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20화] 탈출의 묘수 4
“자, 모두 잘 들으라. 두 놈 다 황천객이 되었다. 원체 독약을 골고루 섞어놔서 냄새도 없었던 모양인지, 둘 다 먹을 만큼 먹고 자빠진 모양인데, 만에 하나, 약발이 받지 않는 신체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너희들은 무장을 단단히 하고 내 지시를 따라주기 바란다. 연개소문인가 하는 저 놈은 원체 독종이라고 한다. 그래서 노파심으로 하는 말인데, 만약 되살아나는 불상사가 생길 시를 대비하여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하라. 알겠느냐?”
“예이~”
장정들은 제각기 칼 · 창 · 손도끼 등의 무기를 들었다. 15명의 자객들은 하나같이 긴장된 얼굴로 두목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보개가 불쑥 물었다.
“이 가운데 누가 그 방에 가본 자 있느냐?”
뒤에서 누가 목을 길게 빼고 보개를 보았다.
“장군님! 바로 조금 전에 판돌이가 보고 왔는뎁쇼.”
보개는 반가운 얼굴로 판돌이에게 물었다.
“판돌이 네가? 그래, 어쩌고 있더냐?”
“정신없이 곯아 떨어져 있었습니다.”
“숨통이 끊어진 건 아니고?”
보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제 모든 일이 순풍에 돛단 듯이 되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제법 상전 행세를 하느라고 헛기침을 몇 번 하고나서 자못 위엄스레 입을 열었다.
“십중팔구 숨통이 끊어질 것이다. 만사 우리 뜻대로 되었다. 연개소문의 몸이 약발을 받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엄청 힘들 뻔 했는데, 하늘이 도우사 순순히 우리 올가미에 걸려들어 주었다. 일은 너무나 간단하게 끝났고…… 이제는 뒤처리만 남았을 뿐이다. 자아, 이 밤만 넘기면 너희들의 앞날에는 부귀영화만 남아 있느니라. 알겠느냐?”
‘와우!고생 끝, 행복 시작!’
졸개들은 모두 감격에 벅찬 얼굴로 서로를 얼싸안을듯 마주보며 형식적인 대답을 했다. “예에~” “그러면 가자! 절대로, 객관의 다른 손님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조용 그 방으로 습격해야 한다.”
“습격이요?”
“그렇다. 습격이다!”
습격이고 잠입이고 간에 그게 그거다,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보개는 미리 준비했던 밧줄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이 밧줄로 두 놈을 꽁꽁 묶도록!”
“장군님! 이미 죽은 놈들을 왜 묶습니까?”
“야! 이 멍충아!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다된 밥에 코 빠뜨릴 일 있나? 죽은 게도 발을 묶으라 했고,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란 말이 있다!“
어느덧 자시가 다가오고 있어서 안채 뒤채 바깥채 객실의 손님들이 모두 잠이 들어 풀벌레 우는 소리만 정적을 깨고 있었다. 달도 없는 밤하늘엔 별들이 초롱초롱했다. 보개는 졸개들을 이끌고 살금살금 기어서 연개소문이 잠든 방으로 다가갔다.
방문이 활짝 열려있었지만, 방 안쪽이 잘 보이지를 않을 만큼 어두웠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장정이 흰 이불을 쓰고 누워있는 모습만은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자, 세 번을 헤아리면 한 번에 뛰어들라! 하나! 두울! 셋!”
옴짝달싹못할 정적을 헤적이면서 두목의 명령이 떨어졌고, 16명의 그림자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한 순간에 몰려 들어갔다. 그리고 누워있는, 아니 뻗어있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보개는 또 명령을 내렸다.
“빨리빨리, 두 놈을 빨리 묶어라!”
누군가가 잽싸게 이불을 젖혔는데, 그래도 기척이 없었다.
“어, 죽은 모양이네……”
한 졸개가 그리 중얼거리자, 두목이 안심 턱 하고 소리를 높였다.
“여봐라! 불을 켜라!”
그때였다.
“앗 하하하하!”
별안간 두목 보개의 등 뒤 문 밖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뒤흔들어놓았다.
“앗 하하하하핫!”
“앗!”
보개는 후닥닥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밖에서 웃는 놈이 누구냐!”
“하하하핫! 밖에 계신 분이 바로 연개소문이시다!”
보개는 기절초풍할 것 같은 몸을 간신히 가누고 모기소리를 뱉었다.
“무엇이?”
“네 이놈들!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연개소문의 몸은 호령과 함께 훌쩍 방문 앞을 막아서며 번개 같이 장창을 휘둘렀다.
“아이쿠!”
“헉!”
“으악!”
연개소문의 장창이 번쩍일 때마다 떼 비명이 밤공기를 잡아 쨌다. 자객들은 모조리 방 안에서 우왕좌왕 저희끼리 박치기를 하며 아우성 쳐댔다. 출구를 봉쇄당한 그들은 완연 독 안에 든 쥐새끼 꼴이 되어 변변히 대항도 못해보고 우루루 쓰러졌다. 곧이어 방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간간이 목숨이 붙어있는 자의 신음소리만 처절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바우야 불 켜라!”
“옙!”
바우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등잔에 불을 켰다. 16명의 자객들이 방이 미어터지도록 질펀히 쓰러져 있었고, 그 중 몇 명은 중상을 입은 채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보개였다. 가까스로 요도(허리칼)를 빼든 그는 연개소문에게 그것을 던지려고 겨누고 있는 참이었다.
“서방님! 보개요!”
바우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보개의 요도가 연개소문의 귀를 스치고 날았다.
“에잇! 당나라의 개새꺄!”
연개소문의 장창이 비호처럼 날아가 보개의 심장을 꿰뚫었다. 바우가 가서 장창을 뽑아내자, 좌악! 검붉은 피가 솟구쳐 벽에 척척 붙다가 말고 이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윽!”
최후의 신음소리와 함께 보개는 고개를 푹 떨어뜨리며 사지를 뻗었다. 바우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놈을 일일이 찾아서 모조리 칼로 찍어버리기 시작했다. 방 안엔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바우야! 이제 그만하고 나오너라.”
“아이구 서방님. 이런 역적놈은 살려둘 필요가 없습니다. 깨끗이 황천길로 보내야죠!”
“하기야, 네 말이 옳다. 이런 것들은 살려두면 나라에 해만 될 뿐이다. 아참! 바우야!”
연개소문이 황급히 바우를 다그쳤다.
“냉큼 나가서 이 집 주인을 잡아라!”
“앗! 그렇네요. 주인 놈이 내통한 게 틀림없을 겁니다.”
바우는 재빨리 방문을 걸어 잠근 다음 객관 주인 방으로 달려갔다.
주인 방에서는 주인들대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뒤였다. 연개소문이 묵고 있는 방에서 큰 소동이 일어나자, 객관 주인들은 그들대로 혼란과 당혹감의 소용돌이에서 아우성치고 있었던 거였다. 이 중립지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강력한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왔다. 그런데 당나라 출신 주인이 당나라 군관과 결탁하여 고구려 사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아차린 다른 두 주인이 노발대발하여 당나라 주인에게 덤벼든 것이었다.
“이 당나라 늙은 놈아! 우리가 이곳에서 객관을 경영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만도 천행인데 그래, 이놈아! 당나라 자객과 내통하여 음식에다 독을 타다니! 우리까지 죽일 참이었어? 이 늙은 여우야! 너부터 먼저 죽어봐라!”
그들은 살기등등하여 당나라 주인을 윽박질렀다.
“아이쿠 여보게들! 내가 눈이 뒤집혀서 그랬네! 용서해주게 제발!”
늙은 당나라 주인은 사색이 되어 빌고 또 빌었다. 바로 그 때 요란한 싸움소리가 나자, 두 주인은 당나라 주인을 내버려두고 안채로 달려갔었고, 당나라 주인은 그 새를 틈타 도망쳤다. 보개에게서 받은 은자와 짐 꾸러미를 집어 들고 뺑소니쳐버린 것이었다. 두 주인이 뒤채에 이르렀을 땐 이미 상황이 종료된 상태였다. 그들은 흥분하여 달려오는 연개소문과 바우에게 딱 걸렸다. 고구려 주인과 돌궐 주인은 연개소문과 바우를 보자마자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쿠, 장군님! 모든 것이 저희들의 불찰이오니 그저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그들은 계속 허리를 굽실거리며 용서를 빌었다. 자초지종을 낱낱이 들은 후, 연개소문은 두 주인을 더 이상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잘 알겠소. 당신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소? 그 당나라 늙은이를 놓친 것이 분하오만…….”
“장군님, 살려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이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그들은 수없이 머리를 조아려댔다.
연개소문은 다른 객관으로 옮겨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백평산을 향해 막 대거리 마을을 빠져나가려는데, 뒤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장군님! 장군님! 잠깐만요!”
뒤를 돌아보니 한 소년이 달려오고 있었다.
“응?”
연개소문은 의아한 표정을 하고 말을 멈췄다.
“누굴 찾는 게냐?”
가까이 다가온 소년이 ‘헤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장군님, 저는 계명관에서 일하는 사동이옵니다.”
연개소문이 자세히 보니 틀림없는 계명관 사동이었다.
“오, 그렇구나.”
소년이 대뜸 옆구리에 끼고 온 쌍전을 내밀었다.
“장군님께서 이것을 잊고 가셨기에 갖고 왔습니다요.”
틀림없는 자신의 쌍전이었다.
“어허! 큰일 날 뻔 했구나. 이것을 어찌 잊었던고…….”
연개소문은 소년이 무척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쌍전을 받아 쥐고는 품속에서 은자 몇 닢을 꺼내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고맙다. 몇 푼 안 되지만 용돈에나 보태 쓰렴.”
“와아~ 장군님, 이렇게 많은 은자를 받아보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감사하옵니다.”
“녀석!”
소년은 너무 좋은 모양인지, 이리저리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말을 혼동시켰다. 그러다 문득 연개소문을 돌아보고 야호! 환호를 한 번 올린 후에야 제 길을 찾아 따가닥, 따가닥, 달리는 거였다.
한동안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던 연개소문은 다시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
여름날의 아침햇살이 서서히 백평산 북녘 기슭을 밝혀주고 있었다. 계곡의 사이사이마다 당나라 진지가 정연하게 가설되어 있었고, 한 언덕에는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장군이 있었다. 그는 돌궐 원정군 대총관인 당나라 정양도총관 이정(李靖)이었다.
당태종은 오랜 숙적인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우선 눈엣가시 같은 돌궐을 평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을 받들고서 보병과 기병 10만 대군을 이끌고 돌궐의 동도(東都)를 포위한지도 벌써 일 년 여 세월이 흘렀다. 사력을 다해 응전하는 돌궐의 군사들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치밀한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질 않았다. 뜻밖에도 불의의 습격을 받은 돌궐의 왕은 자신이 친히 전군을 통솔, 배율치명을 선봉장으로 삼고 아사나진한 장군을 후군으로 삼아 맹렬한 항전을 계속하였는데 그 힘이 막강하였다. 자신이 친히 중군이 된 돌궐왕은 흑산(黑山) 중군 장막에서 직접 독전을 하게 되었고, 돌궐군의 사기도 덩달아 하늘을 찌를듯하였다. 아무리 우세한 당나라군이었지만 이를 쉽사리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대 제일의 병략가(兵略家)요, 희대의 명장 이정은 망연히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이정은 돌궐 평정이야말로 자신이 이뤄낼 수 있는 최후의 업적임을 이미 가늠하고 있었다. 그는 고구려의 움직임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대룡 등의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도록 적극 힘썼다. 문벌책에 의해 그 국론을 화평책으로 돌리고 돌궐에 원병을 보내지 말도록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정의 계략이었다. 그렇게 배경을 튼튼히 해놓고 나서, 자신의 군사를 요락수(饒樂水)를 끼고 동서로 뻗친 홍안령 줄기인 백평산에 이르기까지 포진하고, 자신의 군막을 이 백평산 북녘에 치고 있었다. 이 백평산을 남으로 넘으면 당나라 · 말갈 · 고구려에 통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전쟁이 나면 이 산만 봉쇄하면 되는 것이었다. 돌궐의 중요한 보급로를 차단하여 그 혈맥을 끊어버리는 결과를 빚어내기 때문이겠다.
질서정연하게 다듬어진 당나라 진영을 내려다보던 이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끗희끗한 수염을 훑었다. 그때, 저 아래서 시종군관이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허겁지겁 달려온 군관은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군례를 올린 후에 보고하였다.
“장군님께 아뢰오! 백평산 남쪽 중립지대에 있는 계명관의 늙은 주인이 장군님을 급히 뵈옵겠다고 왔사옵니다.”
“계명관 주인이라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이정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찮게 좋은 정보를 물어와 풀어놓곤 하던, 늙고 깡마른 자였다.
“내 군막으로 갈 것이니, 그 자를 장막 안에 대기시켜라.”
“옙!”
군관은 잽싸게 군례를 올려붙이곤 구르듯이 뛰어 내려갔다. 오십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의 이정은 천천히 군막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몹시 비탈진 길이라 올라올 때보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명장 이정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인 거였다.
“장군님, 그동안 옥체 대안하시옵니까?”
객관 주인이 그리 말하며 배례하자, 이정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거, 오랜만이올시다. 그렇잖아도 요즘 소식이 없기에 궁금하던 차였소. 마침 잘 왔소이다.”
늙은 객관주인에게 자리를 권한 이정은 자신도 교의에 앉아 그를 살폈다. 평소의 꼬장꼬장하던 모습과는 달리, 유난히 초췌한 얼굴이었다. 입은 옷은 이곳에 오는 동안 몇 번을 굴렀는지 여기저기 흙이 묻고 찢어져서 말이 아니었다.
‘필시 무슨 일이 벌어졌어!’
이정은 시종군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밖으로 물러가 있거라.”
“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