하는 데 방해가 되고 또 보급에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속하게 돌궐 왕의 도성 정양(定襄·대리성, 오늘날의 내몽고 남쪽) 수 리 밖까지 진군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인근까지 공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돌궐의 왕 힐리가한은 당나라 놈들, 정작 멸망하고 싶은 게로구나. 감히 이곳까지 발을 들이다니!”라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수십만 명에 달하는 돌궐의 군사들은 분산돼 있었고, 힐리가한의 심장부에는 소수 병력밖에 없었다. 이정은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전광석화와 같이 공격해 들어갔다. 힐리가한은 도망칠 방법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기병 3000명으로 돌궐의 수도인 정양을 점령한 당나라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때는 엄동설한이었다. 내몽고 지역으로 급히 도망친 힐리가한은 음식 부족과 추위를 막을 의복조차 부족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맹추위로 당나라의 이정이 더 이상 추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힐리가한은 당태종에게 특사를 보내 강화를 청했다. 승리에 기뻐하던 당태종은 제안을 받아들여 특사를 힐리가한에게 파견했다. 

 특사가 힐리가한과의 강화를 위해 가는 것을 본 이정은 다시 결단한다. “힐리가한은 비록 패했지만 돌궐족의 용맹은 대단하다. 만약 힐리가한이 고비 사막 이북에 있는 회흘이나 설연타 등과 힘을 합친다면 멸망시키기는 어렵다. 나는 정예군 1만 명과 20일치의 식량만을 지니고 다시 기습하겠다. 힐리가한이 강화로 마음을 놓고 있는 이때 재빨리 습격한다면 힐리가한을 생포하고 돌궐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정은 정예군 1만 명을 이끌고 힐리가한의 본거지로 진격해 돌궐의 순찰 기병을 모조리 섬멸했다. 그런 다음 쥐도 새도 모르게 힐리가한의 본거지를 급습했다. 힐리가한은 병력을 모을 틈도 없이 천리마를 잡아타고 도망쳤다가 결국 포로로 잡힌다. 이정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돌궐 부족민 15만 명, 가축 수십만 마리 등을 손에 넣었고 음산에서 대막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당나라로 편입시켰다. 동돌궐이 멸망한 후 당나라는 천하에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주변의 소수민족들은 하나둘씩 당조에 신하 되기를 청했다. 당태종이 실질적인 천하의 군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동돌궐의 멸망은 이정이 당조에 세운 가장 위대한 공적이었다. 이로써 북방 변경 지역은 안정을 되찾았고 백성들 역시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당태종이 나라를 부흥시켜 정관의 치를 이룰 수 있었다. 이정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정은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으며 죽은 후에 당나라 태종의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되는 영예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