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이야기 [35화] 춤추어라 청룡도 6
연개소문을 호송한 행렬이 화암사에 도착한 시각은 이미 어둠의 장막이 짙게 내려서 수많은 연등만이 휘황한 불빛을 밝히고 있을 때였다. 화암사 입구와 경내를 빼곡 메운 구경꾼들은 저마다 연개소문의 모습을 보려고 목을 길게 빼고 아우성들이었다. 공주의 행렬은 이미 도착한 모양이었다. 화암사 건물 주위엔 청등홍등을 매달아 그 불빛이 대낮을 방불케 했다. 행사는 어느새 시작되어 법당 앞뜰에서는 미동과 미희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석가탄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수십 명 무장기병들에게 호위된 채로 말 위에 앉아오는 연개소문의 모습. 한 마디로 옥골선풍이었다. 이윽고 행렬이 뜰에 이르자, 연개소문을 호위해온 군관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렸고, 연개소문도 따라 내려 우뚝 섰다. 그의 몸에서 알지 못할 후광이 번져나며 주위가 완전히 압도되었다. 춤추고 노래하던 미동과 미희들이 저마다 손에 홍등 청등을 들고 물결이 갈라지듯 좌악! 양쪽으로 나뉘었고, 그 가운데로 연개소문은 군관 네 명의 호위를 받으며 입장하였다. 즐비하게 포개진 돌계단 위의 대웅전에서 공주가 연개소문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아, 황홀해…….’
이윽고 연개소문이 계단 밑에 이르러 멈추자, 공주의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늠름한 그 자세와 좀처럼 꺾이지 않을 기상이 연개소문의 온 몸을 우러나고 있었다. 옆에서 공주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조 상궁이 상서 고개보에게 눈짓을 하자, 고개보는 한 걸음 썩 나서며 우림군에게 시달하였다.
“오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이 연등놀이에 참례케 된 것은 우리 공주마마의 하해 같으신 배려 덕분이다. 연개소문은 마땅히 공주마마께 사은숙배해야 할 것이다. 제군은 이를 지체 없이 시행토록 하라!”
“예이~”
네 명의 군관이 동시에 대답하며 머리를 숙였다.
“장군은 어서 공주마마게 문후를 올리시오.”
한 군관이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그리 하리다.”
연개소문이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그에게 당나라 공주는 일개 아녀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일생일대의 사활이 걸린 날이다.’
저들이 하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 저들을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능청맞을 정도로 고분고분 대답한 연개소문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공주가 앉은 단 아래에 부복하여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
“대 당나라의 공주마마께 고구려의 연개소문 문후 드립니다. 소신, 귀국에 인질이 되어 감금된 몸으로써, 오늘의 경축일에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사와 이처럼 화려하고 경사스런 축전에 참가하게 되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이옵나이다.”
군관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연개소문에게 연민의 눈길을 보냈다. 연개소문에게 홀딱 빠져버린 공주는 넋을 잃기 일보직전이었다.
‘고구려는 동방예의지국이라더니 과연 허명이 아니었구나. 저렇듯 예의범절이 깍듯한 헌헌장부, 저렇듯 의젓한 귀공자를 나는 아직 당나라 천지에서는 본 적이 없다.’
공주는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연개소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연개소문이 뜰에 부복해있는 모습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단 아래로 뛰어 내려가 연개소문을 안아 일으키고 싶었다. 그러나 주의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수줍은 처녀의 마음은 그저 속절없이 타오르기만 했다. 공주는 발개진 얼굴로 조상궁을 돌아보며 일렀다.
“조 상궁, 그만 일어나라 하시오.”
조 상궁은 공주의 얼굴을 힐끗 돌아보며 눈웃음 쳤다.
“공주마마의 뜻, 곧 전달하오리다.”
조 상궁이 즉시 옆의 군관에게 공주의 뜻을 전달했고, 자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군관이 연개소문에게 하달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고개를 들고 단 위를 보시오!”
“공주마마, 황공하옵니다!”
연개소문은 일어서서 또 한 번 배례를 했다. 그리고 단 위를 바라보았다. 순간, 공주의 타는 듯한 시선과 연개소문의 강렬한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바지직, 불꽃이 일렁였다. 그러나 한참 후에 공주가 먼저 눈길을 거두었고, 공주의 마음을 알아차린 조 상궁이 연개소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은 검무가 일품이라 하니, 우리 공주마마를 위해 이 자리에서 그 재주를 펼쳐보여 주시기를 바라오.”
“소인의 변변치 못한 검무가 공주마마를 즐겁게 해드릴 수만 있다면 영광이겠사옵니다만…….”
“장군은 사양치 말고 검무를 보여주시오.”
“하오나 외신, 검무를 출 수 있는 대검을 지니지 못하와서……”
그러자 고 상서가 옆의 군관에게 명했다.
“여봐라, 대검 두 자루를 연개소문에게 주라.”
군관 넷이 즉시 칼을 대령했다. 80 여근(48kg)짜리 청룡도 두 자루를 한 자루에 둘이 들러붙어 낑낑거리며 가져온 것이었다. 검무에는 20근(12kg)의 칼이 적당하였지만, 연개소문이 공주에게서 총애를 받는 게 아니꼬운 나머지 그렇게 어처구니없게도 자기들도 혼자서는 들지 못하는 청룡도를 대령한 것이었다. 그래놓고 군관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연개소문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호흡을 멈추고 연개소문을 주시했다.
이윽고 연개소문이 관중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힌 다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양손에 청룡도 한 자루 씩을 쥐고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관중도 따라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들의 손은 모두 땀으로 끈적끈적했다. 순간, 연개소문이 눈을 번쩍 뜨는데, 그의 눈 주변에 푸른빛이 짜르르 흘렀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160근의 대검을 그는 양손에 가뿐하게 쥐고 있었다.
“야아!”
“와우! 와우!”
“와아아아아~”
마치 음악의 코러스 같기도 하고 단체한숨 같기도 한 탄성이 우렁우렁 화암사를 울렸다. 물론 청룡도를 날라 왔던 군관들의 입도 딱 벌어졌다. ‘춤 까지는 안 바란다. 제발 이 칼을 들기나 해. 흥, 못할 걸?…….’하던 그들은 고개를 팍 숙였다. 초장부터 꼬리를 내려버린 것이었다.
그 판에, 연개소문은 마치 나무 몽둥이 두 개인 것처럼 대검을 휘끈 들고 몸을 일으켰고, 동시에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저마다 경악하는 관중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하곤, 대검과 몸을 천천히 돌리며 준비운동을 마치고는 갑자기 빙글빙글 돌리며 챙챙 부딪쳐 가며 능수능란한 검무를 시작하였다. 오로지 칼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 뿐, 장내는 찍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어디선가 둥둥, 북소리를 필두로 연주가 시작되었고, 그 음률에 따라 두 자루의 칼이 허공에서 불꽃을 튕기며 난무했다. 챙! 챙! 칼날이 그어대는 섬광은 공중에 무수한 형광의 동그라미를 치며 행위예술로 승화되고 있었다. 관중들은 두 손에 땀을 쥔 채로 무아지경을 헤매면서 저절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검무는 점점 그 도수를 높여가며 회오리 빛살을 자아낸다 싶었더니, 느닷없이 대검을 잡은 손과 몸이 사라져버렸다. 대검 두 자루만 저희끼리 음률에 맞추어 돌아갈 뿐이었다. 공주의 눈이 사라진 연개소문을 찾아 마구 두리번거렸다. 다른 관중들도 무슨 요술구경을 하는 듯싶은 광경에 시선을 빛살소용돌이의 뿌리에 모으고 있었다. 검무의 주인이 칼날의 섬광에 휩싸였기 때문에 일으키는 착시현상이란 걸 깨달을 새가 없었다.
“우와아! 있다 있어!”
“저기 있다!”
음률이 다시 느려지면서 서서히 연개소문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왁자지껄하게 터져 나왔다. 그들은 너무 감동한 나머지 펄쩍펄쩍 뛰었다. 휘몰이장단을 쳐대던 음률이 그만 힘을 잃고 사그라지자, 검무의 주인 역시 천천히 대검 두 자루를 내렸다. 그리고 단상의 공주를 향해 정중히 배례했다. 황홀한 경지에서 꿈꾸듯 헤매던 공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열었다.
“여봐라! 저 검무의 대가, 고구려 장수님을 어서 이리로 모시어라.”
공주의 목소리는 술에 흠뻑 취한 듯 흥분에 겨워있었다.
“공주마마, 황공무지의 분부시옵니다.”
그렇게 머뭇거리며 연개소문이 단상에 쉬이 오르질 않자, 조 상궁과 궁녀 둘이 급히 내려와 연개소문을 부축하고 단상으로 안내했다. 연개소문이 공주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장군, 편히 앉으시오.”
공주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연개소문을 응시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 공주마마……”
연개소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하자, 조 상궁이 거들었다.
“공주마마의 특별 배려이니 장군은 편히 앉으시오.”
잠시 후, 공주가 친히 내리는 커다란 금잔(金盞)에 술이 가득 채워져서 연개소문에게 권해졌고, 그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혔다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공주는 그 모습이 몹시 안쓰러웠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연민의 정이 공주의 가슴을 옭죄었다.
‘아, 얼마나 고단할까……’
공주는 조 상궁을 돌아보며 분부했다.
“조 상궁, 장군을 저기 맞은편의 암자에 보내서 쉬도록 해주시오.”
어젯저녁에 조 상궁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무 후에는 일정 시간 몸을 쉬게 하는 것이 상례라는 말이었다.
“예에, 공주마마, 분부 곧 거행하겠나이다.”
“공주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연개소문은 다시 부복 배례하고 일어섰다.
“상궁님, 잠시라도 혼자 쉬게 해주시겠는지요?”
단 앞의 자그마한 암자로 안내된 연개소문은 조 상궁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탁했다.
“아, 장군님, 마음 푹 놓고 쉬십시오. 공주마마의 분부이신데요 뭐.”
“아, 감사합니다, 상궁님.”
조 상궁이 연개소문에게 쌩끗 웃어주었다. 연개소문이 암자 안으로 들어가자 따라왔던 군관 둘이 문에 빗장을 지르고 앞에서 보초를 섰다. 공주 옆에 앉아 그 광경을 유심히 보던 고개보가 옆의 군관에게 물었다.
“연개소문을 저렇게 암자에 혼자 두었다가 만에 하나 달아나면 어찌 할 것인가?”
“대감, 염려 놓으십시오. 저 암자 뒤에는 천 길 낭떠러지이옵니다. 이 앞에는 물론 우리 군관들이 저렇게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데…… 연개소문 아니라 연개소문의 할아버지라 해도 결코 달아나질 못할 것이옵니다.”
“아, 그렇긴 하겠네. 저 자가 혹여 절벽으로 뛰어내려 죽어준다면 오히려 시원한 일이긴 하지…… 호오, 저 뒤에 절벽이 있는 줄은 미처 모르고 괜히 걱정했구먼.”
연개소문을 안내하고 돌아온 조 상궁이 고개보에게 눈을 찡긋했다. 공주가 들었다간 몹시 상심할 말이었기에 조심시키는 것이었다.
공주는 한참 무슨 생각에 잠긴 듯 뜰에서 펼쳐지고 있는 가면무에만 눈길을 트고 있었다. 음률은 가면무에 따라 높으락낮으락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차피 밖에서 잠근 문이지만, 연개소문은 안에서도 방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리고 방 뒤에 붙어있는 광으로 가서 작은 들창을 열었다. 잘하면 한 사람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였고, 창밖은 과연 깎아지른 절벽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름드리 노송 한 그루가 창을 가로지르며 드리워져 있었고, 굵다란 등걸에는 밧줄이 매어져 길게 늘어져 있었다. 쪽지에 적혔던 그대로였다.
‘바우…… 고맙다.’
들창을 가까스로 빠져나오면서, 연개소문은 얼른 밧줄을 움켜잡았다. 남쪽하늘에서 뒤뚱거리던 상현달이 점점 서쪽으로 기울고 있어서 응달진 동쪽은 더욱 컴컴하였다. 천지사방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면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도대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캄캄하였다.
‘무조건 내려가야 한다. 어둠속에선 눈을 감아야만 잘 보인다.’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서, 연개소문은 밧줄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손바닥이 밧줄과의 마찰로 후근 후끈 열이 났고, 얼마를 더 미끄러져 내려가다가는 오른 발이 그만 벼랑에 삐져나온 나무뿌리에 부딪쳤다. 그 통에 오른발목은 물론, 바짓가랑이까지 죽 찢어졌다.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났다. 다행히 정신일도하여 밧줄을 잘 조종한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개소문은 간담이 서늘했다. 그는 다시 몸의 중심을 잡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도대체 얼마를 내려갔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이 다 까졌는지 쓰라리기 짝이 없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어쩌다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니 희미하게나마 절벽 사이로 팽팽하게 뻗쳐있는 밧줄의 형체가 보였다. 아래를 굽어보니 역시 밧줄의 형체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따금 말발굽이 돌부리에 부딪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그는 또 다시 속력을 내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낯익은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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