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

新연개소문전 - 탈출의 묘수 5(글쓴이-蘭亭주영숙)

해피y 2017. 10. 10. 22:54

 


연개소문 이야기 [21화] 탈출의 묘수 5


 

군관이 군례를 올린 다음 장막 밖으로 나가자마자, 이정은 노인에게 바짝 다가가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끄집어냈다.


“노인장, 무슨 긴급한 일이라도 생긴 거요?”


“예에······.”


늙은이는 두 손을 싹싹 비비적거리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장군님, 큰일이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이정은 잔뜩 긴장하여 귀를 기울였다.

“다름이 아니오라······. 어젯밤, 소인의 객관에서 당나라 군사 16명이 몰살당했습니다.”

“뭣이라굿!”


눈이 휘둥그레지며 벌떡 몸을 일으킨 이정이 몹시 안타까운 얼굴로 노인을 다그쳤다.

“주인장,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우리 군사가 왜 당신 객관에서 몰살당한단 말이오?”


“그런 것이 아니오라, 고구려에서 온 보개 장군 일행이······.”


“보개?”


객관 주인은 가지고 왔던 보따리를 끌렀다.


“보개장군이 소인의 객관에 맡겨 놓았던 것이옵니다.”


보따리 속에는 고구려에 파견된 사신 이대룡이 본국 당나라에 보내는 보고서가 들어있었다. 보개가 연개소문을 암살하기 위해 장정 15명을 인솔하고 거동한다는 암살계획의 전말 또한 세세히 기록되어있었다.


“그래, 보개장군은 어쩌다가 죽었단 말이오?”


그러자 늙은이는 어젯밤 계명관에서 일어났던 일을 세세히 설명했다.


‘연개소문이라······. 결코, 살려둘 수가 없군.’

그는 한참 생각하던 끝에 넌지시 물었다.

“그래, 연개소문의 일당이 몇 명이오? 아무리 간단하더라도 열 명은 넘었겠구려?”


“단 두 명이었사옵니다.”


“허어! 단 두 명? 두 명이라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허어 참!”


이정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흐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밝은 표정으로 변했다.

“주인장, 수고 많았소. 연개소문이 돌궐에 들어가려면 필시 우리 진지를 통과해야 할 것인즉, 그의 신세는 이제 독안에 든 쥐 아니겠소?”

노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렇사옵니다. 그래서 소인이 달려와 알려드리는 것이옵니다.”


“수고했소. 그럼 막사에서 편히 쉬도록 하오.”

이정은 밖에 대기하고 있던 군관을 불렀다.


“이 노인장을 다른 막사에서 쉬게 하라. 그리고 연개소문의 인상착의를 온 군중에 알리고, 그가 절대로 백평산을 넘지 못하게 하라!”


“예에, 분부 거행하겠나이다!”


◇◇◇



백평산 기슭에서는 연개소문과 바우가 바삐 말을 달리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온 자객들은 모두 처치했다. 그러나 그들과 결탁한 늙은 객관주인이 달아나 버렸다. 연개소문은 그것이 몹시 맘에 걸렸다. 이 백평산 너머 북쪽 기슭에는 당나라 이정의 군사기지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스승에게 들어 빤히 알고 있었다. 달아난 늙은이가 혹 이정에게 갔다면 당나라 진지를 벗어나기가 몹시 어려울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음모, 나를 잡으려는 음모에서 빠져나가기······.’

언제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를 판이라 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개소문은 거듭거듭 생각하며 백평산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해가 그들에게 내리쬐자, 전신에 흘렀던 땀방울들도 어느새 말라버렸다. 연개소문은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극심한 갈증에 허덕이며 겨우 산 중턱 낮은 구릉에 올랐을 땐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오른편 야트막한 봉우리 너머로 저 멀리 펼쳐진 들판이 바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은 조심조심 말을 몰아갔다.
혹여 나타날 당나라 군사를 피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득, 우거진 나무숲 사이로 자그마한 초막이 보였다.
연개소문은 낮은 소리로 바우를 불렀다.

“바우야!”


“예, 서방님!”


“저 산채에 들어가서 물이나 좀 얻어마시자.”


“아이구 서방님!”


“걱정 말아라. 까짓 당나라 군사 몇 놈쯤이야······.”


연개소문은 우선 갈증을 풀고 나면 비호같이 달려보리란 생각을 했다.
물 한 바가지만 마시면 힘이 부쩍 솟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굴피집인 산채는 제법 튼실한 싸리나무 울타리까지 갖추고 있었다.

“여보시오, 주인장!”

바우는 싸리 울타리 밖에서 안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세 번이나 외치고 나서야 안에서 가느다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뉘세요? 주인은 출타하고 안 계신데요?”


“송구합니다만, 지나던 과객이 물 한 그릇 얻어 마시려고 들렀소이다.”

한참 지나자, 젊은 여인이 물바가지에 물을 찰람찰람 담아 내왔다.


“아!”

길손에게 물바가지를 내밀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물바가지를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연개소문도 당황하여 그녀를 마주보았다. 눈앞에 한 송이의 꽃이 피어있는 것만 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멍한 눈길로 바라보는 연개소문 앞에서, 그녀가 발그레해진 얼굴을 그윽하게 들며, 조용조용 입술을 열었다.

“혹······, 고구려 평양성에서 오신 연개소문 장군 아니신지요?”


연개소문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어! 나를 어떻게?”

바우도 불쑥 나섰다.


“거 참, 희한하네. 어떻게, 산 설고 물 설은 이 골짜기에 사는 사람이 우리 장군님 함자를 다 들먹인담?”


낭자는 순간 귀가 먹은 모양이었다. 바우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멍하니 연개소문의 얼굴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맞아요. 그 얼굴이에요. 그날 이후, 소녀는 장군님의 얼굴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사와요.”


“그날 이후라니?”


“지난 단오절, 양각도 그네터에서 위급한 처지에 놓였던 소녀를 구하지 않으셨나요?”


“아아, 생각나는 구려!”

연개소문의 머릿속으로 지난날 양각도에서의 일이 빠르게 스쳐갔다.  
그날, 어림군의 소 총관과 당나라 사신 이대룡의 놀잇배에 잡혀있던 바로 그 소녀인 것이었다.

“낭자는 장안에 살고 있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왔단 말이오?”


연개소문이 다시 물었다.

“장군님······.”

그녀는 금세 불안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장군님, 이곳에 오래 계시면 당나라 군인들에게 붙들릴 것이오니 어서 안으로 드사이다.”

두 사람은 낭자의 안내를 받아 안채에 들어섰다. 겉보기보다는 아늑한 안채. 뒤뜰로 들어서자 그곳에도 사립문이 있고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었다. 두 사람은 뒤뜰 사립문 뒤 숲이 우거진 곳에 말을 매어놓았다. 그리고 바우는 말을 지키고 연개소문은 바로 그 옆의 창고 같이 만든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그녀가 가야산 토기 잔에 꿀물을 타 와서 연개소문에게 올리고, 한 잔은 바우에게 갖다주었다. 연개소문은 마침 갈증이 심했던 터라 꿀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는 말에도 물을 떠다 먹이고 나서야 연개소문 앞에 단정히 앉았다.

“장군님, 황공하옵니다. 소녀를 구해주신 은혜를 갚지도 못한 채....... 이곳에서 이렇게 뵙게 되니 더욱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는 성급히 물었다.

“낭자는 어인 곡절로 이곳에 와 계시는 거요?”

“아아, 장군님……”


그녀는 지금, 연개소문을 잡으려고 많은 당나라 군사들이 이 산에 잠복해있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일각이라도 급히 연개소문을 피신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계은비. 본래 평양성 차피문 안에 살고 있는 무인 계연수의 딸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늙은 아버지가 무남독녀 외동딸을 정성들여 키워왔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시서(詩書)에 능통하였고, 말달리기와 무예를 배워 그 출중함은 웬만한 대장부도 따를 수 없는 경지였다.

그러던 중 5월 단옷날, 은비는 사촌오빠의 권유로 그네뛰기대회에 참가한 거였다. 그날 그녀가 어림군의 군사들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자, 연개소문의 활약으로 구출되었었다. 그러나 다음날 저녁, 어림군의 군관들이 들이닥쳐서는 늙은 아비 계연수를 때려죽이고 딸 은비는 끌어내어 돌궐의 장사꾼인 보부린에게 팔아넘긴 것이었다. 보부린은 그녀를 데리고 백평산에 이르렀다. 아직 젊은 보부린은 틈만 나면 계은비의 몸을 탐했으나, 그 때마다 그녀는 온갖 회유와 애소로 순간순간 위기를 모면해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보부린이란 자는 사실 돌궐의 장사꾼이 아니라 당나라 군관으로, 이정 장군의 휘하에 있는 사람이었다.
계은비는 연개소문 소식을 오늘 아침 군사들이 보부린에게 전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 알았는데, 그 내용인즉슨, 어젯밤에 계명관에서 연개소문이 당나라 군사를 여럿 죽였으며, 그를 잡기 위해 군사들이 좍 깔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연개소문이 산을 넘어 온 길은 사람이고 말이고 잘 다니질 않는 오솔길이었다. 그 샛길 외에 또 하나 큰 길이 있었는데, 사실은 큰 도로가 원래의 통로이며, 인마의 왕래는 대개 이 큰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당나라군은 연개소문이 설마 오솔길로 들어선 줄은 모른 채로, 바로 이 큰길에다 군사를 매복시고서 연개소문이 나타나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개소문은 계 낭자의 세세한 이야기를 듣고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장군님, 어서 떠나십시오. 놈들이 곧 몰려올 것 같습니다.”

연개소문의 눈동자가 측은지심으로 흔들렸다.

“낭자는 어찌 하시려고?”


“소녀야 이왕 붙들린 몸이오니, 어서 장군님이나 떠나시와요.”


“아니 되오. 대장부가 어찌 아녀자의 곤궁한 지경을 알면서 그대로 지나친단 말이오? 낭자, 어서 우리와 함께 떠납시다.”

그때, 당나라 군관 둘이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엇! 서방님, 저것들 좀 보십시오.”

“보고 있다. 쯧쯧쯧, 뉘집 자식들인지 몰라도 명을 단축시키는구나.”

다행히 방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방이 안 보이고 방에서는 그들이 보이는 형국인 거였다.
계 낭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연개소문은 곧장 등에 메고 있던 장궁과 화살을 뽑았고, 화살은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고 날았다. 두 군관은 끽소리도 없이, 거짓말처럼 쓰러져 나뒹굴어졌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낭자를 그냥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낭자, 우리와 함께 갑시다!”

“하오나…….”


“일각도 지체할 수가 없소. 이제 저 두 사람까지 죽인 판에, 낭자가 어찌 무사할 수 있겠소? 어서 떠납시다.”

연개소문과 바우는 낭자가 갖다 준 찬 꿀물을 한잔 씩 더 마시고 부랴부랴 떠날 차비를 꾸렸다. 바우가 연개소문의 말을 끌고 오자, 연개소문은 말에 먼저 올라 한 팔을 벌려 낭자에게 어서 타라고 재촉하였다.


“아니어요. 말 한 필쯤은 소녀에게도 있사와요.”


낭자는 재빨리 마구간으로 가서 말을 타고 나왔다.
      
“장군님, 송구하와요. 가실 길이 바쁘실 텐데 소녀까지…….”


“아니오. 개의치 마시오.”


아름다웠다. 계 낭자의 말 탄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길잡이는 소녀가 하겠습니다.”


“고맙소, 낭자……”


낭자는 앞장서서 달렸다. 험한 비탈길을 능숙하게 말을 달려가는 낭자의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연개소문은 머리를 푸르르 털고는 말의 엉덩이에 채찍질을 가했다. 한참 내리막길로 달리다보니 저 아래 산기슭은 지형이 다소 평탄하였다. 그러나 좋아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래 계곡에는 당나라 군사들의 장막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흐음……. 대단하구나!”

커다란 선바위 뒤에 숨어서, 연개소문은 당나라군의 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나라군은 전 · 중 · 후군이 모두 정연하였다. 기치 창검*이 삼엄하여 강대한 군대로 보였다. 그 진세를 살펴보니, 육화진*을 만들었는데, 중앙에다 장수의 진을 배치해놓은 품이 명장의 진세임이 분명했다.


“낭자, 당나라 장수의 이름이 누군지 아시오?”


“이정 장군이라 하옵니다.”


“음~ 이정이라~ 천하의 명장이오!”

연개소문은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스승에게서 당나라에는 이정이라는 명장이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실제로 그 진세를 보니 과연 그는 명장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위인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까딱하다간 붙잡히기 십상인 걸.”

연개소문은 길을 재촉하여 조심조심 산을 내려갔다.

“이 비탈 길을 십여 리만 가다가 보면 무사히 당나라 진영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은 당나라 군사에게 들킬까봐 극히 조심하며 말을 몰아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큰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큰 구렁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연개소문의 말을 가로막은 구렁이는 말을 집어삼킬 듯이 아가리를 짝 벌렸고, 그 순간 연개소문이 장창을 꼬나들고 바로 내려찍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히이이잉!

구렁이에 놀란 개소문의 말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더니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바우가 탄 말도, 계 낭자가 탄 말도, 연달아 크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말의 울부짖는 소리가 삽시간에 온 숲을 뒤흔들고 메아리를 자아내어

저 아래로 파문 지어갔다.

* 기치창검(旗幟槍劍) : 옛날에 군중(軍中)에서 사용하던 갖가지의 기 · 창 · 칼 등의 총칭.
* 육화진(六花陳) : 제갈량의 팔진법을 본떠 만들었다고 알려진 진법/팔진법 : 중군(中軍)을 가운데 두고 전후좌우 동서남북의 여러 가지 모양으로 진을 배치한 진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